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 창비시선 449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 창비시선 449

$9.00
Description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절필의 시간을 벼려, 8년 만에 펴내는 안도현 신작 시집
중년을 지나며 바야흐로 귀향길에 오른 안도현 문학의 새 발걸음
‘시인 안도현’이 돌아왔다. 안도현 시인이 신작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를 펴냈다. “절필이라는 긴 침묵 시위”(도종환)를 끝내고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지 4년, 시집으로는 『북향』(문학동네 2012) 이후 8년 만에 펴내는 열한번째 시집이다. 4년간의 절필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음에도 시심(詩心)의 붓이 무뎌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깊어졌다. 세상을 늘 새롭게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과 그동안 겪어온 “인생살이의 깊이와 넓이”(염무웅, 추천사)가 오롯이 담긴 정결한 시편들이 가슴을 깊이 울린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시인 안도현’을 만나 ‘안도현 시’를 읽는 반가움과 즐거움이 크다. 그의 시집을 기다려온 독자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는 귀한 시집인 만큼 두께는 얇아도 내용은 아주 묵직하다.

2013년 절필을 선언했던 시인은 2017년 월간 『시인동네』 5월호에 신작시 「그릇」과 「뒤척인다」를 발표하며 창작활동을 재개했다. 스스로 내린 금시령(禁詩令)을 풀고 4년 만에 발표한 것인 만큼 이 두편의 시는 자못 의미심장하다(시인은 당시 “며칠 동안 뒤척이며 시를 생각하고 시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SNS에 글을 쓰기도 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그릇」)했던 허물을 돌이켜보고, “비유마저 덧없는, 참담한 광기의 시절”(산문집 『그런 일』)을 ‘뒤척이고 부스럭거리고 구겨지며’ 울음 같은 침묵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번민의 시간을 견뎌온 막막한 심정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시인은 이제 “한가한 비유의 시절”을 넘어 “아직 쓰지 못한 것들의 목록”(「너머」)을 적어나간다. 그리고 “이제 좀 고독해져도 좋겠다는 생각”(「시 창작 강의」)에 이르러 저 ‘너머’의 세상에 자신을 풀어놓으며 삶과 시의 경계에서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시인은 또 약전이나 약력의 형식을 빌려 “폐허가 온전한 거처”(「안동」)였을 하찮은 존재들의 가련한 생애와 소소한 일상에 깃든 ‘시적 힘’을 언어로 되살려낸다. 한편, 「식물도감」이라는 독특한 제목을 단 3부의 촌철살인과도 같은 짧은 시들은 자연현상을 관찰하는 예리한 감각과 섬세한 시선의 식물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귀신같은 예감”(염무웅, 추천사)으로 “허공의 물기가 한밤중 순식간에 나뭇가지에 맺혀 꽃을 피우는”(「무빙(霧氷)」)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자연의 섭리와 삶의 비의를 찾아내는 통찰력이 놀랍고 감탄스럽다.

안도현 시인은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문학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시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가 한국 서정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점에는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8년 만에 시집을 펴내면서 시인은 “대체로 무지몽매한 자일수록 시로 무엇을 말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인다”며 자신을 한껏 낮추면서 “갈수록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시인의 말)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시인은 시력 36년의 연륜을 거쳐 “자신을 녹이거나 오그려 겸손하게 내면을 다스”(「호미」)려왔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 쓸쓸한 시대에 시를 쓸 것이며, “펼친 꽃잎/접기 아까워” 작약이 “종일 작약작약 비를 맞”(「식물도감」)는 소리를 들려줄 것인가.
『연어』의 주인공 은빛연어가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듯 시인은 40년의 타향살이를 접고 고향 경북 예천으로 돌아왔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낙동강」의 무대이자 유년기의 젖줄과도 같았던 내성천 자락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시인은 연못을 들이고 돌담을 쌓고 꽃밭을 일군다. 그러나 시인에게 귀향은 “세상의 풍문에 귀를 닫고”(「연못을 들이다」) 한가로이 음풍농월의 삶에 안주하려는 정착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처럼 보인다. 시인은 “내 안에 당신을 들이”고 “당신의 숨소리를 받아 내 호흡으로 삼”(「연못을 들이다」)아 겸손한 마음으로 시의 텃밭을 일구며 “노루귀만큼만 물을 마시고/노루귀만큼만 똥을 싸고/노루귀만큼만 돈을 벌”(「식물도감」)어도 행복한 세상을 느릿느릿 가꾸어갈 것이다. 그리고 더욱 치열하게 시를 쓰고 또 쓸 것이다. ‘시인 안도현’과 ‘자연인 안도현’이 어우러진 새 시집 곳곳에는 시심을 다시 가다듬고 정성스레 쌓아올린 돌담 사이로 다사로운 햇살이 스며든다. 평화롭다. “중년을 지나며 바야흐로 귀향길에 오른 안도현 문학의 새 발걸음에 괄목(刮目)의 기대를 보낸다.”(염무웅, 추천사)
저자

안도현

1961년경상북도예천에서태어나원광대국문과와단국대대학원문예창작학과를졸업했다.1981년「매일신문」신춘문예와1984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시가당선되작품활동을시작했다.첫시집『서울로가는전봉준』을비롯해『모닥불』,『그대에게가고싶다』,『외롭고높고쓸쓸한』,『그리운여우』,『바닷가우체국』,『아무것도아닌것에대하여』,『너에게가려고강을만들었다』,『간절하게참...

목차

제1부_얼굴을뵌지오래되었다
그릇
수치에대하여
당하
연못을들이다
꽃밭의경계
편지
호미
배차적
안동
환한사무실
삼례에서전주까지
너머
시창작강의
고모
임홍교여사약전

제2부_핑계도없이와서이마에손을얹는
경행(經行)
귀띔
익산미륵사지서탑금제사리봉안기(益山彌勒寺址西塔金製舍利奉安記)
무빙(霧氷)
우수(雨水)
울진두붓집
묵란(墨蘭)
줄포만
줄포시외터미널
장마
진천에서
군인이집으로돌아간다면
자두나무가치마를벗었다
뒤척인다
키작은어른

제3부_작약작약비를맞네
식물도감

해설|김종훈
시인의말

출판사 서평

2013년절필을선언했던시인은2017년월간『시인동네』5월호에신작시「그릇」과「뒤척인다」를발표하며창작활동을재개했다.스스로내린금시령(禁詩令)을풀고4년만에발표한것인만큼이두편의시는자못의미심장하다(시인은당시“며칠동안뒤척이며시를생각하고시를공부하는마음으로”썼다고SNS에글을쓰기도했다).“그동안금이가있었는데나는멀쩡한것처럼행세”(「그릇」)했던허물을돌이켜보고,“비유마저덧없는,참담한광기의시절”(산문집『그런일』)을‘뒤척이고부스럭거리고구겨지며’울음같은침묵으로지낼수밖에없었던번민의시간을견뎌온막막한심정이절절하게와닿는다.
시인은이제“한가한비유의시절”을넘어“아직쓰지못한것들의목록”(「너머」)을적어나간다.그리고“이제좀고독해져도좋겠다는생각”(「시창작강의」)에이르러저‘너머’의세상에자신을풀어놓으며삶과시의경계에서내면을성찰하는시간을갖는다.시인은또약전이나약력의형식을빌려“폐허가온전한거처”(「안동」)였을하찮은존재들의가련한생애와소소한일상에깃든‘시적힘’을언어로되살려낸다.한편,「식물도감」이라는독특한제목을단3부의촌철살인과도같은짧은시들은자연현상을관찰하는예리한감각과섬세한시선의식물적상상력이돋보인다.“귀신같은예감”(염무웅,추천사)으로“허공의물기가한밤중순식간에나뭇가지에맺혀꽃을피우는”(「무빙(霧氷)」)경이로움을발견하고그안에서자연의섭리와삶의비의를찾아내는통찰력이놀랍고감탄스럽다.

안도현시인은1984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한이래문학성과대중성을두루갖춘시로독자들의사랑을받아왔다.그가한국서정시단을대표하는시인이라는점에는어느누구도이견이없을것이다.8년만에시집을펴내면서시인은“대체로무지몽매한자일수록시로무엇을말하겠다고팔을걷어붙인다”며자신을한껏낮추면서“갈수록내가시를쓰는사람이아닌것같다”(시인의말)고털어놓는다.그러나시인은시력36년의연륜을거쳐“자신을녹이거나오그려겸손하게내면을다스”(「호미」)려왔다.그가아니라면누가이쓸쓸한시대에시를쓸것이며,“펼친꽃잎/접기아까워”작약이“종일작약작약비를맞”(「식물도감」)는소리를들려줄것인가.
『연어』의주인공은빛연어가모천(母川)으로회귀하듯시인은40년의타향살이를접고고향경북예천으로돌아왔다.1981년대구매일신문신춘문예당선시「낙동강」의무대이자유년기의젖줄과도같았던내성천자락에새터전을마련했다.이곳에서시인은연못을들이고돌담을쌓고꽃밭을일군다.그러나시인에게귀향은“세상의풍문에귀를닫고”(「연못을들이다」)한가로이음풍농월의삶에안주하려는정착이아니라새로운시작처럼보인다.시인은“내안에당신을들이”고“당신의숨소리를받아내호흡으로삼”(「연못을들이다」)아겸손한마음으로시의텃밭을일구며“노루귀만큼만물을마시고/노루귀만큼만똥을싸고/노루귀만큼만돈을벌”(「식물도감」)어도행복한세상을느릿느릿가꾸어갈것이다.그리고더욱치열하게시를쓰고또쓸것이다.‘시인안도현’과‘자연인안도현’이어우러진새시집곳곳에는시심을다시가다듬고정성스레쌓아올린돌담사이로다사로운햇살이스며든다.평화롭다.“중년을지나며바야흐로귀향길에오른안도현문학의새발걸음에괄목(刮目)의기대를보낸다.”(염무웅,추천사)


-

책속으로

그릇에는자잘한빗금들이서로내통하듯뻗어있었다
빗금사이에는때가끼어있었다
빗금의때가그릇의내부를껴안고있었다

버릴수없는내허물이
나라는그릇이란걸알게되었다
그동안금이가있었는데나는멀쩡한것처럼행세했다
―「그릇」부분

길가에핀꽃을꺾지마라
꽃을꺾었거든손에서버리지마라
누가꽃을버렸다해도손가락질하지마라
―「귀띔」전문

허공의물기가한밤중순식간에나뭇가지에맺혀꽃을피우는현상이다
중심과변두리가떼어져있다가하나로밀착되는기이한연애의방식이다
엉겨붙었다는말은저속해서당신의온도에맞추려는지극한정신의끝이라고해두자
멋조롱박딱정벌레가무릎이시리다는기별을보내올것같다
상강(霜降)전이라도옥양목홑이불을시쳐보낼것이니그리알아라
―「무빙(霧氷)」전문

그리운게
없어서
노루귀꽃은앞니가
시려

바라는게
없어서
나는귓불이발갛게
달아올라

내소사뒷산에
핑계도없이
와서

이마에손을얹는
먼물소리
―「우수(雨水)」전문

사무치자
막막하게사무치자
매화꽃피는것처럼내리는눈같이

*
노루귀만큼만물을마시고
노루귀만큼만똥을싸고
노루귀만큼만돈을벌자

*
호박씨한알묻었다

나는대지의곳간을열기위해
가까스로땅에열쇠를꽂았다

*
잔디깎다가
방아깨비두어마리허리도잘랐다
그러고도나저녁밥잘먹었다

*
이름에매달릴거없다
알아도꽃이고몰라도꽃이다
알면아는대로
모르면모르는대로
―「식물도감」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