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속에서찰랑대던그물결은
말라서다어디로갔을까요”
삶의근원을향해흐르는생생한시적언어
연민과공생의감각을회복하는정감어린노랫소리
2004년창비신인시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한뒤고향의말과풍속을시적언어로되살려내며“우리시대백석시인의현현(顯現)”(천상병시문학상심사평)이라는평을받아온송진권시인의세번째시집『원근법배우는시간』이창비시선으로출간되었다.시인은이번시집에서소실점에가까운“태초의혼돈상태로돌아가배속핏덩이의목소리로”“원근법너머의시간”(김성규,추천사)을더듬어쓸쓸히잊혀가는고향마을의애틋한풍경과그안에서순박하게살아가는사람들의다채로운모습을세밀하게그려내어농익은서정의진경을펼쳐보인다.충청도사투리의능청스럽고구수한가락과삶의내밀함을담아낸정밀한비유가돋보이는단정한시편들이훈훈한감동을자아내는동시에,회색도시의음울한그늘속에서쫓기듯살아가는우리들가슴속에잔잔히스며들며그윽한향수를불러일으킨다.
시집에는‘못골’을비롯한‘오박골’‘도롱골’‘큰골’‘작은골’등질박한이름의마을과‘가린여울’‘쇠물재’‘가릅재’등정감어린지명이곳곳에등장한다.그곳에서아이들은“장대끝에우리를데려갈새가날아와앉”을거라고믿으며“장대를높이들고”나란히행진하고(「장대들고따라와」),사람과짐승이“애초에구분된것도없”이한데어울린다(「소나기지나간여름날」).인위와구별이끼어들고물질문명이우리삶의아주깊숙한데까지장악하기전,순전한믿음과위계없는공존이가능했던때의원형적풍경이찬란하게복원된다.농민의자식으로태어나줄곧고향에서땅과하늘을가까이두고지내온시인이가꾸어낸시적공간에서사람들은자연의질서를거스르지않고존재의도리를다하며살아간다.“아직강이란이름도못얻은/작은도랑이었던때”(「모교방문」)의순진무구한마음에얼비치던“뭔지모를어룽거림”(「첫걸음마」)을간직한시편들이거듭될수록일찍이우리마음에서희미해진순수가다시빛을발하고이제껏우리가서로“어떻게어울려살았는지”(「밑이위로갔던때」)곰곰이떠올려보게된다.
“아직은그렇게어두워지지않았습니다”
단절과소멸을감싸안는부드럽고푹한시
정겹고소박한사람살이의면면을두루살피는송진권의시선은이번시집에이르러더욱눈여겨볼만하다.“품삯두제대루못받구남의일만하구돌아다닌다고”동네사람들이손가락질해도“그냥웃기만하던”아버지(「음덕」)와먼지쌓인이발소에서팔십이넘도록겸손하고성실하게일해온할아버지이발사(「미복이용원」),“잘그락잘그락올뱅이끼리부딪는소릴내며”저승길도“동무해서”함께가셨을할머니들(「올뱅이잡으러가듯」)의사연은삶의곡진한내력을존중하는시인의진심을통과해더욱뜻깊고감동적으로다가온다.지난세월의곡절을마디마디쓰다듬으며흐르는송진권의시에서미련함은두터운정으로,낡음은깊이로,투박함은아름다움으로변화한다.경쟁과성장이득세한지금의시대에더이상유효하지않다고여겨지는가치들이그의시안에서는“송아지콧구멍에서나오던허연김”(「다시그저녁에대하여」)처럼따스하게살아숨쉰다.눈에띄지않는자리에서타인과함께묵묵히삶을일궈온이들의모습을통해살아가는일앞에서우리가갖추어야할순한자세가무엇인지보여주는시편들은조급하고불안한마음을나긋나긋하게달랜다.
한편시인은인간아닌생명들과도공들여눈을맞춘다.“소가되새김질하다말고나를볼때”자신도기꺼이소의눈동자에맺힌것을마주보고(「소와나」)분꽃을가만히들여다보며“그속에들어앉은이누구시냐고”묻는다(「누구여」).생명의기척에익숙히다가서는시인의눈길을따라가다보면모든존재안에다를것없이깃든신성함을발견할수있다.아울러인간과자연이나누는우정이마음뻐근해지는장면으로펼쳐지기도한다.당나귀처럼뛰쳐나가고싶지만얼마전남편을여읜할머니가외롭지않도록곁을지키는살구나무의진득한목소리(「살구나무당나귀」)는이제는무뎌진넒은의미의‘함께살이’의감각을깨우친다.
이렇듯고향과피붙이와이웃들과뭇존재의수수한나날을특유의익살과리듬을버무려노래하는시인은서로를향한연민과공생에의의지가다마르지않은시절로독자를데려간다.시인이그의본원인‘못골’의야트막한언덕위에엎드려“우리들이살았습니다”(「못골살때」)라고되뇌며“오는줄모르게왔다가/가는줄모르게가버리는것들”(「인연」)을줄기차게시로남기는것은무엇을간직하고기억해야하는지분별하지못하고발전과성장만을좇는작금을향한나름의저항이기도하다.그렇기에『원근법배우는시간』은우리의속도와방향성을다시금검토해보아야할지금이시기에진정귀한길잡이가되어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