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근법 배우는 시간 - 창비시선 483

원근법 배우는 시간 - 창비시선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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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우리 속에서 찰랑대던 그 물결은
말라서 다 어디로 갔을까요”

삶의 근원을 향해 흐르는 생생한 시적 언어
연민과 공생의 감각을 회복하는 정감 어린 노랫소리
2004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뒤 고향의 말과 풍속을 시적 언어로 되살려내며 “우리 시대 백석 시인의 현현(顯現)”(천상병시문학상 심사평)이라는 평을 받아온 송진권 시인의 세번째 시집 『원근법 배우는 시간』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소실점에 가까운 “태초의 혼돈 상태로 돌아가 배 속 핏덩이의 목소리로” “원근법 너머의 시간”(김성규, 추천사)을 더듬어 쓸쓸히 잊혀가는 고향 마을의 애틋한 풍경과 그 안에서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내어 농익은 서정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 충청도 사투리의 능청스럽고 구수한 가락과 삶의 내밀함을 담아낸 정밀한 비유가 돋보이는 단정한 시편들이 훈훈한 감동을 자아내는 동시에, 회색 도시의 음울한 그늘 속에서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들 가슴속에 잔잔히 스며들며 그윽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시집에는 ‘못골’을 비롯한 ‘오박골’ ‘도롱골’ ‘큰골’ ‘작은골’ 등 질박한 이름의 마을과 ‘가린여울’ ‘쇠물재’ ‘가릅재’ 등 정감 어린 지명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장대 끝에 우리를 데려갈 새가 날아와 앉”을 거라고 믿으며 “장대를 높이 들고” 나란히 행진하고(「장대 들고 따라와」), 사람과 짐승이 “애초에 구분된 것도 없”이 한데 어울린다(「소나기 지나간 여름날」). 인위와 구별이 끼어들고 물질문명이 우리 삶의 아주 깊숙한 데까지 장악하기 전, 순전한 믿음과 위계 없는 공존이 가능했던 때의 원형적 풍경이 찬란하게 복원된다.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줄곧 고향에서 땅과 하늘을 가까이 두고 지내온 시인이 가꾸어낸 시적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존재의 도리를 다하며 살아간다. “아직 강이란 이름도 못 얻은/작은 도랑이었던 때”(「모교 방문」)의 순진무구한 마음에 얼비치던 “뭔지 모를 어룽거림”(「첫걸음마」)을 간직한 시편들이 거듭될수록 일찍이 우리 마음에서 희미해진 순수가 다시 빛을 발하고 이제껏 우리가 서로 “어떻게 어울려 살았는지”(「밑이 위로 갔던 때」) 곰곰이 떠올려보게 된다.
저자

송진권

충북옥천에서태어나2004년창비신인시인상을받으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자라는돌』『거기그런사람이살았다고』,동시집『새그리는방법』『어떤것』이있다.천상병시문학상과고양행주문학상을받았다.

목차

제1부
장대들고따라와
가린여울사시는유병욱선생님께
모교방문
소나기지나간여름날
첫걸음마
봄비가오려할때
춘분(春分)
칸나꽃핀길을
너무많은어머니들
원근법배우는시간
검은목벌앞잡이새의노래
풍뎅이놀이
누가울어

제2부
다시그저녁에대하여
못골살때
가죽나무에서가죽나무로
무른살들
나의월인천강지곡
두부
음덕
후딩이네밭일구기
장인어른의필체
푹한날
은폐
올뱅이잡으러가듯
가릅재
노루
오박골골짝물의말씀

제3부
산수유다섯그루
심천
장날1
장날2
미복이용원
지프니에서
초강에지프니가있다
당재넘으며
살구나무당나귀
물방아도는내력
황간역
지프니봄밤에
새마을떡방앗간
인연

제4부
누구여
내가처음본아름다움
소와나
우려내야
밑이위로갔던때
잊어버리고
덕석이나입히면서
송홧가루날리는
야묘도추(野猫盜雛)
우렁이지나간더운논물에
소나기지나가시고
우리집담벼락아래돋은가죽나무는
공우탑
둥둥걷어붙이고
여름해는얼마나긴가

해설|이정현
시인의말

출판사 서평

“우리속에서찰랑대던그물결은
말라서다어디로갔을까요”

삶의근원을향해흐르는생생한시적언어
연민과공생의감각을회복하는정감어린노랫소리

2004년창비신인시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한뒤고향의말과풍속을시적언어로되살려내며“우리시대백석시인의현현(顯現)”(천상병시문학상심사평)이라는평을받아온송진권시인의세번째시집『원근법배우는시간』이창비시선으로출간되었다.시인은이번시집에서소실점에가까운“태초의혼돈상태로돌아가배속핏덩이의목소리로”“원근법너머의시간”(김성규,추천사)을더듬어쓸쓸히잊혀가는고향마을의애틋한풍경과그안에서순박하게살아가는사람들의다채로운모습을세밀하게그려내어농익은서정의진경을펼쳐보인다.충청도사투리의능청스럽고구수한가락과삶의내밀함을담아낸정밀한비유가돋보이는단정한시편들이훈훈한감동을자아내는동시에,회색도시의음울한그늘속에서쫓기듯살아가는우리들가슴속에잔잔히스며들며그윽한향수를불러일으킨다.
시집에는‘못골’을비롯한‘오박골’‘도롱골’‘큰골’‘작은골’등질박한이름의마을과‘가린여울’‘쇠물재’‘가릅재’등정감어린지명이곳곳에등장한다.그곳에서아이들은“장대끝에우리를데려갈새가날아와앉”을거라고믿으며“장대를높이들고”나란히행진하고(「장대들고따라와」),사람과짐승이“애초에구분된것도없”이한데어울린다(「소나기지나간여름날」).인위와구별이끼어들고물질문명이우리삶의아주깊숙한데까지장악하기전,순전한믿음과위계없는공존이가능했던때의원형적풍경이찬란하게복원된다.농민의자식으로태어나줄곧고향에서땅과하늘을가까이두고지내온시인이가꾸어낸시적공간에서사람들은자연의질서를거스르지않고존재의도리를다하며살아간다.“아직강이란이름도못얻은/작은도랑이었던때”(「모교방문」)의순진무구한마음에얼비치던“뭔지모를어룽거림”(「첫걸음마」)을간직한시편들이거듭될수록일찍이우리마음에서희미해진순수가다시빛을발하고이제껏우리가서로“어떻게어울려살았는지”(「밑이위로갔던때」)곰곰이떠올려보게된다.

“아직은그렇게어두워지지않았습니다”
단절과소멸을감싸안는부드럽고푹한시

정겹고소박한사람살이의면면을두루살피는송진권의시선은이번시집에이르러더욱눈여겨볼만하다.“품삯두제대루못받구남의일만하구돌아다닌다고”동네사람들이손가락질해도“그냥웃기만하던”아버지(「음덕」)와먼지쌓인이발소에서팔십이넘도록겸손하고성실하게일해온할아버지이발사(「미복이용원」),“잘그락잘그락올뱅이끼리부딪는소릴내며”저승길도“동무해서”함께가셨을할머니들(「올뱅이잡으러가듯」)의사연은삶의곡진한내력을존중하는시인의진심을통과해더욱뜻깊고감동적으로다가온다.지난세월의곡절을마디마디쓰다듬으며흐르는송진권의시에서미련함은두터운정으로,낡음은깊이로,투박함은아름다움으로변화한다.경쟁과성장이득세한지금의시대에더이상유효하지않다고여겨지는가치들이그의시안에서는“송아지콧구멍에서나오던허연김”(「다시그저녁에대하여」)처럼따스하게살아숨쉰다.눈에띄지않는자리에서타인과함께묵묵히삶을일궈온이들의모습을통해살아가는일앞에서우리가갖추어야할순한자세가무엇인지보여주는시편들은조급하고불안한마음을나긋나긋하게달랜다.
한편시인은인간아닌생명들과도공들여눈을맞춘다.“소가되새김질하다말고나를볼때”자신도기꺼이소의눈동자에맺힌것을마주보고(「소와나」)분꽃을가만히들여다보며“그속에들어앉은이누구시냐고”묻는다(「누구여」).생명의기척에익숙히다가서는시인의눈길을따라가다보면모든존재안에다를것없이깃든신성함을발견할수있다.아울러인간과자연이나누는우정이마음뻐근해지는장면으로펼쳐지기도한다.당나귀처럼뛰쳐나가고싶지만얼마전남편을여읜할머니가외롭지않도록곁을지키는살구나무의진득한목소리(「살구나무당나귀」)는이제는무뎌진넒은의미의‘함께살이’의감각을깨우친다.
이렇듯고향과피붙이와이웃들과뭇존재의수수한나날을특유의익살과리듬을버무려노래하는시인은서로를향한연민과공생에의의지가다마르지않은시절로독자를데려간다.시인이그의본원인‘못골’의야트막한언덕위에엎드려“우리들이살았습니다”(「못골살때」)라고되뇌며“오는줄모르게왔다가/가는줄모르게가버리는것들”(「인연」)을줄기차게시로남기는것은무엇을간직하고기억해야하는지분별하지못하고발전과성장만을좇는작금을향한나름의저항이기도하다.그렇기에『원근법배우는시간』은우리의속도와방향성을다시금검토해보아야할지금이시기에진정귀한길잡이가되어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