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광 - 창비시선 492

측광 - 창비시선 492

$10.00
Description
“사랑하는 이의 고단한 맨발을 겨우 한번 움켜보는 밤”

삶의 낮고 외진 자리에 깃들여
고독과 희망을 묵묵히 비추는 시편들
2013년 『실천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섬세한 관찰력과 개성적인 시적 사유로 주목받아온 채길우 시인의 두번째 시집 『측광』이 출간되었다.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과 심안을 부단히 벼려 다다른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삶의 고단한 풍경 속에 기꺼이 머물며 작고 미약한 존재들의 생활과 감정을 촘촘히 기록해나간다. 연민을 앞세우지 않은 담백한 시선은 일상의 소소한 장면을 은유적으로 풀어내어 일상 너머로 향하는 길을 열어젖히고, 범상한 매일에서 다른 차원의 정경을 발견해 낯선 감각을 선사한다. 아울러 시인은 우리가 서로를 돌보고 살피는 온기 어린 순간을 시로 펼쳐 보이며 우리의 하루하루가 지극히 소중한 것을 “지켜내는 일로 가득”하다는 사실 또한 일깨운다. 그저 살아내기 바쁜 우리의 마음을 멈춰 세워 타인과 세상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게 하는 시인의 시 쓰기는 “아름답고 숭고한 노력”(유병록, 추천사)으로 우리에게 묘한 감동을 전한다.

이 시집은 시 제목이 모두 간결한 한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차례를 펼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짧은 단어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언뜻 평범해 보이는 단어들이지만 시를 읽는 순간 예상 밖의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가령 ‘간병’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건 “창백한 꽃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 “화분을 살결에 펴 발라”주는 벌의 모습이다. 완전히 시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꽃과 좀처럼 그 곁을 떠나지 않는 벌이 ‘간병’이라는 단어와 닿을 때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수많은 두 존재의 모습이 그 위로 겹쳐진다. 이렇듯 시집의 차례를 이룬 마흔네개의 짤막한 단어들은 우리를 뜻밖의 장면으로 인도하고 삶의 구체적 면면과 연결한다. 하나의 광경 위로 다른 광경이 드리울 때까지, 지금 이곳에서 다른 저곳으로 나아갈 때까지 눈앞의 현실을 진득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어떻게 일상의 소재로부터 시가 탄생하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저자

채길우

2013년『실천문학』으로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매듭법』이있다.

목차


간병/보청기/첼로/껍질/도공/구두/일출/승진/비닐봉투/왼손/병원/목련/잎망울/측정/철봉/겨드랑이/소원/걸음마/산수국/은행/월경/수정/운명/신발/독서/해바라기/발아/움/숨/배추밭/별똥별/백발/치매/계부/용접/성냥/음악/분홍달/분재/자유/첫사랑/미역국/맥박/하품

시인의말

출판사 서평

“빛나지않는다고해서없는것은아닌깜빡임”
깊고어두운현실에서길어올린작고여린빛한조각

채길우의시는고독과슬픔,병과죽음같은삶의어둔자리를짚어나간다.시인이“기약없는천국보다낮은자리”에만연한“적막과어둠과공포”(「구두」)에주목하는이유는우리가그런그늘과같은시간을시야의사각지대에접어두기때문일것이다.불편하고두려워서많은이들이멀리하는이야기에시인은바짝다가서마치현미경으로들여다보듯미세한기척까지도놓치지않고묘사한다.그래서언뜻쓸쓸하고음울한흑백사진같기도한그의시에서는“스스로내쉬는호흡에도온몸이흔들리”는육체의“구겨진피부”(「비닐봉투」)에깊게박힌잔주름까지자세히보이고“스무살이지나도록말을배우지못”한아이의입에“새로고이는침줄기”(「숨」)도선명하게빛난다.피할수없는고통으로가득한현실에서도어떻게든스스로“살아있음을확인”(「측정」)하며살아가는가녀린존재들의삶에진심으로감응하는시인의언어는별다른수사나감정을내세우지않음에도더욱애틋하게느껴진다.

외롭고허름한삶속에서흔들리는존재들을담담히들여다보는시들을하나씩읽어나가다보면우리가통과하고있는지금의세상이“제정신으로는좀처럼믿을수없는/뼈아픈허구”(시인의말)일지도모른다고의심하게된다.하지만무언가를참고견디는것처럼꽉오므려져있던주먹이풀어져“푸르고자그마한조약돌/하나”(「잎망울」)를보여주듯시인의집요한응시가결국에가닿는곳은희미하게피어오르는사랑과희망의기미라는걸잊어선안된다.그의시속에서누군가는오직“인간으로서살아가기위하여”(「구두」)따스한손길로다른이의“찢기고바스러진몸을껴안”(「소원」)고“파이고금이간자국을/닦아주어야”(「도공」)겠다고생각한다.이처럼“더깊은아픔과수고로움에도불구하고”(「산수국」)기어이타인을위하는장면앞에서우리는“아무도없는/현관이저절로점등되는”(「구두」)것처럼잠시반짝켜지는희망을실감한다.현실의무게에조금은일그러지고구겨지더라도인간답게살아가려고묵묵히노력하는사람들이있는한채길우의시는언제나그곳에가장먼저도착해가장오래머물며그들의고독과희망을계속해서기록해나갈것이다.

시인의말

타인들을,심지어자신조차완벽히
속일수있는가장좋은방법은
다만진실을실토하는것이다.

너무나도강렬하고사무치도록충격적이어서
제정신으로는좀처럼믿을수없는
뼈아픈허구와구별되지않기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말,역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