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사람과의 통화 - 창비시선 509

잠든 사람과의 통화 - 창비시선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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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다 뺏기지 않은 마음에서 시작된 사랑이 덤불을 이룰 때”
모호한 세상을 끈질기게 탐색하고 변별하는 언어적 성취
경계의 기분을 응시하는 세세한 사랑의 관찰기
“후무사에서 만나요.
우리는 고만고만한 손을 가지고 있어 서로 알아보기 쉬울 거예요.“

밀도 높은 언어를 구사하며 자신만의 시세계를 쌓아온 김민지의 첫 시집 『잠든 사람과의 통화』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2021년 계간 『파란』 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시어와 행간을 통해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고 존재들 사이의 간극을 메워가는 자세는 이번 시집에서 한층 더 성숙해졌다. 특유의 호흡과 개성 넘치는 시어 덕분에 리듬을 타듯 읽히면서도, 독서를 마친 뒤에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뭉근하게 싹트는 것도 바로 이 덕분이다. “‘마음 단어 수집가’와 ‘만물박사’를 자처하며 언어의 활력으로 세상 만물을 정돈”(김수이, 해설)해온 시인은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쓸쓸하게 세상의 풍경을 부려놓는다. 그리고 시선을 붙드는 그 모든 풍경에는 세계와 미래에 대한 “가능성의 냄새”(해설)가 서려 있다.
이번 시집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독특한 소재들이다. 시인은 ‘헤드룸, top note, 유형성숙, 콜로라마’ 등을 소개하며, 이들에 대한 고찰이 곧 세계에 대한 심층적인 탐색으로 이어지게끔 인도한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단어 하나에 오래 머물게” 되고, “무심코 지나쳤던 모든 단어들에 대한 의심이 불쑥 피어”(강성은, 추천사)난다. 김민지의 시들에는 유독 공간감이 선연한데, 이번 시집에서 공간은 주로 ‘먼지’의 떠다님을 통해 감각된다. 「마티에르」, 「연면적」, 「dayglow」, 「구석을 내밀면」 등의 시 속에서 보얗게 피어오르는 먼지는 있는지도 모르다가 가만히 바라볼 때에야 눈에 걸리지만, 움직이는 순간 어지럽게 일어나고 빛을 받으면 잗다랗게 반짝이는 존재들이다. 시인은 그 개별적이면서도 뭉뚱그려 일컬어지는 먼지들에 눈길을 던진다.
시집에서 공간이 진정 비어 있는 장소가 아니듯 시인은 행과 행 사이의 의미적 간격, 나아가 존재들끼리의 본질적인 차이에 주목한다. 첫 시 「헤드룸」에서 화자는 “무엇 하나 정확히 떨어지지 않아/세상은//무수한 활개들로 중역되는/우회”라며 세상이라는 것이 결코 하나의 단면으로만 정의될 수 없음을 포착한다. 또 「어떤 기쁨은」에서 지적되듯, 혐오가 버젓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슬픔을 배척하는 기쁨은 슬픔의 공간을 박탈한다. 이러한 관찰의 결과로 「콜로라마」는 같은 이름으로 묶이는 색깔도 실은 “하나가 아니”라고 말하며, “같은 걸 받는다고 공평해지지 않”는 세상을 진술한다. 오히려 세계는 먼지와도 같은 개별 존재들이 느끼는 주관적인 기분들로 얼마든지 재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하나의 사안에서 파생되는 모든 이면을 알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기꺼이 “무겁고 부끄러워지는 일을 반복”(「콜로라마」)하는 것이 자신의 글쓰기가 되리라고 다짐한다.
시인은 서문에서 “따라 오릴 수 있는 점선과/비뚤거리는 목소리로/순면 같은 시절을”이라고 말한다. 대기중에 떠다니던 희부연 먼지가 가라앉아 투명한 공기만 남듯, 김민지는 이 고요한 소란을 차분하게 응시하며 경계의 영역에 자리 잡은 감정의 세목을 읊는다.
저자

김민지

저자:김민지
김민지(金旼指)시인은2021년계간<파란>신인상을받으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산문집<시끄러운건인간들뿐><마음단어수집>이있다.창작동인‘관람:觀覽’으로활동중이다.

목차

제1부바닥마찰하기
헤드룸
홀가먼트
대기실
마티에르
연면적
연면적
연면적
연면적
연면적
자판기우유를생각해
염소가열리는나무

제2부겨울들숨여름날숨
하나와마나
겨울깃
topnote
꿈의꿈치들
일장일단일장일이
외따로이
섬포도
향미증진제
후무사자두
구근류
불릿의시
회문(回文)공작소
구분짓기
0의분포
유형성숙

제3부어둠과환복
dayglow
포트홀
아몬과마몬
그나마심포니
이달의토핑
가만나만다만
어떤기쁨은
실키
웃옷
깍두기공책
생육조사
콜로라마
테라포밍

제4부잠든사람과의통화
에스키스
타공
일말
너의전제는이렇다
너의전체는이렇다
너의천체는이렇다
동굴영원
구석을내밀면
루미노그램
디디스커스
우양산
밀양
스톰체이서
나의단축어생성
시간을재는시간
인부의말

해설|김수이
시인의말

출판사 서평

“저는제게남은이느낌을살려야해요.
그래서눈뜨자마자편지를씁니다.“
꿈을가로질러현실에가닿는목소리
상대의곤한숨소리를들으며통화를연결해두는밤

『잠든사람과의통화』에서또하나의중요한시적공간은꿈의세계이다.제목에서부터알수있듯어둠,잠,꿈을주요소재로삼는시들이연이어등장한다.보통의상황에서꿈의세계는현실에서이루지못한소망을투영하거나현실의불안을반영하며,무엇보다고정된시공간의장면이나상태를그려낸다.그러나이시집에서꿈이란곧현실세계와다름없이삶이진행되는현장이며,“꿈같은광경도/현실에서만볼수있다”(「염소가열리는나무」).즉현실세계와꿈의세계는쌍방으로영향을미치고,꿈과현실사이의위계와경계를허묾으로써하나가되는두공간은같은방향을향하여나아간다.그방향이란꿈만같던일을현실로가져오고,빈번하게찾아오는슬픈환상을“생활이물고온말들”(「실키」)과“현실을부둥켜안는목소리”(「외따로이」)로보듬을수있게되는지향이다.그럴때현실의힘은환상을거뜬히넘어선다.

화자가꿈에서겪은일은현실의기분에영향을미치고,동시에그가꿈에서‘체험’하는일들은현실의이야기로부터파생되는실제사건으로인식된다.화자는꿈속에서자신이추구하는상을일상적인장면에포개어보고,“모든전면전에는기억할만한어둠이있음”(「회문(回文)공작소」)을실감하며밤을자각한다.「꿈의꿈치들」에서는환상과현실의이음매에위치하면서,동시에꿈을꾸는데에서투른이른바‘꿈치’들을나열한다.

홀로밤을견디는일은시인에게고통스러운노동과도같은일일수있다.그럼에도김민지는“흩어지던꿈속”에서도“어떤밤의밑면”(「구석을내밀면」)을염두에둔채어둠속에서올곧게빛을바라본다.어떠한가능성을한없이기다려온사람특유의쓸쓸한,그러나끈질기게차분한감각이다.그리고「후무사자두」에서는자두의일종인‘후무사’로부터‘후무사’라는이름을가진꿈속의절을상상하기에이른다.“‘후무사’는물론“절이아니”지만”(해설),꿈속에서어떠한장소로해석될때우리는서로만나하트를닮은이상큼하고도끈적한사랑이라는감정을주고받을수있다.현실에서는불가능한것처럼보이는“네가너를안아주”는일이가능해진바로그곳에서,우리는“사람”으로서태어나“사랑”을거듭할수있게된다(「후무사자두」).

다시말해,이시집은꿈을꾸듯현실을살아내는사람들에게논리적인이해보다직관적인감동을선사한다.시인은계속해서“잠든사람”의꿈을현실에주사(走査)하고(「인부의말」),실제로는먼지낀잡음만을들을수있을텐데도상대와의통화를쉽사리끊어내지않는다.그리하여잠들지못한자신의편안함보다잠이든상대의평온을더욱바라는마음으로시를쓴다.이서투른마음을주고받은결과로서사랑은자라고,“덤불을이”루면서손을잡고,긴터널을통과하여마침내땅을뚫고솟아나오는“지구의기분”을느낄수있게한다(「깍두기공책」).사람이기에끊임없이엄습하는“자신없음”(「인부의말」)속에서도여전히속절없는사랑의가능성을건네는방향,우리는어쩌면이것을‘김민지식희망’이라고이름붙일수도있을것이다.모든세세한사랑이가능할것만같은기분을,그러한예감을선사하는시집이이미우리앞에도착해있다.

시인의말

여기놓인기색들은
숙박업을위해마련한
같은색의수건들같다

누가
누구의것인지모르게
새것처럼

이미많은올이움직였지만
개수는꼭맞춰두었다

2024년9월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