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의 멜랑콜리 (이기성 시집)

감자의 멜랑콜리 (이기성 시집)

$12.00
Description
“세상은 살짝 구겨진 은박지처럼 선명하고 눈이 부시다”

흐려진 존재들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다정한 숨결
부서지고 춤추고 사랑하는 영혼들을 위한 희망의 노래
슬픔으로 얼룩진 삶의 장면들을 감각적 이미지와 깊이 있는 감성의 언어로 묘사해온 현대문학상 수상 시인 이기성의 『감자의 멜랑콜리』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폭력과 광기가 뒤섞인 시대의 그늘진 이면을 꿰뚫어 보며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찰하고 시대의 불행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깊은 사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분노와 슬픔을 간직하면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다정한 결기와 기품”(김경후, 추천사)이 깃든 견결한 시편들이 묵직한 울림을 준다. 현실의 고통에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 이를 기억하고 새기려는 단단한 결의가 드러나는 시편들에서 시인이 우리의 삶과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해왔는지를 엿볼 수 있다. 예기치 못한 비극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한복판에서도 뜨거운 마음으로 타인의 슬픔을 헤아릴 때 비로소 피어나는 희망을 아는 그의 시적 화자들은 이번 시집에서도 그 힘을 발휘한다.
저자

이기성

저자:이기성
1998년『문학과사회』로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불쑥내민손』『타일의모든것』『채식주의자의식탁』『사라진재의아이』『동물의자서전』,평론집『우리,유쾌한사전꾼들』『백지위의손』등이있다.현대문학상,형평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제1부

종이

기도

종이
불행
상자
종이
창고
저수지
눈송이
불행

제2부
재단사의노래
흑백사진
사탕공장
고기
수치
싱크홀
눈의아이
재단사의노래
눈의아이
흑백사진
식인의세계
구두
불행
식탁
애도라는외투

제3부
거미여인
시인
한시에남아있는것
시인의죽음
종이
낭독
천사에게
단식
한사람
공회전
사탕
개를모르는
여름의불행

제4부
감자의멜랑콜리
창고
전향
망각
아들들
우리모두의애도
편지

전향
들판의상자속에는
청춘
불행
작별

해설|서영인
시인의말

출판사 서평

“어떤노래는
하얀실처럼끝없이흐르고“

이기성의시는불행한시대와“새의발가락처럼검게오그라든영혼”(「창고」)을위한“희고검은애도의노래”(추천사)이자“희미한근대의냄새를환기”하는“검게탄입술의노래”(「흑백사진」)이다.이는망가진삶을직시하고스스로를성찰하여이윽고투명한감각으로발화하는목소리로나타난다.안온한풍경의이면에주목해온시인은이번시집에서도도시의아픈과거를발굴하는데주저함이없다.그것은단지기억의환기가아니다.세상에는우리가결코잊을수없고잊어서도안될“이런오래된이야기가있다는걸/너에게말해주고싶어서”시인은간절한심정으로쓴다,“마지막남은손이사라지기전에”(「편지」).망각의기억속에서지난날의슬픔과상처를끄집어내어삶의비애와불의한시대의실상을온전하게기록하고자한다.
시인은꿈인듯현실인듯“검은외투를입은”한청년이“검은법전을끼고평화시장쪽으로걸어가는”(「눈의아이」)모습을본다.“검은밤에잠긴흐릿한얼굴”들을기억하고“입안가득한/재의맛”(「재단사의노래」)을감각하는한,전태일은단지역사적기억의대상이아니라지금-여기의비참한현실을상징하는존재가된다.시인이불러내는전태일은비단‘1970년의전태일’일뿐아니라“커다란접시를들고빵을기다리는사람들”(「빵」),“빌딩옥상망루의농성자”(「싱크홀」),“맨발로사라진아이를찾아서”울며헤매는“도청앞누더기를입은늙은여인”(「구두」)같은또다른‘전태일들’이다.그러나지난날의고통과상처를망각한채“어떤슬픔도없이”그저”조용히먹는일에열중”(「식인의세계」)하는인간의모습에수치를느끼며시인은“어떻게,그럴수있습니까,인간이?”(「고기」)울부짖는다.그리하여시인은앞장서고통의한복판을지나는영혼들을품기위해시를쓴다.“시간의앞면과뒷면을마주보게하고어제의얼굴과햇빛과오늘의이야기를이어서”“애도라는외투”(「애도라는외투」)를짓는다.

흩어진삶의조각을한땀한땀연결하는바늘이되어

상실과망각의삶에대한질문을던지며시인은오늘의현실에드리워진잿빛“불행의얼굴”(「불행」)을냉철히직시한다.먼지처럼쓸쓸히스러져간존재들을기억하고애도하기위해“아직아무에게도말하지않은그무언가를오래생각”(「창고」)하고,고통의세월이흘러도남아있는것을외면하지않는다.애도는늘불완전하고“애도의매끈한표면아래남아있는울퉁불퉁한것들을더의식할수밖에”(서영인,해설)없지만그거친얼굴아래에서빛나고있는영혼의순수한본질을끝까지기억하는사람이되기로한다.
아직은“우리에게무언가남아있다”(「애도라는외투」)는가냘픈희망을다시새기는것은시인이할수있는일이다.시인은불현듯“시인의죽음”과“시인이없는세상”(「시인의죽음」)”을말하지만불행한시대일수록“회색먼지와재로뒤덮인/오래된종이”(「거미여인」)에시를적는시인의존재는선명하게반짝인다.“손때묻고더러운빈종이,그런시를들고나는영원히한시를떠나지못한다”(「한시에남아있는것」)고고백하는사람이있는한,“우리에겐아직끝나지않은노래가있다.”(시인의말)그노래가세상의“어두운골목저편”에서울려퍼질때,선하고아름다운“시인의영혼처럼환한빛”(「천사에게」)이어둠속에서붉게타오를것이다.

시인의말

내일아침눈을뜨면
어떤세상이되어있을지
알수없는날들이계속되었다.

어둠속광장의작은불빛과언어들이반짝이는것을보며
오래된노래들을떠올린다.

먼훗날이계절의언어들
어떤목소리로되살아올지알수는없지만

우리에겐아직끝나지않은노래가있다.

2025년3월
이기성

책속에서

백년후에너는사라지겠지.
사람들은먼지라고말하지만어쩌면너는먼지도아니겠지.
백년후에는종이가남고글자는사라지겠지.
사라진너는이름도없겠지.백년후에는풀과벌레들이있겠지.
벌레는글자를갉아먹고검은글자를닮은풀들은여전히풀처럼있겠지.
그리고모르는네가있겠지.풀처럼네가없는노래를영영부르겠지.
―「너」전문

앙상한팔과다리가다닳아서
한줌의재가남았을때

흰실에칭칭감긴채
검은밤에잠긴흐릿한얼굴

(…)

입안가득한
재의맛을알지못한채

너는밤새도록실을잣고……

어떤노래는
하얀실처럼끝없이흐르고

그것은네가지어놓은
잿빛수의처럼빛난다
―「재단사의노래」부분

그겨울에우린무엇을하고있었지?너의손을잡고걷는다.비탈길천천히스며드는저녁의냄새.골목은어둡고부서진연탄재가등아래낡은구두눈송이같은여공의기침소리.누군가방문을요란하게두드리면세계가빈상자속눈동자처럼흔들린다.천장에번져가는검은얼룩을보며우리는다가올장마를걱정하지만그겨울은영영끝나지않을것같다.펄럭이는빈방의커튼,살갗에돋는소름과누군가의텅빈입술.나중에우리는헤어지게되지만아직은손을꼭잡고1970년의겨울속에있다.
―「흑백사진」전문

너는무언가를쪼개고꿰매고있다밤새무언가를쓰기도한다
커다란외투를만들려면하룻밤이필요해죽은이의혀를닦아내고삼베옷을입히듯이
조각난것을꿰매고이어붙일시간이
시간의앞면과뒷면을마주보게하고어제의얼굴과햇빛과오늘의이야기를이어서
커다란외투를만들면
밤새눈물이다마르고우리는다른존재가된다는듯이

그커다란외투속에너를숨길수도있다
누군가벗어놓고떠난신발처럼매끈한피부처럼
고약한냄새가나는것도외투에넣고
이건우리에게무언가남아있다는뜻이지

이런생각은언제까지나너를이곳에머무르게한다
너의외투는여전히아름답다그리고우리에겐그것이필요하다
―「애도라는외투」전문

항상남아있는것이있다네게종이를한장건네고아무것도쓰지못했음을깨닫고돌아보지만너는이미인파속으로사라진후이고

정작쓰지못한마음은주머니속에서쓰디쓴돌멩이처럼굴러다닐때시계는정지하고남아있는것은박동하지않는다

눈이녹은뒤에도남아있는것파도가사라진뒤에도남은것네가떠난뒤에도남은것어둑한너의눈동자처럼아직은있는것

손때묻고더러운빈종이,그런시를들고나는영원히한시를떠나지못한다
―「한시에남아있는것」전문

잠시눈을감는다
이건기도하는자세와같구나

하지만내겐손이없다

슬픔과기쁨의날개를달고
뒤뚱거리는늙은새처럼

나는울퉁불퉁한얼굴로
눈을감고

그건어쩌면기도하는자세와같고
아무려나나에겐손이없으니

어느날꼭맞잡았던두개의손
검게벌어진시간의틈새로흘러나간건

기쁨의젖은입술인가
희게굳은너의슬픔인가

죽기전에
눈을꼭감은채

나는더둥글어지고
조금더밤에가까워졌다
―「감자의멜랑콜리」전문

작별인사를하지말자,눈송이야
이제사랑은끝나고
작은상자속에넣어둔망각이
먼지에덮인채검게굳고있다
어느날그것을한점떼어입에넣으면,눈송이야
그건오래된음악,흑백사진,낡은종이위에쓴시
천천히사라지는너의맨발
이제죽음의새하얀혓바닥위에서
희게녹아버리자,눈송이야
―「작별」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