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팔휘 토끼 톡휘 다리 달휘 - 창비시선 538

파리 팔휘 토끼 톡휘 다리 달휘 - 창비시선 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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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영승

저자:김영승
1958년인천에서태어나성균관대학교철학과를졸업했다.1986년《세계의문학》가을호에「반성?序」외3편의시를발표하며등단했다.시집으로『반성』,『車에실려가는車』,『취객의꿈』,『아름다운폐인』,『몸하나의사랑』,『권태』,『무소유보다도찬란한극빈』,『화창』,에세이『오늘하루의죽음』등이있다.현대시작품상,불교문예작품상을수상했다.

목차

비가오니
골반
저항
마비여,마비여
더러운손수건
덩굴의겨울
내게다가오는비둘기
흐린날살구꽃
너무슬프게는
눈속에묻힌모과
니퍼로
단맛
땅콩을삶으며
만발
모든곡물튀겨드림
비닐
강풍에쓰레기
비야,화이팅!
가위
굵은팔
귀신과최면
그림자를보고알다
단사호장
내모종삽
몽키
뱀처럼
민들레와제비꽃
병균
봄싸라기눈
손조심
수세미를기다리며
스프링
자색(紫色)벚꽃아래
연일강풍

오래간만이다522번
웃을수있다니
이봄날
자라목자르기
재미있는이야기
짜증
추운날벤치
팔휘
퓨전설날
헛발질
흐를것은다흘러야하리
옛날이야기
흐린날새벽
흐흐흐
피자를기다리며
밤에버릴것
배추벌레는배추위로
삐삐
만전춘
색연필쓰냐?
체포령
이불을말리며음식물쓰레기를버리며
정성
호우와반바지

산문|반가사유상과내가사랑하는것들과오니기리와회전낙법과피겨스케이팅과바람과별과시와꽃

시인의말

출판사 서평

팔휘와톡휘와달휘
처음들어본소리로다시태어나는세계

시집의독특한제목은대상을향한애정어린명명법에서비롯되었다.시인은어릴적부터가장흔하게보아온만만한존재‘파리’를발음상보석같다는이유로‘팔휘’라부른다.토끼는‘톡휘’,다리는‘달휘’가된다.얼핏장난처럼들리는이기묘한명명은,실은대상에덧씌워진관념과편견의층을걷어내고존재를온전히다시만나려는치열한시적고투다.시인은“파리는이제나에의해서는/팔휘로/새로태어났다”라고선언하며,“그명명이/신생이며/영생”이라고말한다(「팔휘」).
나아가이신선한비약은결코관념으로흩어지지않는다.시인의상상력은메추리알장조림속“간장한종지”(「단사호장」)나욕실을고치는“몽키(스패너)”,“더러운손수건”같은누추한생활의자리에서출발한다.낡은손수건을“목련”(「더러운손수건」)으로여기고,수도를고치는몽키에서우주론까지밀고나가는이놀라운힘은,가장세속적인사물에서가장순정한진실을길어올리는김영승시의고유한마력이다.

“웃을수있다니좋은일아닌가?”
비참과해학,죽음과생의찬가가한몸이되는순간들

이번시집이더욱강렬한울림을주는것은,시인이겪고있는육체적고통과노화의감각이시편곳곳에스며있기때문이다.시력저하로굵은사인펜으로메모를하고,참외를깎다다친손가락을조심스레들어보이며,왼쪽귀에서맑은물이두달째흘러도“흐를것은다흘러야멎으리”(「흐를것은다흘러야하리」)라며덤덤하게읊조린다.그러나시인은고통에짓눌리는대신이를정면으로응시하며특유의해학으로비틀어낸다.“가슴이쫙뽀개져새빨간/초대형가오리처럼펄럭펄럭/유영(游泳)하는것”이자신의삶이라면서도,사람들은자신을볼때마다“진지잡쉈슈?”(「흐흐흐」)만한다며삶의비극성을유쾌한농담으로뒤집는다.심지어“가장재미있는이야기는나의죽음”(「재미있는이야기」)이라며껄껄웃어넘긴다.“웃을수있다니/좋은일아닌가?”(「웃을수있다니」)라는구절처럼,비참을온전히통과한자만이낼수있는이숭고한웃음은독자들에게깊은카타르시스를선사한다.
시집말미에수록된산문은이번시집을이해하는중요한입구다.시인은고등학교시절의시적열정과필사,천상병시인에대한기억,산책과일상의파편들을엮어내며“내가사랑하는것들이나이리라.내가사랑하는것들의총체가나이리라”라고벅찬고백을털어놓는다.파리와토끼,비닐과모종삽,강풍과마을버스,그리고중학교때부터아무도몰래써온시까지,그가차마버리지못하고끝내다시불러본모든것들이모여‘김영승’이라는하나의시가되었다.

자신의삶과시를일치시키며끝끝내대지에몸을담그는숭고한영혼의기록.강풍이불어도꽃잎을그대로붙인채피어있는벚꽃처럼,절망속에서도경이로운웃음을터뜨리는이단단한시편들은독자들의팍팍한삶속에눈부신보석‘팔휘’로오래도록반짝일것이다.파리팔휘,토끼톡휘,다리달휘.이희한한발음끝에서우리는다시알게된다.시는아직도세계를새로태어나게할수있다는것을.

책속에서

참부르기좋은
이름이다발음

마비여,마비여

그러나대답이없어
더좋은이름이다
그발음이

가끔은왼손이쥐가나는데
약간은마비가되기도한다

이건쓰르라미소린가
걔도무슨발음을하는데
생의저극(極)을가는소리이다
---「마비여,마비여」중에서

손수건을왜매일새걸들고나가냐
나는한일주일들고다녀도괜찮다

나는그정도로더러운나의손수건을
그냥목련같다고여긴다
아직피지는않았지만

나는내손수건을빨랫비누로직접손빨래를해서
넌다
그러면목련이다

곧꽃이피면
꽃도
목련의손수건이다
---「더러운손수건전문」중에서

너무슬프게는하지마세요

너무슬프게는하지마세요
큰호박꽃
큰호박잎밑
큰호박꽃
호박은달리어
굴러가네
오이꽃도노랗게
수세미는아직
깜깜한새벽
큰호박잎
마줄기는굵은뱀처럼
나팔꽃은
넝쿨이잘려있네
너무슬프게는하지마세요
---「너무슬프게는」중에서

기적일이유가전혀없다
책상에놓인가위건드렸더니하염없이돌아간다
가위의접점축이되어하염없이빙글빙글
가위는그냥종이자르는문방용가위
그쇠구슬반구(半球)같은돌기(突起)가
축이되어
접점은축이되어
좌우대칭과
균형을이루어하염없이

내육체의정신의
접점이여
---「가위」중에서

그렇게기다리므로
별이멀지않다

아직고공에매달린수세미는
얼어터져씨를쏟았지만

얼어붙은돌멩이밑에숨어
소곤거리고있다

곧흰눈이덮이면
저검은하늘도
수세미를기다릴것이다

기다리다보면
먼데가없다
---「수세미를기다리며」중에서

나이세상에태어나
재미있는이야기를들었으니
여한은없다

그리고그런재미있는이야기를들었으므로
그모든비참한이야기도
맑은시냇물처럼흐른다
맑은눈물처럼

가장재미있는이야기는나의죽음인데
그이야기를들을수없으므로
미리듣는다

내가죽었다니
얼마나재미있는이야기인가
재미있는이야기는
끝이없다
---「재미있는이야기」중에서

이신음(呻吟)이
웃음이냐울음이냐바람
새는것이냐흐흐흐

그냥흐흐흐
그러고만다

가슴이뽀개지는아픔
그것이나의생의찬가(讚歌)다가슴이
뽀개져쫙

갈라지는아픔가슴이
수직의미소로쫙갈라져
오물거리는이

아픔
---「흐흐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