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고흩어진마음들이서로의곁에닿을때
고통의폐허에서피어나는조용한연대의언어
이번시집에서가장먼저눈에띄는것은‘나’와‘나아닌것’의경계가흐려지는장면들이다.시인은‘나’가타자와새로운관계를맺을때마다서로의자리와몸짓이변화하는유연한움직임을포착한다.“그런데우리는언제부터친구인걸까”라는물음을통해단순히관계를묻는것을넘어두존재가서로의일부가되는과정을보여주고,마침내“문밖에는내가서있어/나는드디어친구처럼/나를활짝끌어안았다”(「친구의집」)라는장면에서‘나’와타자의구분은사라진다.또한“벽에나를던지면대답대신돌아온공이벽을퉤뱉는다”(「벽과공과나」)라는기묘한장면을통해‘나’와세계가부딪치고자리를바꾸는동안존재가달라지는과정을보여주기도한다.이처럼김경인의시에서‘나’는세계의수많은기억을계승하는존재로서어느한자리에고정되어있지않으며,‘나’와타자는차이를지닌채함께존재하면서서로고통을나누어갖는연대적관계의‘우리’로거듭난다.
연대하는‘우리’가되기에앞서시인은먼저비극적현실속에서고통받는존재들을깊은연민의눈길로살핀다.“노동자들이조각조각부서져사라졌다해도(…)다행히도내나라의천연자원은슬픔이어서가장가난한집조차도슬픔만은넘친다네”(「웨하스생각」)라고나지막이읊조리는대목이나,미얀마민주화운동의비극적현장에서“곤봉에맞아형체없이으깨진살같은것”(「토마토」)을떠올리는순간은사회적고통에대한예민한감각을보여준다.홀로외롭게살아가며“눈코입없이반죽이된여자”,“유리창처럼깨져풍경속에박힌여자”(「사은품천사」)의삶을바라보며“여자는잘있습니다/가장자리가오그라든채/벽지에스며들어”(「여자는잘있습니다」)라고묘사할때,시인의언어는가난하고소외된자들의차가운얼굴을감싸주는“고통의깃털을산채로뽑아만든/가볍고포근한이불”(「청혼」)이된다.
중요한점은시인이타인의삶을이해한다고섣불리말하지않는다는점이다.오히려“나는그어떤슬픔에도다다르지못했네”(「웨하스생각」)라는고백을통해타인의고통에다가가는일이쉽지않음을드러낸다.시인은타인의슬픔과아픔을관망하듯함부로말하는일을경계하면서“세상의모든비유가새로쓰이는순간을/침묵속에서지켜”(「우리가아이를잃는다면」)본다.“삼킨말이쌓인식탁모서리”,“응답없는전화기에얕게쌓인먼지”,“돌아오지못한짝짝이신발”(「음각박물관」)처럼잊힌존재,구석진자리를하나하나꺼내어보여주는것도같은맥락이다.타인을향해나아가는것은슬픔을대신말하는것이아니라곁에오래머물며자신의맨살을드러내는일이다.시인은타인의고통과슬픔을어설프게재단하는대신자신의취약한안쪽을내놓고“우리를꺼내어/토막난진실을잇는”(「우리가아이를잃는다면」)쪽으로나아간다.
“얼어붙고서야선명해지는삶의무늬들”
비산하는마음을다잡으며‘우리’로잇다
“저멀리아름답고/가까이서보면/참혹뿐인”(「서정」)현실의이면을직시하는김경인의시에서타인의고통을바라보는일은언제나자신의상처와맞닿아있다.“부서진다음에도/부서질것이그만큼/남아있”(「질문들」)는보통의비극속에서내뱉는“나는살아있다/나는살아있을것이다/그러니아무도용서를빌지않았으면좋겠다”(「짙고푸른별무늬커튼」)라는시인의다짐은이번시집에서가장빛나는단단한문장이다.이는단순한희망의선언이라기보다,아직오지않은삶을향해“새로돋아/아름다운귀”(「고요식물원」)를열어두는마음으로계속살아가겠다는조용한의지의선언이다.‘지금-여기’의삶을비추며,“끝내생활하는사람의편”(이원,추천사)에서있는김경인의시는언제까지고우리곁에머물며마음의응달을밝힐빛의언어로오래도록읽힐것이다.
추천사
김경인의이번시집은등고선과닮았다.인간이만든규칙사물구조를깨트리지도벗어나지도않으면서,“겹겹”의세계를“거듭거듭”“가닥가닥”펼친다.현실을이탈하지않은결과로“온몸이주름이된노파”,번번이내것을너에게내어주는나,그런내안에서끝나지않는“마트료시카엄마”와“아빠”는같은높이에,같이위치한다.이부조리를심각이아닌담담으로만드는것은김경인의기법일까,갱신일까.
김경인의등고선을클로즈업하면방금잘린나무냄새가난다.막드러난나이테에대고‘조용한삶’이라고불러보게하는김경인의시편을‘생활의윤리학’이라고부르고싶다.이해할수없는일이오래반복되면생활이된다고,아무렇지않은것이아니라아무렇지않은척하지않는것이라고,가능성을닫은것이아니라가능성과불가능성을구별하지않는것이라고말하는,끝내생활하는사람의편인,그런관점.
“나는살아있다/나는살아있을것이다/그러니아무도용서를빌지않았으면좋겠다”.읽는사람을삶의순례자로멈추게하는여기에“모자”가있다.모자가감추고있는것은“새로돋아/아름다운귀”.새싹귀를가질수있다는,“허름한미래의모자”안에도별이돋아날수있다는믿음.김경인의시적여정은이제거기를가리킨다.그것은이시집이우리모두의보고서라는걸의미한다.
이원시인
시인의말
희망은무엇이지?
부은발로걷다가갓길에서본하얀자갈
집으로가져올까,잠시손에쥐었다가
그냥거기에놓아두고온것
2026년9월
김경인
책속에서
책속에서
먼곳이될게
지겨운꿈의영사기가토해내는풍경말고
이웃의식탁위에얇게저며져아삭아삭씹히다가
달콤한피흘리면서사라지는여자들은말고
대대로내려온아버지들의튼튼한위장속을
물구나무선채역류하는독한농담이될게
허물어지는얼굴이좋아
반백년전쟁을겨우마치고서
폐허가된가난한나라의국경선이좋아
주인없는실패가좋아
―「농담」부분
그런데우리는언제부터친구인걸까
물음표처럼자꾸구부러지는몸을펴고
의자에서일어나자
누군가문을두드렸다
문밖에는내가서있어
나는드디어친구처럼
나를활짝끌어안았다
―「친구의집」부분
내일은누구에게물어야하지?
안간힘으로
한방울남은샐비어꿀에
대롱을드리운나비에게
무엇이축복이지?
부서진다음에도
부서질것이그만큼
남아있다는것
―「질문들」부분
오늘은
쌀알만하다가
눈사람처럼커다래지는그런슬픔은말고
(…)
폭죽처럼
웃음처럼터지는
슬픔에대해
힘센슬픔에대해
정답을잊어버릴때까지
계속틀린답만을적어내는고집센학생들에대해
―「오답노트」부분
삼백육십오일세일중인웨하스처럼
남아도는비극이각자의창문틈에
부스러기소식으로떨어지다가
이내눅눅하게잊히겠지
대단지아파트저조그맣게깜빡이는창문마다
얼마나많은세계가들어있을것인지생각하다가
길어질대로길어진그림자와
산책길을다끌고와서도
나는그어떤슬픔에도다다르지못했네
―「웨하스생각」부분
“저기요…거기실좀주시겠어요?”등뒤에서누군가낮게속삭였지.버려진문갑처럼여자는문에기대있었어.“나는문안에사는사람들의이불을꿰매는일을하지요.”너의그림자는발밑에서실처럼얇게이어지다가여러가닥으로엉켰어.바늘이그림자를통과할때마다그림자는몸밖으로풀려나왔지.“당신의모든조각들은…어디로이어질까요…”여자는바느질의매듭을짓고천천히고개를들었지.너는손을뻗었어.네가흘린실밥과잃어버린조각들이무수히깔린복도를향해.
―「당신의모든조각」부분
오늘우리귀엣말처럼사소해집시다
추운세계에서날아가려다붙잡힌
고통의깃털을산채로뽑아만든
가볍고포근한이불아래서
이웃의나쁜소식을자장가처럼들으면서
잠의입구를서성이다가
문득흘러나온혼잣말이침대를적실때에
서로의창문에서코끼리귀를닮은커튼으로펄럭입시다
―「청혼」부분
가끔나를열어보고놀란다.이렇게오래된것들을아직도버리지않고있다니.어제는둥둥뜬기름처럼걷어내도자꾸만엉겨붙는다.밤의주름마다,젊은모습그대로밀폐용기속에담긴엄마가웅웅낮게울린다.쓸쓸하고서늘한음악,얼어붙고서야선명해지는삶의무늬들.네모난어둠속깊이밀어넣어야한다.이것이내가사랑하는방식.입을열면,유통기한지난우유처럼흘러내리는기억들.나는조용히닫힌다.
―「나의아름다운냉장고」부분
무릎을세우고방안에앉아있다
재투성이어젯밤베개를안고
짙고푸르게뒤척이는별아래
비밀편지를담은술병처럼
아니,돛단배처럼
창너머흔들리는이파리들
손을뻗으면
모래처럼바스락거리는먼지
나는살아있다
나는살아있을것이다
그러니아무도용서를빌지않았으면좋겠다
치렁치렁하게늘어진어둠위로
잘오려낸별들,
부서지며빛난다
―「짙고푸른별무늬커튼」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