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서평
서정시의진면목,한국시의소중한발자취
정호승시인의첫시집을새로이만나다
맑고부드러운언어로전통서정시의순정한세계를펼쳐온‘우리시대최고의감성시인’으로서독자들의열렬한사랑을받고있는정호승시인의첫시집『슬픔이기쁨에게』개정판이출간되었다.1993년첫개정판에이은두번째개정판이다.이번개정판에서는부가름을다시하고연작시(「가두낭송을위한시」「유관순」「옥중서신」)를해체하여작품마다제목을새롭게달았으며,초기시4편(「백정의피」「목숨과안경」「산이여인에게」「페스탈...
서정시의진면목,한국시의소중한발자취
정호승시인의첫시집을새로이만나다
맑고부드러운언어로전통서정시의순정한세계를펼쳐온‘우리시대최고의감성시인’으로서독자들의열렬한사랑을받고있는정호승시인의첫시집『슬픔이기쁨에게』개정판이출간되었다.1993년첫개정판에이은두번째개정판이다.이번개정판에서는부가름을다시하고연작시(「가두낭송을위한시」「유관순」「옥중서신」)를해체하여작품마다제목을새롭게달았으며,초기시4편(「백정의피」「목숨과안경」「산이여인에게」「페스탈로치」)을추가로수록하였다.1979년초판이출간된지35년이라는오랜세월이흘렀어도냉철한현실인식과삶의깊이에서우러나오는진정성과“슬픔을수반한아름다움”(박해석,발문)이보석처럼빛나는정결한시편들이여전히가슴을적시는뭉클한감동을일으키며고요한울림을선사한다.
슬픔을만나러/쥐똥나무숲으로가자./우리들생(生)의슬픔이당연하다는/이분단된가을을버리기위하여/우리들은서로가까이/개벼룩풀에몸을비비며/흐느끼는쥐똥나무숲으로가자./(…)/무릎으로걸어가는우리들의생/슬픔에몸을섞으러가자./무덤의흔적이있었던자리에숨어엎드려/슬픔의속치마를찢어내리고/동란에나뒹굴던뼈다귀의이름/우리들의이름을지우러가자./가을비오는날/쓰러지는군중들을바라보면/슬픔속에는분노가/분노속에는용기가보이지않으나/이분단된가을의불행을위하여/가자가자./개벼룩풀에온몸을비비며/슬픔이비로소인간의얼굴을가지는/쥐똥나무숲으로가자.(「슬픔은누구인가」부분)
시집을아우르는주된정서는당대의비극적현실을바라보는시인의시대인식,곧‘슬픔’이다.그러나그의‘슬픔’은전통적인정서인한(恨)의세계에서비롯되는게아니다.시인은비애의감상에젖기보다는오히려차분하고관조적인자세로“슬픔으로슬픔을잊”는“슬픔많은이세상”(「슬픔많은이세상도」)을따스한마음으로끌어안는다.결핍의상태가아니라인간의보편적인존재조건으로서의‘슬픔’을순순히받아들이며시인은“어디에서나간절히슬퍼할수있고/어디에서나슬픔을위로할수있는”(「마음이가난한사람들에게」)애틋한마음으로“사랑보다소중한슬픔의힘”(「슬픔이기쁨에게」)을노래한다.
슬픔을위하여/슬픔을이야기하지말라./오히려슬픔의새벽에관하여말하라./첫아이를사산(死産)한그여인에대하여기도하고/불빛없는창문을두드리다돌아간/그청년의애인을위하여기도하라./슬픔을기다리며사는사람들의/새벽은언제나별들로가득하다./나는오늘새벽,슬픔으로가는길을홀로걸으며/평등과화해에대하여기도하다가/슬픔이눈물이아니라칼이라는것을알았다./이제저새벽별이질때까지/슬픔의상처를어루만지지말라./우리가슬픔을사랑하기까지는/슬픔이우리들을완성하기까지는/슬픔으로가는새벽길을걸으며기도하라./슬픔의어머니를만나기도하라.(「슬픔을위하여」전문)
등단초기부터맹인부부가수,혼혈아,구두닦이,넝마주이,동냥아치소년,피난민,창녀,머슴,꼽추등고통의삶을살아가는민중들과함께해온시인은“가난한자는또다시가난하여”(「헤어짐을위하여」)지는냉엄한현실속에서“단한번인간에다다르기위해”(「파도타기」)발버둥치며“눈물의칼을씻고”서“홀로새벽강가에서우는사람들”(「거리에서」)의아픔에주목한다.시인은우리사회의아픔을드러내는이들소외된계층의애절한삶을따듯한눈길로바라보며“희망을품고죽은사람들의희망”(「겨울밤」)과“돌보다무거운눈물”(「바다에서」)의아픔을연민과위로의목소리에담아이야기한다.
눈내려어두워서길을잃었네/갈길은멀고길을잃었네/눈사람도없는겨울밤이거리를/찾아오는사람없어노래부르니/눈맞으며세상밖을돌아가는사람들뿐/등에업은아기의울음소리를달래며/갈길은먼데함박눈은내리는데/사랑할수없는것을사랑하기위하여/용서받을수없는것을용서하기위하여/눈사람을기다리며노랠부르네/세상모든기다림의노랠부르네/눈맞으며어둠속을떨며가는사람들을/노래가길이되어앞질러가고/돌아올길없는눈길앞질러가고/아름다움이이세상을건질때까지/절망에서즐거움이찾아올때까지/함박눈은내리는데갈길은먼데/무관심을사랑하는노랠부르며/눈사람을기다리는노랠부르며/이겨울밤거리의눈사람이되었네/봄이와도녹지않을눈사람이되었네(「맹인부부가수」전문)
시인은1970년대한국사회의그늘진면을들여다보는냉철한현실인식을바탕으로하면서도결고운서정성을잃지않는온화한작품세계를보여준다.깊이있는현실직시를통해“죽고싶어도죽지못하”(「낙산(落山)을오르며」)는우리사회의모순을통찰하는시인은전쟁으로인한죽음과폐허,분단과독재,가난과소외등굴곡진우리근대사이면의상처를다양한모습으로보여준다.“빈혈의세상”(「밤기차를탄다」)에억눌린민중들의삶을좇는시인의시선에는무엇보다도“세상모든무관심”(「겨울밤」)과슬픔에짓눌린“가장가난한사람들”(「새벽별」)에대한뜨거운사랑,다스운인간애가깃들어있다.
너의고향은아가야/아메리카가아니다./네아버지가매섭게총을겨누고/어머니를쓰러뜨리던질겁하던수수밭이다./찢어진옷고름만홀로남아흐느끼던논둑길이다./지뢰들이숨죽이며숨어있던모래밭/탱크가지나간날의흙구덩이속이다.//(…)//전쟁은가고/나룻배에피난민을실어나르던/그늙은뱃사공은어디갔을까/학도병따라가던가랑잎같이/떠나려는아가야우리들의아가야/너의조국은아프리카가아니다./적삼댕기흔들리던철조망너머로/치솟아오르던종다리의품속이다.(「혼혈아에게」부분)
더불어살아가는삶의소중함을일깨우는시인은고통스러운삶을노래하면서도절망이나체념의감정을드러내기보다는참혹한현실속에서도“눈물의향기”(「눈물」)를어루만지며슬픔뒤에오는희망을이야기한다.“슬픔이눈물이아니라칼이라는것”(「슬픔을위하여」)을깨닫는시인은이제슬픔을넘어서삶의고통을벗어나려는강한의지를보여준다.세상의모든슬픔이아름다움으로빛나는세상을꿈꾸는간절함속에서“자신의눈물로온몸을녹이며/인간의희망을만드는눈사람”(「눈사람」)을기다리며시인은“슬픔으로가는저녁들길에”(「슬픔으로가는길」)서서“모든사람들의눈물이끝날때까지”(「눈길」)어둠의시대를밝히는희망의불꽃을지핀다.
내진실로슬픔을사랑하는사람으로/슬픔으로가는저녁들길에섰다./낯선새한마리길끝으로사라지고/길가에핀풀꽃들이바람에흔들리는데/내진실로슬픔을어루만지는사람으로/지는저녁해를바라보며/슬픔으로걸어가는들길을걸었다./기다려도오지않는사람을기다리는사람하나/슬픔을앞세우고내앞을지나가고/어디선가갈나무지는잎새하나/슬픔을버리고나를따른다./내진실로슬픔으로가는길을걷는사람으로/끝없이걸어가다뒤돌아보면/인생을내려놓고사람들이저녁놀에파묻히고/세상에서가장아름다운사람하나만나기위해/나는다시슬픔으로가는저녁들길에섰다(「슬픔으로가는길」전문)
『슬픔이기쁨에게』는한국서정시를대표하는시인으로자리매김한정호승시의출발점으로서초기시의면모를여실히보여준다.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