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빨강 (리마스터판)

재와 빨강 (리마스터판)

$15.00
Description
재난 속 낯선 나라에서 혼자가 된 사람
의문의 살인과 사라진 기억, 그리고 엄습하는 위협
절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숨 막히는 전개!

치밀하고 탄탄한 이야기의 작가 편혜영의 첫 장편소설
세련된 문장으로 다시 완성된 빈틈없는 명작
*창비는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소설 중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작품들을 엄선해 새로이 단장한 ‘리마스터판’을 출간하고 있습니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잡은 작품들이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내면과 일상의 폭력을 강렬한 이미지로 형상하면서도 빈틈없이 치밀한 서사를 직조해내는 작가 편혜영의 기념비적인 첫 장편소설 『재와 빨강』이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으로 출간되었다. 작가는 이번 리마스터판 출간을 위해 거의 모든 문장을 새롭게 고쳐 써서 펴냈는데 이로 인해 작품의 시의성과 현재성이 한층 살아난 것은 물론, 새로운 독자와 이 책의 기존 팬들 모두를 만족시키는 새로움과 완성도를 지니게 되었다.
2010년에 처음 쓰인 『재와 빨강』은 지금 읽어보면 ‘코로나19’를 예언하는 듯한 내용이라 충격과 감탄을 자아낸다. 발열과 기침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원인 모를 팬데믹, 격리와 거리 두기를 거치며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지는 불신 등 소설 속 상황은 2020년 이후 전세계에 만연한 현실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편혜영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에 밀도 높은 문장으로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인간성 상실, 소통의 부재로 빚어진 절대고독 등의 상황을 한층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재와 빨강』은 묵시록적이고 기괴한 요소들이 다분하면서도 현실적인 공감이라는 주제의식을 긴장감 있고 집요하게 추구했다는 점에서 빼어나게 빚어진 장편의 세계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저자

편혜영

1972년서울에서태어나서울예대문예창작과와한양대국어국문학과대학원을졸업했다.2000년『서울신문』신춘문예로등단했으며,소설집『아오이가든』,『사육장쪽으로』,『저녁의구애』,『밤이지나간다』,『소년이로』,그리고『어쩌면스무번』등이있고,장편소설『재와빨강』,『서쪽숲에갔다』,『선의법칙』,『홀TheHole』,『죽은자로하여금』등이있다.앤솔러지『놀이터는24시』...

목차

제1부
제2부
제3부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누가그의아내를죽였을까,그는어떻게살아남을까
치밀하게잘짜인스릴러이자인간성에대한처절한질문

제약회사에서약품개발원으로근무하는주인공은파견근무를발령받고C국의본사로떠난다.마침C국은감기와유사한전염병이창궐하여위생검열이강화되었고,전염병으로인해도시전체가마비상태이고길에는쓰레기가넘쳐난다.배정받은Y시제4구의숙소에서출근개시와명령을기다려보지만본사담당자‘몰’은연락이없다.문득본국의집에가둬놓고온개가생각나여기저기수소문끝에전처와재혼했다가다시이혼한동창생유진에게연락이닿아개를풀어놔달라고부탁한다.다음날유진은주인공의집에가보니난자당한개와칼에찔려죽은전처의시신을발견했다는연락을해온다.언제생겼는지모를손바닥의멍,머릿속에서완전히사라져버린출국전날밤의기억,유진과의술자리등혼란스러운생각에휩싸여인터넷으로뉴스를검색해보니집근처쓰레기장에서자신의지문이묻은칼이발견되었고자신이유력한살인용의자로지목되고있음을확인한다.뜻밖의소식에당황하던차에누군가숙소의문을두드리자깜짝놀란주인공은창밖쓰레기더미로몸을날린다.
전처의죽음이라는1부의충격적인사건은이작품을손에땀을쥐게하는추리소설같은분위기로이끈다.이러한긴장감은소설이끝날때까지이어지며독자로하여금과연진실은무엇인지를끊임없이되묻게한다.이후주인공은거리의부랑자신세가되는데,그가쓰레기더미를뒤지며생활하게되는과정은처절함그자체다.그는그와중에도자신의존재를증명하기위한다양한시도를감행한다.그시도는또다른미스터리를남긴채좌절되기도하고,아내와의추억을상기시키는촉매제가되어주인공의내면을들여다보는계기가되기도한다.극단적인상황에서주인공이맞닥뜨리는인간성상실과절대고독이란,결코본국에서는상상도못해봤지만주인공에게는너무나도간단하게찾아온시련이다.현대문명에서일상의사소한부분을삭제함으로써벌어지는결과가이토록극적인방향으로삶을이끈다는사실이놀랍도록섬뜩한실감으로다가온다.

독자의사유와지평을확장시키는놀라움
특별한의미와감동을선사하는이시대의명작

이번리마스터판을펴내며작가는“팬데믹을겪은후였다면이소설은쓰이지않았을것”이라고밝힌바있다.“삶을폐허로만드는것은역병과쓰레기,끊임없이출몰하는쥐떼가아니라적나라한혐오와차별,정교한자본주의임이명백해졌으므로다른상상을하기어려웠을것”(작가의말)이라는게그이유다.그런면에서『재와빨강』은잘짜여진스릴러이자인간에대한심도있는고찰인동시에,현대사회와문명전체를돌아보게하는거대한스케일을지녔다.저마다놀라운상상력과불편한진실로인간성을파헤쳐온편혜영의여러걸작가운데서도첫장편소설인『재와빨강』이유독특별한이유도바로독자로하여금사유의지평을확장시켜주기때문이다.그러나앞서언급된수많은이유를제외하더라도2023년에『재와빨강』을읽어야할이유는명백하다.이소설이재미있기때문이다.이미현실로다가온상상력과눈에선명히그려질듯밀도높은문장,정교한이야기구성이한데어우러진이작품은한국문학을대표할만한명작임에틀림없다.그리고『재와빨강』은몇년째끝날듯끝나지않는팬데믹의터널을지나는지금우리에게는더욱특별한의미와감동으로다가올것이다.

작가의말

책을출간하고십여년이흐르는동안팬데믹은가상의사건이아니라현재의사건이되었다.소설을구상하고쓸당시만하더라도내게역병은먼과거이자중세의것이었다.겪은적없는시간이자도래하지않을미래였다.팬데믹을겪은후였다면이소설은쓰이지않았을것이다.삶을폐허로만드는것은역병과쓰레기,끊임없이출몰하는쥐떼가아니라적나라한혐오와차별,정교한자본주의임이명백해졌으므로다른상상을하기어려웠을것이다.
오래전의역병을상기시키는이소설을지금에와서다시내놓는일에는얼마간용기가필요했다.하지만어떤상상은현실이되기도하고때로그렇게겪은현실은이야기보다더적나라하다는것을잊지않고싶어서다시출간하기로마음먹었다.오래된이야기를다듬을수있게해준창비편집부에감사드린다.무엇보다이미이소설을읽어주신독자분들께,그리고새롭게이소설을읽어주실독자분들께감사드린다.드물지만더디게이어지는독자분들덕에이이야기의희미한잿빛이계속떠돌수있었다.

책속에서

위험에대한경고는언제나실제로닥쳐오는위험보다많은법이다.막상위험이닥칠때는어떤경고도없으니까.그가공항여기저기에붙은검역안내문과전염병예방수칙을대수롭지않게보아넘긴것은그때문이었다.경고가많은걸보니그다지위험하지않은게분명했다.(8면)

“쥐때문이야.”
파견근무계약서를작성하는자리에서그가선발이유를묻자지사장이대답했다.
“쥐요?”
“내가보기에자네만큼쥐를잘잡는사람은없어.”
통역을겸하는지사장의비서가재미있다는듯그를힐끔거렸다.그는금세풀이죽었다.경영인연수를겸한다면서선발사유가시시하기짝이없었다.아무리방역회사라고해도하필이면끔찍이싫어하는쥐때문이라니.장래성이촉망된다느니업무태도가훌륭하다느니실적이뛰어나다느니경영자의자질이있다느니,그모두가아니라면까닭없이마음에든다느니하는입에발린말을바랐지만지사장은더할말이없다는듯입을다물었다.(30~31면)

숙소를다둘러보고짐을정리할때가되어서야트렁크를여태복도에두었다는걸깨달았다.허둥지둥나가현관문을열었지만복도는텅비어있었다.트렁크가없었다.
그는믿을수없어트렁크를내려놓았던자리를멍하니바라보았다.바닥에깔린질감이거친카펫은입을다물고있었다.복도에희미한어둠말고는아무것도없었다.일정한간격으로늘어선현관문들은굳게닫혀있었다.그중한곳에사는누군가트렁크를가져간것이아니라애당초자신이트렁크를끌고오지않았다싶을정도였다.(42~43면)

그는문득가르쳐주지않았는데도유진이자신의집을제대로찾아간사실을떠올렸다.유진이그의집을물어볼사람이라고는전처뿐이지만이미그녀가죽은뒤였는데도말이다.한번도그의집에가본적없는유진이그에게묻지도않고그가알려주지도않았는데어떻게집을찾아갔는지,경찰은왜조사하지않을까.
그가술에취해기억을잃은밤,비교적제정신이던유진이그를부축해집까지데려다주었다면,그리고다음날그가출국한사실을알면서전처를그의집으로불렀다면,전처에게자신이겪은실패가모두그녀때문이라고비난을퍼부었다면,그래서언쟁이시작되고끝내비밀을폭로하고그비밀이가져온모멸감때문에유진이심하게분노했다면.(106~107면)

공원에서지낸초기에그는거의아무것도먹지못했다.먹을것을구해야한다는생각보다자신이왜그런음식밖에구할수없는처지가되었는지비통해하느라그랬다.얼마지나지않아그런감정은허기에아무런도움이되지않는다는걸깨달았다.부랑하는처지라면음식에대해어떤자의식도가져서는안된다.허기에지쳐처음으로쓰레기통을뒤져먹을것을찾았을때울음을삼키느라냄새를거의느끼지못했다.그는상해서곤죽이된국수를먹었다.일단한입먹자계속먹을수있었다.벌레가붙어있다면벌레를떼어내고먹었고곯았다면코를막고먹었다.(124~25면)

몸여기저기가쑤셨다.나뭇가지에찔린팔과허벅지가욱신거렸다.어쩌면뼈가부러졌는지도몰랐다.나무에찔린허벅지에서피가흐르는지바지가검붉게물들었다.
그가원숭이와뒤엉켜육탄전을벌이는동안다른원숭이가쉽게가방을채어갔다.그는결국가방을잃었고그러고나서야필사적으로지키려던것은가방이아니었음을깨달았다.원숭이의꼬리를씹고팔뚝과허벅지를찌르면서까지지켜야할것은아내말고없었다.(164면)

하수도에서는사소한이유로번번이다툼이일어났는데그는싸움에휘말리지않았다.쥐때문이었다.하루종일쥐를잡으려고구석을지키고있는그에게시비를거는사람은없었다.쥐가나타날때면손에잡히는대로물건을내리치고잡히는게없으면맨손으로쥐를잡으려는걸본사람들은그에게눈살을찌푸렸다.그가잡는게쥐뿐이아니라고생각하는듯했다.
잡은쥐는달리버릴데가없어아래쪽에쌓아두었다.어차피죽었으니어디에버려도상관없었다.죽은자리에그대로있어도괜찮았다.사람들은죽은쥐에게별신경을쓰지않았다.인상을쓰는게전부였다.산쥐보다죽은쥐가안전했다.죽은쥐는그들을괴롭히지않고먹이도탐내지않았다.(176면)

“그런데전염병에걸린건아닌가요?오래된기억이라확실치않지만공항에서검역에걸린외국인이도시로유입된후실종되었다는뉴스를본적있어요.”
“전아닙니다.병에걸리지않았어요.”
“잘못된뉴스였나보네요.그런데몰의얼굴을아나요?모르는거죠?그렇죠?”
그는뚫어져라남자를쳐다봤다.
“역시몰을찾기어렵겠군요.”
남자가알듯말듯웃음띤얼굴로돌아서서사무실쪽으로갔다.막도착한엘리베이터에경비들과함께올라타면서그는남자가자신의이름을불렀다는사실을깨달았다.너무자연스러워서미처깨닫지못했지만,C국에서그의이름을아는사람은몰뿐이었다.(205~206면)

남자는그의사과를받아주지않았다.발버둥을치며그의얼굴만큼이나커다란손을마구휘둘렀다.그는남자에게서손을떼고최대한몸을웅크렸다.그런데도자신을향해주먹질하는남자의굳은얼굴이보이는듯했다.많은일을겪었지만그는한번도스스로를위해눈물
을흘리지않았다.그러나이제야말로서글퍼졌다.맞는게정당하다는생각이들자비참해졌다.남자가욕을하며자리에서일어섰다.그틈에남자의한쪽다리를잡았다.남자가휘청였고이내균형을잃고쓰러졌다.쿵소리가났다.남자가상해를입는다면그에게맞아서가아니라바닥에머리를찧은충격때문일것이다.그는결코쥐나잡는인생을바란적없다고마음을다잡으며남자를깔고앉아주머니에든무딘칼을꺼냈다.그는이런일을뺏길까봐전전긍긍하는인생을바란적도없었다.그렇다면과연자신이꿈꾸던인생은무엇이었을까.하도오래전의일이라하나도기억나지않았다.(215~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