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16.80
Description
어제를 쓰고 싶은 오늘의 당신을 위한
지금 가장 아름다운 소설

신동엽문학상 수상 작가 이주혜의
기억, 쓰기, 회복에 관한 찬란한 이야기
“섬세하게 벼린 언어”로 “우리 사회의 유별난 젠더불평등과 그 불감증의 벽을 깊숙이 가르고 지나가는”(신동엽문학상 심사평)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온 작가 이주혜가 두번째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을 펴냈다. 2023년 신동엽문학상 수상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신작 소설이다. 치밀한 구성과 유려한 문장으로 여성 현실의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빈틈과 타협 없이 파고들어 평단과 독자의 신뢰가 두터운 작가는 이번 소설에 이르러 더욱 견고하고 탁월해진 서사적 역량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소설은 한 여자가 눈앞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헤쳐나갈 방법으로 ‘글쓰기’를 선택하며 시작한다. 원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기억을 돌아보고 다시 쓰며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상처를 드러내 그것과 함께 나아가는 과정이 기품 있는 언어로 그려진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는 한 시절의 아픈 기억이 해상도 높은 문장으로 실감 나게 펼쳐질 때, 존재를 장악하여 제자리에 붙박는 기억의 힘과 기억에 짓눌리지 않고 살아가려는 존재의 힘이 격렬하고 매혹적으로 부딪치며 섞이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영영 이별하고 싶던 기억을 직면함으로써 삶에 분분히 자리한 고통과 기쁨을 모두 껴안으려는 한 사람의 절실하고 눈부신 시도는 지나온 시간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다음을 향해 가고 싶은 이들의 마음에 짙은 여운을 남긴다.

저자

이주혜

李柱惠
읽고쓰고옮긴다.2016년창비신인소설상을받으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지은책으로장편소설『자두』,소설집『그고양이의이름은길다』『누의자리』,산문집『눈물을심어본적있는당신에게』,옮긴책으로『우리죽은자들이깨어날때』『멀리오래보기』등이있다.신동엽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1부봄은봄을만나서
2부봄이봄을탐했고
3부다친봄은오래울었으나
4부봄이봄을옮겨붙였다

에필로그봄은복수다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무너진자리에서쓰기시작한일기,
지나간시절을기록하며마침내새로운계절을맞다

오십대에접어든‘나’는어느날남편‘석구’가함께정당활동을하던여자동료를스토킹했다는사실을알게되고,자신의행동이진심이었기에부끄럽지않다고말하는석구에게돌이킬수없이상처받는다.이후별거를위해그간의살림을정리하고유독석구와만각별했던딸‘해준’과도멀어지며폐인과다름없는나날을보내던중,가까스로받게된정신과상담에서의사에게‘일기쓰기’가도움이될거라는얘기를듣는다.“일기를쓴다는것은약간의거리를두고자신의삶을바라보는행위”(15면)라는의사의말을반신반의하며인터넷에‘일기쓰기’를검색하던‘나’는한글방에서운영하는‘일기쓰기교실’을발견한다.그리고그교실을홍보하는문장에순식간에사로잡힌다.

“당신의삶을써보세요.쓰면만나고만나면비로소헤어질수있습니다.”(16면)

헤어지고싶은기억을줄곧간직해오기라도한것처럼‘나’는이문장에홀연히이끌려‘일기쓰기교실’에등록한다.하지만“‘나는’이라고시작했더니한줄도쓸수없었”(32면)기에,‘시옷’이라는이름의화자를앞세워지금까지누구에게도하지않았던이야기를처음으로일기속에풀어놓는다.1980년,어둡고혼란한시대의주변부에서호된성장통을겪는열살여자아이시옷의이야기를.
소설의1부에서4부에걸쳐이어지는일기는시옷의어린몸과마음에날카롭게새겨진아픔을강렬하면서도밀도있는문장으로진술한다.여자아이였기에당할수밖에없었던모욕과수치,“보지를가진사람으로보이지않”(70면)으려고짧은머리에티셔츠와바지차림만고집했던날들,간절히원하는걸얻기위해“맑은소년”(61면)으로가장해홀로비밀의무게를감당했던그해봄,모든게들통나며“세계의언저리로쫓겨나는것같았던그느낌”(211면).시옷이견뎌야만했던건이뿐이아니었다.그즈음시옷은“가난뱅이라는단어의감각을익히는중이었다.”(79면)아빠는큰빚을진뒤사라졌고,나날이더절박해지는할머니의독경소리와엄마의한숨소리가아빠의빈자리를채웠다.가난해서감내해야하는수모와단념해야하는꿈이있었다.‘여자애’와‘남자애’중무엇이되고싶고어떻게되어야하는지몰라노심초사하고,갑자기닥쳐온가난앞에서의연한척까지하느라열살의시옷은고단하고슬프고외로웠다.지금껏단한번도제대로마주하지않았던그때의감정을하나씩짚어가며‘나’는매일불안과좌절을오가지만일기쓰기를멈추지않는다.그시절을다시온전히살아내야지만다른내일을만날수있다는듯이쓰기에매달린다.미처보듬지못했던마음을섬세히돌아보는문장들을따라가다보면저마다외면해온오랜상처를이제는밝은빛아래슬며시꺼내보고싶어진다.
한편‘나’는일기에그동안까맣게잊고지냈던이들의이야기또한적는다.옆집친구‘애니’는늘‘공주’처럼빼입고다녀시옷을동경과질투로뒤척이게했다.아빠가사라진뒤,“저희어머니엽차팔아모은눈물겨운돈”(81면)을돌려달라며집에쳐들어온‘제비다방남자’는수상하고무례했지만,어린시옷을다정히위로할줄아는어른이었다.‘윤수’는슬픔과두려움을함께나누는법을알려준소중한친구였고,윤수의누나‘윤심언니’는언제나가난과피로에찌들어있으면서도시옷을보면눈이무지개가되도록활짝웃어주었다.‘나’는일기속에서그들과다시만나며,자신이쓰고있는일기가“혼자만의이야기가아니”(340면)라한때시옷에게짙은흔적을남기고스쳐간그들과함께쓰는이야기임을어렴풋이깨닫는다.그리고시옷을지독히도괴롭고어지럽게했던,야만과혐오와차별이들끓던그시절을그들또한간신히통과하고있었음을이해하게된다.하지만그러한이해와계속된쓰기에도불구하고‘나’는기억과헤어지기는커녕기억에더욱세차게붙들리는것만같고,망가진현실을다시세우는일은갈수록요원하게만느껴진다.게다가이제는멀어진그들중누군가의소식을전해듣고충격에휩싸이기까지한다.소설은그지난한쓰기와회복의과정을끈질기게쫓으며마지막장까지눈을뗄수없게만든다.

그럼에도계속쓰고,나아가고,살아가고싶은당신이
지금반드시만나야할이주혜라는세계

사십년이넘게지나도옅어지지않는기억을세밀한필치로절실히기록하려는‘나’의노력은감당하기어려운지금을기어코돌파해나아가려는의지의표현일것이다.그의지가위태롭게나마지속될수있게하는원동력중하나는‘나’와함께일기쓰기교실을다니는다른수강생들이다.각자의사연을갖고모인그들은서로가쓴일기의첫독자가되어준다.“남이읽을일기”(41면)는혼자쓰고읽는일기와는다를수밖에없고,자신의글을함께읽고이야기를덧붙여주는이들덕분에‘나’는더욱골똘히자신의기억을들여다보며시옷이새로운봄을맞는순간까지써낼수있게된다.글방동료들끼리나누는거칠고솔직한대화와모종의우정은이소설의또다른매력으로다가갈것이다.
이주혜는“힘겨움안에도자존과지혜의시간이있다는것을잊지않는”(신동엽문학상심사평)작가인바,『계절은짧고기억은영영』은절망과통증의어제속에서“매순간끊임없이선택하면서그렇게한발한발앞으로걸어”(324면)가려고노력했던순간들을건져올려힘겨운오늘을구원하는이야기이다.소설속에서‘나’는여태해소되지않은어린시절의아픔을쓰며괴로워하지만,일기쓰기는다시고통에투신하는일만은아니다.“이제나는살았나?살아남았나?”(76면)라는질문처럼,오히려과거의시련에도불구하고지금여기생생히살아있는자신을새로이감각하며서서히내면의힘을다지는일인것이다.일기속에서어린자신이눈앞의현실을헤쳐가기위해저지른숱한선택들을복기하며‘나’는지금발딛고선자리에서어느쪽으로걸음을옮겨야할지고민한다.그곳은까마득한절벽일까,아니면“다른이야기로넘어갈”(224면)문턱일까.신중하고진실한목소리로전해지는이회복의서사를마지막까지지켜보자.어느새읽는이의삶까지뜨겁게데우는“이주혜의놀라운진심”(하성란,추천사)을목격하게될것이다.

작가의말
밤은제속을보여주지않고한없이낯설고도낯익은어떤얼굴을보여주었다.그얼굴은이주혜였다가민애니였다가정윤심이었다가최수호였다가정윤수였다.그리고언제나시옷이었다.작년계간지에이소설을연재할때부터나의잔인함과가혹함을묵묵히견뎌준시옷이었다.열차출입문이열리고젊은연인이내렸다.시옷도내시야에서사라졌다.문이닫히고열차가출발하자출입문유리창에시옷이다시나타났다.문득시옷에게이름조차주지않았다는사실을깨달았다.열차가다음역에정차하면또시옷이잠시사라질것이다.나는갑자기다급해졌다.시옷에게사과하고싶었다.그전에말을걸고싶었다.아니,그전에이름을불러주고싶었다.다정하게안부를묻고싶었다.
2023년가을
이주혜

추천사
한남자가사라지고한남자가쳐들어오며한남자가잉태되고한여자아이가‘사내자식’으로둔갑한그해의기억.‘나’는일기쓰기교실에서자신의기억을‘시옷’이라는화자를앞세워어렵게풀어놓기시작한다.그해의비밀들이하나둘씩모습을드러내면서어느새시옷의이야기는‘애니’의이야기,‘윤심’과‘윤수’의이야기,‘수호’의이야기가된다.야만과혐오와차별을통과하는,누구한명의것일수없는그들의이야기는결국이주혜의이야기이자책을읽는‘나’들의이야기가된다.그와동시에의심이싹튼다.이‘일기’는얼마만큼사실일까?작중인물들이시옷의일기를듣고‘소설같다’고말하는순간,이야기에불현듯균열이발생한다.이균열은이주혜가소설이라는장르에던지는질문이기도하다.보리차가팔각컵에담기면엽차가되는소설의장면처럼어떤이야기는어떻게전해지는지가더중요하다.이이야기의끝에서우리는송아지눈망울같은진심과만나게된다.소설을향한이주혜의놀라운진심말이다.
하성란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