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저쪽 1(큰글자도서) (정찬 장편소설)

길, 저쪽 1(큰글자도서) (정찬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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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권력과 폭력, 그 안에서의 인간의 선택과 존엄의 문제를 치열하고 진지하게 탐구해온 작가 정찬의 여덟번째 장편소설. 창비문학블로그 '창문'을 통해 연재(2014년 9월~12월)했던 이 작품은 유신체제와 군사독재시대의 폭력을 배경으로 이 시대 비극적인 당사자들의 선택과 희생, 그 안에 담긴 슬픔과 애잔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1970~80년대를 거치며 국가권력에 의해 청춘이 입은 깊은 상처, 여러 정권이 바뀐 현재까지도 여전히 보듬어지지 않는 '시대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인혁당 사건.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을 중심으로 한 유신정권의 부조리, 광주항쟁.민주화운동 등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희생된 군사독재시대의 폭력, 이명박 정권의 사대강 사업 등 희망이 없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꼬집으면서도 그 상처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사랑'을 통해 개인과 우리 사회의 치유와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저자

정찬

1983년무크지『언어의세계』에중편소설「말의탑」을발표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소설집『기억의강』『완전한영혼』『아늑한길』『베니스에서죽다』『희고둥근달』『두생애』『정결한집』『새의시선』,장편소설『세상의저녁』『황금사다리』『로뎀나무아래서』『그림자영혼』『빌라도의예수』『광야』『유랑자』『길,저쪽』『골짜기에잠든자』등이있다.동인문학상,동서문학상,올해의예술상,요산김정한문학상,오영수문학상등을수상했다.

수상:2017년오영수문학상,2015년요산김정한문학상,1995년동인문학상

목차

1장편지
2장폐사지에서
3장윤하
4장정릉옛집

출판사 서평

폭력의시대가남긴상처,그속에서피어나는사랑
권력과폭력,그안에서의인간의선택과존엄의문제를치열하고진지하게탐구해온작가정찬의여덟번째장편소설.창비문학블로그'창문'을통해연재(2014년9월~12월)했던이작품은유신체제와군사독재시대의폭력을배경으로이시대비극적인당사자들의선택과희생,그안에담긴슬픔과애잔한사랑을이야기한다.1970~80년대를거치며국가권력에의해청춘이입은깊은상처,여러정권이바뀐현재까지도여전히보듬어지지않는‘시대의상처’를들여다보며인혁당사건?동아일보광고탄압사건을중심으로한유신정권의부조리,광주항쟁?민주화운동등으로수많은학생들이희생된군사독재시대의폭력,이명박정권의사대강사업등한국사회의문제점을날카롭게꼬집으면서도그상처속에서피어나는‘새로운사랑’을통해개인과우리사회의치유와회복의가능성을보여준다.

‘숙명적희생자’의존엄과슬픈존재들의아름다운눈물
국가의폭력에희생당한혹독한한생애를잊기위해이땅을떠났던연인이새로운사랑을쓰기위해돌아왔다.어느날‘윤성민’은첫사랑‘강희우’로부터편지한통을받는다.수배와도피생활,수감생활로80년대를보내던성민이감옥에있던1986년10월,편지한장만남겨놓고프랑스로떠난희우에게서이십칠년만에그를초대한다는내용의편지가온것이다.성민은희우를만나기위해그녀와의추억이어려있는‘정릉옛집’으로찾아가고,드디어그녀가과거한국을떠나게된끔찍하고고통스러운이유를알게된다.

상처는깊었다.(…)그것은슬픔이기도했고,경이이기도했다.그슬픔과경이가새로운사랑을만들고있었다.시간과공간에서벗어난사랑이었다.현실의사랑이아닌꿈의사랑이었다.얼굴에주름살이생기고머리가희끗희끗해졌어도여전히나는목마른청년이었다.목마른청년에게진실은현실속에있지않았다.꿈속에있었다.희우는꿈의존재였다.세월이흘러도청년의모습이조금도변하지않은것은꿈의존재가변하지않았기때문이었다.

희우는편지에서나를초대했다.정릉옛집으로.그녀가사라진후정릉옛집은꿈의집이되었다.그러니까나는꿈의공간으로초대받은것이었다.이십칠년동안어두컴컴한복도에갇혀있다가갑자기문이열리는듯한느낌이었다.문뒤에어떤풍경이있을는지설레기도했지만점점더두려워졌다.설렘보다두려움이더큰것은그녀가꿈의존재이기때문이었다.어쩌면내가늙었기때문이었는지도모른다.

희우는성민에게보내는편지를통해혼자감내하던과거의상흔을드러냄으로써비로소자유로워지고‘과거의희우’와화해하게된다.하지만희우의고백은성민에게는충격적인것이었다.성민이도피생활을하던시절,그의연인이었던희우는사복형사에의해강제연행되어그의거처를자백받기위해온갖고문을당했고누군가에게성폭행을당해임신까지하게되었다는것이었다.희우는그때딸영서를낳았고프랑스로떠나‘과거의희우’를버리고그곳에서의사로서의새삶을시작한다.성민은이제암말기환자로돌아온희우의마지막시간을함께보내며그녀의상처를쓰다듬는다.저자는희우의목소리를통해전쟁과내란에서뿐만아니라일상적인정치폭력으로자행되어온‘성폭력과그로인한출산’이라는참혹한역사를짚어내며,여전한폭력의세상에서‘숙명적희생자’의존엄을외로움과슬픔의본질에서찾는다.

그녀의삶이산산이부서지고있을때나는아무것도몰랐다.세상에서가장소중한사람의삶이산산이부서지고있는데,어떻게그사실을까맣게모를수있었을까.
사랑이란무엇인가.사랑하는사람의고통을보지않았다고해서,듣지않았다고해서모른다면그것을사랑이라고말할수있을까.보지않아도,듣지않아도사랑하는사람의고통을느낄때비로소사랑한다는말을해야하는게아닐까.어둠속에서도사랑하는사람의몸은희게빛나는것처럼고통도어떤형태로든나타나야마땅하지않은가.

야만적사회는우리의몸깊은곳에숨겨져있는고통의기억을자극해요.폭력이필요하기때문이지요.나치스가그랬고,스딸린체제가그랬어요.우리의청춘이통과했던70년대와80년대한국사회도그랬어요.수많은청춘들이폭력의희생자가되었어요.(…)
희생자의본질은슬픔이에요.(…)세상은폭력으로가득차있지만그럼에도세상이아름다운것은슬픔에감싸여있기때문이에요.(…)제가당신을사랑할수밖에없는여러가지이유가운데하나는당신에게서슬픔을발견했기때문이에요.

한편,윤성민에게는대학시절만난시인이자치열한운동가인‘김준일’이정신적우상이었다.시인을동경했던성민은‘꿈의존재’인시인김준일을통해세상을새롭게바라보고,동지를만나고,사랑을하고,꿈을꾸었다.그들은‘인간이본최초의언어’인‘짐승의발자국’과같은생생하고리드미컬한언어를자유롭게쓰고말할수있는사회를꿈꾸었지만그들에게세상은너무나가혹했고김준일은마흔둘의젊은나이에베를린에서세상을떠난다.성민은“젊은날에품었던꿈을끊임없이일깨워”준김준일을여전히그리워하며그에게서삶의의미를찾고그를추억한다.

유신정권은‘시인의말’을허용하지않았다.허용되지않은시인의말은어둠속을유령처럼떠돌거나,시체가되어검은땅속에묻혀있었다.시인으로살아가기위해서는유신정권을무너뜨려야했다.그것은또하나의꿈이었다.희우와함께하겠다는꿈과,시인으로살아가겠다는꿈은충돌하지않았다.두개의꿈은서로에게거울이되어서로를빛나게했다.

눈을감았다.청년의얼굴이떠오르고있었다.청년의시선은밤하늘을밝히는별을향하고있었다.별빛은그가가야할길을비추었다.그길위에는먼저간이들이완성된죽음의형태로누워별빛속에서꽃처럼빛나고있었다.그들의죽음은살아남은자들을대신한죽음이었다.
정치권력의혹독한폭력속에서삶과죽음은마주보고있었다.내가살아남은것은나를대신한죽음이있었기때문이었다.죽음을품고있는묘지가생명을잉태하는산모였다.그때는그랬다.청년은잠을자면서꿈꾸지않았다.깨어있는상태에서꿈꾸었다.청년의얼굴에행복이가득했던까닭은깨어있는상태에서꿈을꾸었기때문이다.

사랑은어떻게가능한가,질문하는소설
성민에게남은일은병든희우를잘떠나보내는일이다.하지만그에게는사랑하는사람을떠나보낸또한번의아픔이이미있었다.성민은희우가프랑스로떠난뒤사진작가로활동을하면서건축가인‘윤하’를만나사랑을하게된다.윤하는성민의집을새로고치기위해르또로네수도원으로여행도다녀오면서의욕적인삶의의지를보이기도하지만어린시절부터의심리적트라우마를겪던그녀는결국공사를마무리하고자살한다.성민에게윤하는‘혼이담긴건축’을통해과거의상처를치유하게하고삶과죽음의의미,진정한사랑의의미를알게해준고마운존재이다.성민은그녀로인해김준일의삶에숨겨진미로를찾기도하고새로사랑할힘을얻기도한다.
정찬은이작품을통해‘새로운사랑’의가능성과상처받은영혼이회복되는과정을보여주고있다.그가펼쳐보이는“한국사회의역사적풍경들”은“1970년대를시작으로80년대를굽이치면서지금우리가발을딛고있는여기까지”밤의강물이되어“사랑의이야기속으로흘러”(작가의말)가고,암흑의시간이쪽과저쪽을희망과믿음으로이어준다.지독한삶과죽음의모순이공존하는세상일지라도‘길,저쪽’으로뻗어있는앞으로의생애가기대되는것은세상을적시는슬픈존재들의눈물이아름답게빛나기때문일것이다.

최대한절제한창,묵직하게느껴지는벽,군더더기가전혀보이지않는간결함은르또로네수도원을닮았어요.하지만르또로네에서느끼게되는엄숙함과경건함이여기서는아주엷게느껴져요.따뜻한기운때문인것같아요.여긴깊고어둡고텅비어있음에도따뜻한기운이흘러요.제생각엔……사랑때문인것같아요.성민씨를향한그분의사랑말이에요.

비록지금은‘길,이쪽’에있지만언젠가는‘길,저쪽’으로갈수있다는믿음.그런믿음이없었다면희생의대열속에서그토록꿋꿋이자신의자리를지키지못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