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정조 : 유교 문명국의 두 군주 - 창비 한국사상선 2

세종 정조 : 유교 문명국의 두 군주 - 창비 한국사상선 2

$22.00
Description
한반도 유교왕국의 건설과 재건
조선 국왕의 통치철학을 만난다
창비 한국사상선 제2권 『세종·정조: 유교 문명국의 두 군주』는 1392년 건국하여 1910년까지 총 518년간 한반도에 존재한 왕조국가 조선의 대표적 군주 두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왕을 주제로 삼은 것은 여타 사상사 서술이 주로 학자로서 사상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들을 다뤄온 것과는 다른 창비 한국사상선만의 독특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히 두 왕의 치세 기간에 이뤄진 주요 국책사업들의 진행과정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그 대업들의 바탕을 이룬 통치권자로서의 의도와 사상을 밝히고자 했다. 한마디로 조선조 군주의 통치철학서라 할 수 있다. 편저자 임형택은 이 책의 서문에서 “국왕으로서 국정을 수행하며 발휘한 예지와 봉착했던 어려움이나 고민이 드러나면서 그 인간적인 면모까지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으면 싶었다”(13면)라고 밝힌다.

유교 문명국 건설의 사명: 세종

14세기는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여러 격변이 일어난 대전환기다. 원 제국이 해체되면서 유라시아의 곳곳에서 새로운 국가가 형성되었고, 이는 러시아(모스끄바대공국), 중앙아시아(티무르제국), 서아시아(오스만제국) 지역 제국들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 교체가 일어났다.
이 같은 세계사적 전환기에 고려에서는 문인지식층이 당대의 변화를 면밀히 인식하며 한반도의 체제 변화를 이끌고 있었다. 편저자는 당시 문인지식층이 원 제국과의 교류 경험에서 한반도가 문명의 일원임을 인식한 ‘문명의식’을 습득한 동시에, 한반도적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인(東人)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들은 마침내 이성계라는 장군을 내세워 왕조를 건설했고 그 ‘이씨조선’은 새로운 동맹 ‘명 제국’의 변화에 발맞춰 전통적인 유교국가를 표방했다. 조선이 유교를 국시로 택한 것은 “개벽이라 할 정도의 창세적 변혁은 아니더라도, 유교사상을 동국의 현실 정치로 구체화하였다는 점에서 독자적이고 각별한 의의를 지니며 이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19면) 이러한 조선의 건국 이념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군주인 세종을 통해 체계적으로 집약되고 발산된다.
왕조 초기의 혼선과 갈등이 수습될 즈음에 왕위에 오른 세종에게 ‘제대로 된 나라만들기’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왕국이 나아갈 방향과 기틀을 다지는 문제가 일차적 과업이었고, 민생을 안정시키면서 유교 문명국을 건립하고 발전시키는 일이 필수의 책무로 제기되었다. 세종의 치열한 삶과 사상은 현대 독자들인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인바, 다만 세종이 품었던 고민의 깊이는 다시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당대 최첨단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것을 한반도의 토양에 맞게 적용하는 일을 반복해내기 위해 고심했다. 백성들의 일상을 돌보는 일에서부터 명과 왜 등에 적절히 응대하는 고도의 외교까지, 세종의 다양한 성과는 후대 군주들이 참고할 지침이 되었다.
“문명의식이라면 보편성을 갖는 것이므로 동인의식과는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양자는 꼭 모순되지 않으며 상보적일 수 있다. 대도의 다인종·다문화를 접하면서 대륙의 동쪽 끝에 붙은 나라의 사람인 나를 의식하게 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 아니겠는가. 그뿐 아니라, 직전에는 몽골-원의 침략에 맞서 장기간 싸울 때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동국사람으로서의 자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17면)

실학군주의 개혁정치: 정조

정조 또한 세종의 통치 사례를 주로 참고했다. 정조가 세운 규장각은 흔히 세종의 집현전에 비견된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실학자들을 자신의 정치적 우군으로 삼고 조선의 실학시대를 직접 이끌어갔다. 그가 추진한 개혁정치 또한 실학에 기반을 두었다. 규장각을 통해 신진 사대부를 양성하면서 당대 척족세력들의 농단이 끼치는 폐해를 줄이고자 한 것이다. 다만 정조의 이 같은 정치적 야망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정조가 공들여 양성한 규장각 출신 관료들은 유교정치의 원형으로서 자기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각자 당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이에 더해 서학(西學)과 서교(西敎)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정국은 혼미해졌고, 정조는 점점 더 고립되어갔다.
여기에 더해 정조는 비운의 삶을 산 사도세자의 친자였다. 이 같은 엄중한 사실 때문에 최고권력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항시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자신의 정통성의 확보가 절실했던 그에게 성리학은 일종의 정치적 보호막이었다. 정확히 말해 정조는 정통성 확보와 진정한 학문 추구를 동시에 이루기 위해 성리학을 배웠고, 그의 실학 또한 성리학을 바탕에 둔 것이었다.
이 같은 정조 사상의 복합성은 서양 세력과 함께 서학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시기에 매우 또렷하게 드러난다. 정조가 왕위에 있는 동안 사대부들은 서학과 천주교를 극도로 위험시했고, 이를 조금이라도 언급하는 정치세력은 극심한 정쟁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는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유교국가의 정신적 기반을 흔드는 사태와 문체가 잘못 흘러가는 추세를 동일한 문제점으로 파악”(38면)했다. 정조는 서양의 학술과 종교를 분명히 구분했다. 다시 말해 그는 서양학술을 도입할 필요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종교는 이단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의 근본을 탐구하며 이를 토대로 서양에 대응해야 한다고 보았다. “사학이 우리 학을 해칠까 걱정하지 말고 오직 우리의 학이 사학을 막아내지 못할까 걱정해야 한다.”(276면) 정조의 통치철학을 이해할 때에 빼놓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북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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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세종,정조

저자:세종
조선제4대왕.1418년6월에왕세자에책봉되었다가8월에태종의양위를받아즉위했고사망할때까지재위했다.유교정치의기반을마련하고,인재를양성하며다양한편찬사업을주도하여정치,경제,사회,문화전반에걸친기틀을잡았다.특히훈민정음을창제해민족의고유문자를만들었고,과학기술,농업,의약분야에서비약적인발전을이끌었다.또한법전을정비하고공법을제정하는등통치체계를세웠으며,국방력강화를통해국토를확장했다.

저자:정조
조선제22대왕.1776년에즉위해사망할때까지재위했다.유폐되어죽임을당한사도세자의친자이기에그의국왕으로서입지는극히불안정했고,정당성확보가눈앞의과제였다.규장각을설치해학술문화를진흥,관료엘리트를양성하여사대부정치를복원하고유교적문명국을실현하는데뜻을두었다.그구상의일환으로수원에신도시를건설한바,기획이가시화되는단계에서세상을떴다.학자로서도탁월한성과를거두어『홍재전서』를남겼다.

엮음:임형택
조선유학과실학,당대동아시아고전을연구하고널리소개해온원로한문학자이자한국학자.성균관대학교한문교육과교수로정년퇴임후같은학교명예교수로있다.저서로『한국문학사의시각』『실사구시의한국학』『문명의식과실학』『동아시아서사와한국소설사론』등이,공편역서로『백호전집』『역주목민심서』『역주매천야록』등이있다.

목차


창비한국사상선간행의말

서문
유교적문명국건설,실학군주의개혁정치

핵심저작

【세종】

1장세종,국왕으로서의기본자세와통치철학
세종의즉위과정│세종의서거,전체적인평가│학문·경연│『치평요람』의편찬│열병·강무행사│애민정신,권농

2장훈민정음창제
『훈민정음』어제서문│최만리등의『훈민정음』반대상소│기타훈민정음관련기록│동국정운』

3장기술문화:인쇄,의약,천문역산과의기,무기,음악
인쇄출판│의약:『향약집성방』│역법과천문의기,시계│무기제작│음악정비

4장국제관계와국방
대중국관계의기본│여진족과의관계│국방:대마도정벌│국방:서북지방│국방:동북지방

5장월인천강지곡
서장│부처님의전생│부처님의탄생

【정조】

1장정조,국왕으로서의기본자세와통치철학
정조의인간과행적에관련된기록들│정조의통치방향과통치철학│무의중시와문신들과의갈등

2장규장각
규장각설치│규장각의운용│규장각문신들과의대화:『일득록』

3장제도개혁:신분제도문제와신해통공
신분제도문제:양반의서자│신분제도문제:노비│신해통공

4장서학과문체의문제
서학에대한논의│문체정책│서학과문체에관련한정조의논리

5장화성신도시
화성건설과정1│화성건설과정2│화성건설의후속사업

6장정조의학문과저술

세종연보
정조연보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유교문명국건설의사명:세종

14세기는한반도뿐아니라세계사적으로도여러격변이일어난대전환기다.원제국이해체되면서유라시아의곳곳에서새로운국가가형성되었고,이는러시아(모스끄바대공국),중앙아시아(티무르제국),서아시아(오스만제국)지역제국들의모태가되었다.그리고유라시아대륙동쪽끝에서는고려에서조선으로왕조교체가일어났다.이같은세계사적전환기에고려에서는문인지식층이당대의변화를면밀히인식하며한반도의체제변화를이끌고있었다.편저자는당시문인지식층이원제국과의교류경험에서한반도가문명의일원임을인식한‘문명의식’을습득한동시에,한반도적정체성이라고할수있는‘동인(東人)의식’을갖고있었다는점에주목한다.그들은마침내이성계라는장군을내세워왕조를건설했고그‘이씨조선’은새로운동맹‘명제국’의변화에발맞춰전통적인유교국가를표방했다.

조선이유교를국시로택한것은“개벽이라할정도의창세적변혁은아니더라도,유교사상을동국의현실정치로구체화하였다는점에서독자적이고각별한의의를지니며이를높이평가할수있다”.(19면)이러한조선의건국이념은조선전기를대표하는군주인세종을통해체계적으로집약되고발산된다.왕조초기의혼선과갈등이수습될즈음에왕위에오른세종에게‘제대로된나라만들기’라는과제가주어졌다.왕국이나아갈방향과기틀을다지는문제가일차적과업이었고,민생을안정시키면서유교문명국을건립하고발전시키는일이필수의책무로제기되었다.세종의치열한삶과사상은현대독자들인우리에게익숙한내용인바,다만세종이품었던고민의깊이는다시금곱씹어볼필요가있다.그는당대최첨단문명을적극적으로받아들임과동시에그것을한반도의토양에맞게적용하는일을반복해내기위해고심했다.

백성들의일상을돌보는일에서부터명과왜등에적절히응대하는고도의외교까지,세종의다양한성과는후대군주들이참고할지침이되었다.“문명의식이라면보편성을갖는것이므로동인의식과는모순되는것처럼여겨지기도한다.그러나양자는꼭모순되지않으며상보적일수있다.대도의다인종·다문화를접하면서대륙의동쪽끝에붙은나라의사람인나를의식하게되는것은극히자연스런현상아니겠는가.그뿐아니라,직전에는몽골-원의침략에맞서장기간싸울때지키지않으면안되는동국사람으로서의자아를의식하지않을수없었을터다.”(17면)

실학군주의개혁정치:정조

정조또한세종의통치사례를주로참고했다.정조가세운규장각은흔히세종의집현전에비견된다.그는당대최고의실학자들을자신의정치적우군으로삼고조선의실학시대를직접이끌어갔다.그가추진한개혁정치또한실학에기반을두었다.규장각을통해신진사대부를양성하면서당대척족세력들의농단이끼치는폐해를줄이고자한것이다.다만정조의이같은정치적야망은성공을거두지못했다.정조가공들여양성한규장각출신관료들은유교정치의원형으로서자기정체성을찾지못하고각자당쟁의소용돌이에빠져들었다.이에더해서학(西學)과서교(西敎)의문제가대두되면서정국은혼미해졌고,정조는점점더고립되어갔다.

여기에더해정조는비운의삶을산사도세자의친자였다.이같은엄중한사실때문에최고권력자의위치에있으면서도항시불안하고위태로웠다.자신의정통성의확보가절실했던그에게성리학은일종의정치적보호막이었다.정확히말해정조는정통성확보와진정한학문추구를동시에이루기위해성리학을배웠고,그의실학또한성리학을바탕에둔것이었다.

이같은정조사상의복합성은서양세력과함께서학이한반도에들어오는시기에매우또렷하게드러난다.정조가왕위에있는동안사대부들은서학과천주교를극도로위험시했고,이를조금이라도언급하는정치세력은극심한정쟁을감수해야했다.이런상황에서정조는“천주교가이땅에들어와서유교국가의정신적기반을흔드는사태와문체가잘못흘러가는추세를동일한문제점으로파악”(38면)했다.정조는서양의학술과종교를분명히구분했다.다시말해그는서양학술을도입할필요를인정하면서동시에그종교는이단시했다.그렇기때문에유학의근본을탐구하며이를토대로서양에대응해야한다고보았다.“사학이우리학을해칠까걱정하지말고오직우리의학이사학을막아내지못할까걱정해야한다.”(276면)정조의통치철학을이해할때에빼놓지말아야할대목이다.

문명의식과동인의식,여전히우리에게유효한자기인식의틀

세종과정조는각각“조선왕국을유교적문명국가로확립한군주”,“유교적문명국을재건하기위해고투한군주”로서왕조국가의정통성과정당성을확보하고자노력했다.이같은정치관념은그들의치세기간에평안을가져다주었을뿐아니라후대의국가운영에도많은것을시사했다.문명의식과동인의식은여전히2020년대한반도현실에영향을미치고있으며,시민들각자는세계인으로서의보편적시야와한국인으로서의개성을동시에갖출것을요청받고있다.이때에다시읽는세종과정조의통치철학은그들각자의사상적고투덕택에여전히생생한교훈을전한다.

문명전환의과제에서세계적보편성을획득하고자하는
창비한국사상선의도전적기획

지구기후와자본주의가불가분의위기를맞닥뜨리고각종갈등이팽배한지금이시대에우리가떠맡은과제는결코가볍거나단순하지않다.백낙청(서울대명예교수)을필두로하는창비한국사상선간행위원회는이모든위기를돌파하기위해수행해야할과제를다음과같이말한다.

‘전환’이라는강력하게실천적인과제는우리모두에게다른삶의전망과지침이필요하며,전망과지침으로살아작동할사상이절실함을뜻한다.그런사상을향한다급하고간절한요청에공명하려는기획으로서,창비한국사상선은한국사상이라는분야를요령있게소개하거나새롭게정비하는평시적작업을넘어어떤비상한대책이기를열망하며구상되었다.(「창비한국사상선간행의말」에서)

서구사상은오랜시간세계지성계에서압도적발언권을유지하는한편오늘날의위기에대해서도이런저런대응을내놓고있다.그럼에도그강력한위상의이면에강고한배타성과편견이작동하고있음은이제주지의사실이다.사상적인면에서도서구가가진위상은돌이킬수없이상대화되었고보편의자리는진실로대안에값하는사상들의분투에열려있다.이시점이야말로유·불·선의회통이라는특유의사상적기획이나최제우,박중빈의개벽사상등으로한국사상이전지구적과제를향해독자적인목소리를보태기에더없이적절한때일것이다.

세종과정조를포함하는창비한국사상선사상가들의사유에는역사와현실을탐문하며새로운삶의보편적전망을구현하려한강인한실천성,그리고사회를변혁하는일과개개인의마음을닦는일이진리를향한단일한도정에있다는깨달음이깊이새겨져있다.한반도의경험과지혜가응축된사상적활력을드러내는창비한국사상선이문명전환의개벽적인사유와실천의지평을열어가는데의미있는밑거름이되기를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