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성역 백 주년 기념판) - 믿음의 글들 387

주기철 :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성역 백 주년 기념판) - 믿음의 글들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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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주기철 연구 사상 처음
주기철 목사가 직접 말하고 쓰고 전한
원사료들을 찾아내 본연의 주기철을 조명하다

감리교 신학자이자
한국 교회사 연구 전문학자 이덕주 교수가
오랜 각고의 노력으로 빚은 노작(勞作)!

주기철 목사 성역 100주년,
서거 4월 21일 기념
기독교 역사학자 이덕주 교수는 지금까지의 주기철 연구들이 기자에 의해 현장에서 메모하여 복원된 설교문을 근거하여 이루어져 온 사실을 알고, 순교 전 간행된 신문과 잡지들을 찾아내 총 19편의 원사료들을 발견했다. 이 설교 원문들과 비교해 기존 설교들을 보니 일부 또는 결론이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기자에 의해 복원된 설교문은 강한 순교자적 이미지가 의도적으로 부각된 주기철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원사료들에서 읽은 주기철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별을 슬퍼했던 평범한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다만 그 길을 가는 그에게는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고, 그분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한 결론이 십자가 순교의 길이었다. 주기철 목사가 감옥 안에서 그 혹독한 고문을 견딘 것은 그의 강한 체력이나 불굴의 의지가 아니라 그와 함께하신 그리스도, 그 사랑의 힘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간이 못할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십자가를 지려고만 하면 십자가가 인간을 지고 간다. 그래서 갈보리 산상까지 갈 수가 있는 것이다.”
- 주 목사가 두 번째 검속을 당해 6개월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후 산정현교회 교인들에게 남긴 말
저자

이덕주

감리교신학대학교역사신학교수로한국교회사와아시아교회사를강의하였고,2018년정년은퇴하였다.은퇴후성경쓰기와걷기묵상에많은시간을보내며,부탁받은강연과글쓰기에임하고있다.그가홍성사에서낸책으로는《한국교회처음이야기》,《한국교회처음여성들》,《기독교사회주의산책》,《선교강국,한국선교긴급점검》(공저),《이덕주의산상팔복이야기》등이있다.

목차

들머리
주기철목사전기를다시쓰기까지

[1]고향을떠나목사가되다
1.1고향웅천,기독교신앙과민족의식의요람
1.2정주오산학교와서울연희전문학교유학
1.3목회소명과평양장로회신학교입학
1.4목사안수와부산초량교회처녀목회
1.5순종목회와‘열린’목회신학

[2]말씀에실린목사의권위
2.1마산교회부임과회복목회
2.2경남노회장피선과엄격한치리
2.3명설교가(1):“조선민족을구원하자”
2.4명설교가(2):“죽을준비를잘하자”
2.5명설교가(3):“목사라면목사답게”

[3]‘조선의예루살렘’평양을향하여
3.1평양산정현교회부임
3.2산정현교회예배당건축
3.3총회새벽기도회인도:“십자가의길로가자”
3.4총독부의황민화정책과신사참배문제
3.5평양노회부노회장취임과수난의시작

[4]십자가고난의길
4.11차검속과도미타간담회
4.2반역의길:노회와총회의신사참배결의
4.3농우회사건과2차검속
4.4‘승리한성도’의평양귀환
4.5고독한싸움
4.6타협거부와3차검속

[5]신사참배반대운동신앙인들의연대와투쟁
5.1산정현교회의투쟁과시련
5.2평양노회의주기철목사파면
5.3산정현교회폐쇄
5.4지하교회신도들의저항운동
5.5신사참배반대운동가들의평양회합
5.6신사참배반대운동지도자일제검거

[6]말세에‘바른신앙’지키기
6.14차마지막검속
6.2선교사강제추방과만국부인기도회사건
6.3총회지도부의‘친일협력’
6.4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조직
6.5한국교회의자존심,‘옥중성도’

[7]어린양의신부,순교의영광
7.1옥중성도들의신앙투쟁
7.2옥중전도,옥중목회
7.3순교의해,1944년
7.4마침내순교,‘하나님의축복’
7.5순교,그이후
7.6남은가족,남은고난

부록
주기철연보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그리스도를향한뜨거운사랑으로
그분이원하는길을가기위해노력한결론

‘사랑의순교자’로
백년의주기철을다시쓰다

올해주기철목사성역100주년을맞이하여20년전에출간되었던첫책을새롭게전면개편하여출간하게되었다.이전책에서주력했던사료비평과선행연구에대한비평을빼고,그사이새로발견된자료특히총독부나일본정부에서간행했던비밀보고서나일반언론지에실렸던관련기사들을참조하여내용을보완하였다.그리고주기철목사의‘생생한목소리’를듣기원하는독자들을위해그가생전에신문이나잡지에발표했던원사료들의일부를본문에인용하였다.독자들은이책에서각색되지않은주기철목사를만날수있다.

주기철목사목회약력
주기철목사는1923년봄평양장로회신학교재학시절경남노회양산읍교회조사로목회를시작하였다.1925년12월경남노회에서목사안수를받고부산초량교회,마산문창교회당회장을역임하였고1932-33년경남노회장으로사역했다.1936년7월평양산정현교회당회장으로취임하여예배당을신축했고1937-38년평양노회부노회장에선임되었으나신사참배반대입장을굽히지않아평양경찰서에구금된상태에서1940년3월평양노회로부터목사직제명처분을받았다.가족까지목사사택에서쫓겨난상태에서주기철목사는홀로외롭게투쟁하다가1944년4월21일평양형무소병감에서순교하였다.

책속에서

“주기철은나와똑같은성정을가진평범한인간이었다.죽음을두려워했고이별을슬퍼했다.다만그에게는그리스도에대한‘뜨거운’사랑이있었고그때문에주변사람들이신앙을포기하고훼절의길을갈때차마사랑하는그분을배반할수없어그분이원하는길을가기위해노력했고,그분이그런그를도왔다.그결과는그분처럼십자가순교였다.태어날때부터순교와완덕을이룰인물로점지된자는없다.모두부족한인간일뿐이다.다만매순간그리스도를향한마음으로그분의뒤를따르려는의지만갖고노력하면순교자도되고완덕성인도될수있는것이다.순교나완덕은신실하게살기위해노력한신앙인들에게주어진선물일뿐이다.”_pp.18-19

주기철목사는목회를‘전쟁’으로보았다.목회자가교회에서치러야할전쟁은육적인것이아니라영적인것이며세상을향한것이라기보다자신을향한것이다.‘교인죽이기’가아니라‘자기죽이기’로목회하라는충고였다.그런의미에서“죽을힘을다하라”는그의말은“끝까지죽어라”는말로바꾸어읽어야한다.“목회자가죽어야교회가산다”는말이나바울의“나는날마다죽노라”(고전15:31)했던고백이그러했다.주기철목사에게목회는‘육을죽여영을살리는’죽음체험의연속이었다.주기철목사는이런설교와권면을한2년후신사참배로인한고난과죽음이앞서기다리는평양으로목회지를옮겼다._pp.100-101

주기철목사는설교제목을‘뜨거운사랑’이란뜻의“열애”(熱愛)로붙였다.‘하나님을사랑하되뜨겁게사랑하자’는뜻이었다.그러면서성경에서그‘뜨거운사랑’의증거들을찾았다.모세율법의핵심인신명기와다윗의시편이대표적이었다.주기철목사는구약후반부의예언서도그런‘하나님열애’의기록이었음을지적한후가장하나님을열애한주인공으로예수그리스도를꼽았다._p.192

주기철목사는“신사참배는국가의식이고종교의식이아니다”는총독부논리로교인들을설득하려는교회지도자와목회자들을향해‘모독배’(冒瀆輩)란칭호를쓰며경고하였다.그런그의설교를듣는교인들은‘맹인된인도자’,‘회칠한무덤’,‘독사의새끼들’이란칭호를써가며종교지도자였던서기관과바리새인들을책망하셨던예수그리스도의모습을떠올렸을것이다(마23:15-36).주기철목사는신사참배문제에관한한그어떤타협도,양보도거부하였다._p.226

고문과악형으로이어지는,언제끝날지모르는고난의시간속에서“죽음은차라리축복”이라는생각을갖게된것은당연했다.이들은타협해서살기보다는신앙양심을지키다죽음으로하나님과자신에게부끄럽지않는삶을보여주기를소원했다.한상동목사만이아니었다.형무소안의‘옥중성도’들은모두‘죽음을향한열정’을갖고있었다.‘주를위해죽기’를원하는이들에게죽음은감사함으로거쳐야할통과의례였다.그들에게죽음은피할두려움이아니라기다리는은혜였다._p.366

주영진전도사도아버지의뒤를따라‘순교의길’을갔다.그는주기철목사로부터부와명예,안락대신가난과고난목회,그리고순교를세습(世襲)하였다.주영진전도사가족의고난은가장의죽음으로끝나지않았다.주영진전도사유가족은월남하지않고긴재교회사택에머물러살았다.한국전쟁이터지고1950년10월평양수복때긴재교회출신최병문장로가긴재교회를찾아갔을때그는주영진전도사부인이두아이와시할머니(주기철목사의어머니)를모시고어려운살림을살고있는것을목격하였다.다시오랜세월이흐른후주광조장로는일본을통해입수한자료를통해“주영진전도사의아내김덕성역시‘당과정부정책과반국가적선전행위를감행’한혐의로1970년10월26일체포되어1971년1월15일처형되었다”는사실을확인하였다.그렇게해서대를이은목회자부부의십자가사랑,‘순교역정’(殉敎歷程)이야기는완성되었다._pp.390-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