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버포스 - 믿음의 글들 395

윌버포스 - 믿음의 글들 395

$24.00
Description
tvN 〈벌거벗은 세계사〉 윤영휘 교수 신작!

19세기 영국 노예무역 폐지 운동이
21세기 한국 정치·사회에 던지는 질문

정치가의 사명은 무엇인가
1787년 5월 22일 12명의 신사들이 런던에 모여 역사상 처음 노예무역 폐지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노예들의 권리를 위해 법정에서 싸웠던 그렌빌 샤프, 클락슨 같은 국교도 복음주의자가 주요 멤버였던 이 위원회가 설립된 후, 영국에서는 반노예제 감정이 빠르게 대중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이 가장 먼저 논의한 일은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의회로 가져가 과업을 이뤄 낼 인물을 찾는 것이었다. 그들이 선택한 인물은 28세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였다.
노예무역의 시작은 위원회 설립보다 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62년 존 호킨스(1532-1595)라는 해적이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스페인 선박을 약탈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항해를 떠났고, 몇 달 간의 항해 끝에 도달한 곳은 아프리카 서해안의 시에라리온이었다. 호킨스가 선택한 교역품은 300여 명의 흑인 노예였고, 이들을 태운 호킨스는 1563년 생도맹그(지금의 아이티)에 도달하여 백인 농장주들에게 노예를 판매한 돈으로 설탕, 진주, 모피 등을 구매하며 이 거래로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 호킨스의 항해 이후 영국인들이 노예무역에 가담했고, 약 1세기 동안 노예는 상아, 금, 향신료, 인디고 등과 더불어 아프리카 해안의 여러 교역 품목 중 하나로 거래되다가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가 새롭게 재배되면서 가장 큰 비중의 교역품이 되었다. 당시 흑인노예들이 겪은 참상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을 태운 노예선은 바다 위를 떠다니는 무덤과도 같았다. 되도록 많은 노예를 실어 이익을 높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중간 항로에서 숨지는 노예들을 감안하여 과적을 하여 실었다. 좁은 선실은 질병이 쉽게 확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온종일 노예들을 묶어 놓았고, 화장실은 존재하지 않아 누운 채로 생리 현상을 해결해야 했으며 지독한 악취가 진동하였다. 노예들을 통제하기 위해 온갖 속박 도구들을 활용한 폭력이 가해졌다.

지옥 같은 노예선의 상황을 견디지 못해 일부 노예들은 음식을 거부하고 죽기를 택했지만, 선원들은 내버려두지 않았다.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가 의회에서 폭로한 증거들에 따르면 선원들은 음식을 거부한 노예의 입을 강제로 벌리려 했고, 안 되면 이를 부러뜨리고 음식을 부었으며, ‘스페큘럼 오리스’(억지로 음식을 입에 넣는 기구)를 이용해서 강제로 입을 벌리고 음식을 쑤셔 넣었다. 노예선은 그야말로 떠다니는 무덤이었고 어느 정도의 비율로 사람이 죽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거리였다. (…) 어떤 계산을 따르더라도 최소 200만 명 이상의 생명이 대서양 한가운데서 사라졌다. _1장. 서막: 노예무역의 그림자

저자

윤영휘

저자:윤영휘
연세대학교법과대학을졸업하고서울대학교대학원서양사학과에서석사학위를받았으며영국워릭대학교사학과에서철학박사학위를취득하였다.육군사관학교사학과전임강사,서울대학교역사연구소선임연구원,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선임연구원을역임했다.영국케임브리지대학교클레어홀종신회원이며,경북대학교사학과교수로재직중이다.
18세기대서양복음주의네트워크에관련된연구로미국교회사학회(AmericanSocietyofChurchHistory)에서수여하는시드니미드상(SidneyE.MeadPrize,2012)을,존웨슬리의반노예제관련기록에관한연구로제7회역사학회우수논문상(2018)을수상하였다.
영국의기독교정치,노예무역,도덕자본,군사문제에관심을가지고연구를진행하고있으며,이와관련된주제로〈ChurchHistory〉,〈역사학보〉,〈서양사론〉,〈영국연구〉등국내외학술저널에다수의논문을발표하였다.
《혁명의시대와그리스도교》(홍성사),《역사학의역사》(아카넷,공저),《시나리오한반도》(쌤앤파커스,공저),《벌거벗은세계사》(경제편,인물편,전쟁편,권력자편)(교보문고,공저)등을썼고,《세계사I》,《세계사II》(까치),《국가와기억》(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등을번역했다.

목차

프롤로그

1.서막:노예무역의그림자1562-1759
2.헐에서웨스트민스터까지1759-1784
3.마음을돌리다1784-1786
4.정치를하는이유1787-1789
5.험난한시작1789-1792
6.영국기독교의현실과이상1787-1797
7.국왕의포고문1787-19세기초
8.클래팜공동체:변화를위한연대1797-1808
9.클래팜의유산1797-19세기초
10.프랑스혁명의격랑속으로1792-1794
11.인내의시간1794-1799
12.승리를향해1800-1807
13.윌버포스신드롬1807-1812
14.대서양을자유롭게하다1812-19세기중반
15.사슬을끊다:노예제도의폐지1818-1833


주요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tvN〈벌거벗은세계사〉윤영휘교수신작!

19세기영국노예무역폐지운동이
21세기한국정치·사회에던지는질문

정치가의사명은무엇인가

1787년5월22일12명의신사들이런던에모여역사상처음노예무역폐지위원회가설립되었다.노예들의권리를위해법정에서싸웠던그렌빌샤프,클락슨같은국교도복음주의자가주요멤버였던이위원회가설립된후,영국에서는반노예제감정이빠르게대중정치운동으로발전하였다.이들이가장먼저논의한일은노예무역폐지법안을의회로가져가과업을이뤄낼인물을찾는것이었다.그들이선택한인물은28세하원의원윌리엄윌버포스(WilliamWilberforce,1759-1833)였다.
노예무역의시작은위원회설립보다200여년전으로거슬러올라간다.1562년존호킨스(1532-1595)라는해적이엘리자베스1세로부터스페인선박을약탈해도좋다는허가를받고항해를떠났고,몇달간의항해끝에도달한곳은아프리카서해안의시에라리온이었다.호킨스가선택한교역품은300여명의흑인노예였고,이들을태운호킨스는1563년생도맹그(지금의아이티)에도달하여백인농장주들에게노예를판매한돈으로설탕,진주,모피등을구매하며이거래로상당한이익을남겼다.호킨스의항해이후영국인들이노예무역에가담했고,약1세기동안노예는상아,금,향신료,인디고등과더불어아프리카해안의여러교역품목중하나로거래되다가서인도제도에서사탕수수가새롭게재배되면서가장큰비중의교역품이되었다.당시흑인노예들이겪은참상은끔찍하기이를데없다.그들을태운노예선은바다위를떠다니는무덤과도같았다.되도록많은노예를실어이익을높이기위해서뿐만아니라중간항로에서숨지는노예들을감안하여과적을하여실었다.좁은선실은질병이쉽게확산될수밖에없는구조였다.온종일노예들을묶어놓았고,화장실은존재하지않아누운채로생리현상을해결해야했으며지독한악취가진동하였다.노예들을통제하기위해온갖속박도구들을활용한폭력이가해졌다.

지옥같은노예선의상황을견디지못해일부노예들은음식을거부하고죽기를택했지만,선원들은내버려두지않았다.하원의원윌리엄윌버포스가의회에서폭로한증거들에따르면선원들은음식을거부한노예의입을강제로벌리려했고,안되면이를부러뜨리고음식을부었으며,‘스페큘럼오리스’(억지로음식을입에넣는기구)를이용해서강제로입을벌리고음식을쑤셔넣었다.노예선은그야말로떠다니는무덤이었고어느정도의비율로사람이죽었는지는학자들사이에오랜논쟁거리였다.(…)어떤계산을따르더라도최소200만명이상의생명이대서양한가운데서사라졌다._1장.서막:노예무역의그림자

윌리엄윌버포스라는'한사람의입법기관'이
수십년간대중과국회의지지를얻기까지싸운끈질긴인내의기록

윌버포스는어린시절삼촌부부에게맡겨지며그들의신앙을따라조지휫필드와존웨슬리등감리교의영향을받았다.대학에진학하며잠시신앙의궤도에서벗어나기도했지만,하원의원으로지내며스승이던아이작밀너와의여행중에회심을경험하게된다.기독교신앙을바탕으로한그의윤리적신념은노예무역폐지운동이라는정치적사명에불을지폈다.그리고수십년에걸쳐‘한사람의입법기관’으로서소명을다하기까지‘클래팜’이라는공동체를통한연대가지원군이되어주었다.노예무역폐지법안이통과되기까지일평생좌절을거듭하고오해와비방들을견뎌야했지만,국가의명예를지키고인간본연의가치를회복하기위한그의소명을꺾을수는없었다.마침내1807년(처음노예무역폐지위원회가설립되고20년후)법안이통과되어노예무역은영제국전역에서폐지되었다.다시26년후1833년에는윌버포스가죽은뒤노예제가폐지되었다.
영국의노예무역폐지운동이21세기한국정치.사회에던지는시사점은무엇일까?이책의서브제목(Statesman,정치가의길)이그방향을내포하고있다.윌버포스는18세기말부터19세기초에걸쳐몇몇악습개혁폐지를넘어영국사회시스템의질적성숙을목표로개혁을시도했다.그가주도한반노예제운동은사회전반에걸친영국인의가치관의변화를형성하여경제적이익을상당부분포기하면서도노예해방을위한국가적결단을이끌어내었다.이에저자윤영휘교수는윌버포스를가리켜‘조용한혁명’을수행한정치인이라표현한다.윤영휘교수는오래전클래팜파의관습개혁을다루는연구를서울대학교에서시작한이래윌버포스에대한연구를꾸준히진행해왔다.특히최근윌버포스가젊은시절보냈던케임브리지대학에객원펠로우로초빙을받아1년의연구년을보내며윌버포스를추적한흔적들을이책에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