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관조 씻기기 - 민음의 시 189 (양장)

구관조 씻기기 - 민음의 시 189 (양장)

$12.00
Description
황홀하면서도 슬픈 백색 감성!
황인찬 시인의 첫 번째 시집 『구관조 씻기기』. 2010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한 이후 ‘는’ 동인으로 활동하며 자신만의 시세계를 펼쳐온 저자의 이번 시집은 제31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천성에 가까운 순수한 미감을 지닌 저자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전위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세대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저자가 전하는 54편의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애초에 어떤 감정의 변화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듯 고요한 시편을 선보인다. 인간 중심적인 관점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감정으로 대상을 드러내기보다 사물의 사물성과 순수성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보존하려는, 김춘추로 시작된 한국 시의 오래된 반인간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적 주체를 만나볼 수 있다. 성스러움, 신비감, 고요함을 끌어안은 표제시 ‘구관조 씻기기’부터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여름 이후’, ‘개종’, ‘거주자’, ‘저수지의 어둠’ 등의 시편이 수록되어 있다.
수상내역
- 2012년 제31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개종

누군가 문을 두드렸기에 나는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의 안쪽에는 나와 기원이 있었다
나는 기원을 바라보며 혹시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지 물었다
기원은 내게 잘못된 일은 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올여름의 아름다운 일들을 생각했다
아무런 일도 생각나지 않았다
뜨거운 빛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저자

황인찬

1988년경기도안양에서태어났다.시를이용해무슨일을할수있을지자주고민한다.시를통해타인과깊게만날수있기를소망하며매일시를쓰고읽는다.2010년[현대문학]으로등단했다.시집으로『구관조씻기기』『희지의세계』『사랑을위한되풀이』등이있다.김수영문학상,현대문학상등을수상했다.

문학이란잘대화하는일이라믿고있습니다.문학을통해더나은사람이될수있기를...

목차


1부

건조과
구관조씻기기
단하나의백자가있는방
듀얼타임
순례
캐치볼
유체
서클라인
여름이후
낮은목소리
목조건물
X
개종

2부
개종2
면역
거주자
항구
파수대
구조
구획
발화
돌이되어
저수지의어둠
물의에튜드
소용돌이치는부분
독개구리
나의한국어선생님
연인-개종3
번식
너와함께
축성

3부
모두잘되어가고있다
식생
장막의뒤에서자꾸
구원
방사
기념사진
레코더
말종
의자
얼룩-개종4
그것
법원
점멸
입장
속도전
예언자
서울대공원
엔드게임
유독
개종5

4부
혼자서본영화
세컨드커밍
히스테리아
무화과숲

작품해설/박상수
서글픈백자의눈부심

출판사 서평

■김춘수에서시작된반인간주의전통계승

황인찬시를말할때빠지지않는단어가바로성스러움,신비감,고요함이다.황인찬의시는무엇보다고요하다.애초에어떤감정의변화도경험해본적없다는듯황인찬의시적주체들은격앙되는법이없고크게절망하거나한탄하는일도없다.그저지켜보는것으로제할일을다했다는듯,담담하게대상을바라볼뿐이다.이는존재를있는그대로받아들이기위한거리두기로해석되고는한다.인간중심적인관점이나대상을바라보는주체의감정으로대상을드러내는대신사물의사물성과순수성을침범하지않으면서보존하려는,김춘수로부터시작된한국시의오래된반인간주의의전통을계승하는것처럼보인다는것이다.이러한고요함에서발생하는공백은시간을정지시키고소음을지우며사방으로번져나가고,그와대상이만나는곳은정적에둘러싸여이상하고신비로운세계로변한다.이렇게만들어진공백속에는대상을쉽게규정하거나침범하지않으려는품격과배려,예의가있다.등단작「단하나의백자가있는방」은지긋한바라봄끝에‘백자’가우리마음속에서하나의순결한이미지로깊은울림을남기며은은하게빛나게되는과정을잘보여준다.

조명도없고,울림도없는
방이었다
이곳에단하나의백자가있다는것을
비로소나는알았다
(……)

나는단하나의질문을쥐고
서있었다
백자는대답하지않았다

수많은여름이지나갔는데
나는그것들에대고백자라고말했다
모든것이여전했다

(……)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사라지게되면서
믿을수없는일은
여전히백자로남아있는그
마음

여름이지나가면서
나는사라졌다
빛나는것처럼빛을빨아들이는것처럼
―「단하나의백자가있는방」에서
이시를통해우리는말로표현할수없는이상한성스러움에사로잡히게된다.시인이가장사랑하는사람을대하듯섬세하게대상을지키기때문이다.인간의역사안에서유한하고깨지기쉬운사물들은황인찬의시안에서초역사적이고초자연적인사물로오래보존된다.

■시대의가장강력한항체가내포된시

그의시적주체는아무런행동도하지않고무조건성스러운대상을발견하여지켜보는것처럼보이지만그렇지않기에더욱특별하다.오히려아주세련된방식으로,그러나너무나도온화하면서도관능적으로그는신의형상을이땅에구현해낸다.말하자면황인찬의시는표면은고요하나심층은역동적인시다.가령“계절이란말보다계절감이라는말이좋듯”이(「유체」)실체를만질수는없지만실체를생각하고바라보는것만으로그는이미실체를감각한것처럼대상과연결된다.그의시가의외로촉촉하고감각적인이유다.실체보다는실체를가리키는언어에서더욱예민하게에로스를탐지하는사람.백자의내부는텅비어있지만그는이미‘백자’라는말을통해백자를감각하고있으며여름의내부가텅비어있지만이미그는여름을자신의육체속에서눈부시게되산다.그는멀리있는신성을누구보다예민하게,게다가관능적으로감각하는존재이기도하면서그신성을자신의육체를통과시켜적극적으로구현해내는‘감각의전도사’이기도하다.

비가내리고있었다도처에서젖은풀이생기를내뿜고있었다그게너무생생해서
실감이나질않았다

여중생들이비를맞고신났다이또한실감이나지않았다
달리는차들과그것들이튀기는물과깜빡이는불빛의긴꼬리가
느껴지지않았다

지하로돌아가고싶었다거기에두고온것이있었다거기엔물이이미차있었고,
알지못하는사이에계절이흘렀다

비가계속내렸다비를실감할수없었다
물에비친검은머리카락영혼들이내게손짓했다

계절감이란말이좋았다계절이란말보다

몸이자주부었다

-「유체」

인간의여하한관념에도침범당하지않은순백의신성을보존하겠다는듯이그는사물과행위의인간주의적인때를지운다.이로써그의시는일상을소재로삼고있지만일상을뛰어넘고무한한해석의심층과숨골을품게된다.이대목에서우리는황인찬의시가시대의가장강력한항체역할을할가능성을내포하고있음을알수있다.지금이시대는무언가를할수있는자유는있지만하지않을자유는없다.이런맥락에서황인찬의시가더소중해진다.

■신성한전도사,백색의간달프

신성의발견과구현이라는심층의정신작용을펼치기는하지만그것은성공보다실패에이를때가많다.감각이발달한사람이라면쉽게눈치채겠지만실상이시집에서빛을되살려내는아름다운시편들은1부에집중되어있을뿐나머지2,3,4부는오히려회색이나검은색에가깝다.

누군가문을두드렸기에나는문을열었다
문밖에는아무도없었다
문의안쪽에는나와기원이있었다
나는기원을바라보며혹시무언가잘못된것이있는지물었다
기원은내게잘못된일은없다고말해주었다
그렇다면다행이다
나는그렇게생각하며올여름의아름다운일들을생각했다
아무런일도생각나지않았다
뜨거운빛이열린문을통해들어오고있었다
무더운여름이었다
-「개종」

이것이백색의시라면끝내빛의구현에실패한자들의은밀한고통.신성의구현에내재한회복할수없는균열.마침내도달한파국의심연을보여주는다음은회색혹은검은색시다.

혼자집에앉아서물을마셨다
한번마시면
멈출수없었다

(……)

아무도없는집이심심했다말걸어주는사람도없고
살아있는사람도없었다
-「물의에튜드」에서

황인찬이실패에대해말할때,그것은‘나는과연살아있는것일까?’라는근본적인질문을불러일으키는불안의계기로작동한다.황인찬의시가아름다우면서서글픈이유가바로여기에있다.이렇게사물과만나지못하는삶이계속되다보니역설적으로그는비실체적이고비현실적인격리감이지속되어도무지자신이살아있는것인지죽어있는것인지를실감하지못하는이상한감각의상태로만자기삶을자각하는상태에이른다.비극이다.해결할수없는파탄이다.그가신성의전도사이자백색의간달프로서치루어야할혹독한대가다.그의시에서자주이상한내면의목소리가튀어나올때우리는바로이처연한불행을느낀다.
황인찬은그저바라본다.투명하고담담하게계속바라본다.자신의손이닿는과일마다썩어있음을발견했던「원정(園丁)」의김종삼처럼,마치손을뻗기만하면죄를짓게될것임을예감하는사람이라니.시적주체는도저한죄의식에사로잡혀아무것도하지않는다.행동의모든것이죄와연결되는프로세스를지닌사람에게가장행복한순간은차라리아무것도하지않는순간이아닐까.세상에이런사람도있을까.있다.그가바로황인찬이다.슬픔이장막처럼드리워있는‘무위’의시,더럽혀진자신을발견하고꾹꾹울음을눌러참는자의비감이서려있는시,무의미한중립성을견지하는듯하지만깊은정서적울림을동반하는지극히세련되면서도전위적인시.인간의옷을입고속세를살아가는백색의기사,황인찬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