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상설 공연 - 민음의 시 288 (양장)

여름 상설 공연 - 민음의 시 288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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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징검다리 같은 슬픔을 건너며,
요괴와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꿈
박은지 시인의 첫 시집 『여름 상설 공연』이 민음의 시 288번으로 출간되었다. 박은지 시인은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간결하고 명징한 언어로 여기와 저기, 현실과 환상이라는 대립되는 두 세계를 오가며 “균형 잡힌 사유와 감각을 보여 주는” 시라는 평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박은지 시인은 데뷔 소감에서 “발밑이 무너지거나, 흩어진 나를 찾아 이리저리 뛰거나, 가만히 울면서 오늘을 보낼 때”마다 시의 힘을 빌렸다고 말했다. 박은지의 시는 낭떠러지 끝에 선 듯한 현실 인식으로부터 촉발되는 듯 보이지만, 시에서 드러난 현실은 단지 무력함과 공포만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그러므로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중의 노력이 필요하다. 현실에 의해 자신이 망가지지 않아야 하고, 현실을 망가뜨리지도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 사실로부터 땅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먼 곳’을 향하는 박은지의 시적 환상이 펼쳐진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매일같이 펼쳐지는 환상의 무대를 약속하는 제목 ‘여름 상설 공연’은 현실과 환상의 팽팽한 공존을 예감하게 한다. 박은지의 시에서 환상은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 아닌, 바로 여기에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는 환상이다. 환상적인 세계의 시작과 끝, 시도와 실패를 매일같이 반복할 것을 약속한다. 박은지 시인은 이 약속을 함께하자고 손을 내민다. 벗어날 수 없는 곳에서 가장 먼 곳을, 매일 실패하는 곳에서 가장 불가능한 것을 함께 꿈꿔 보자고.
저자

박은지

1985년서울에서태어났다.2018년[서울신문]신춘문예로등단했다.새롭게탄생할죄에대하여도용서를구하오니.저서로『대답대신비밀을꺼냈다』,『여름상설공연』등이있다.

목차

1부창밖엔꽃눈
내가꾸고싶었던꿈13
횡단열차14
몽타주16
그렇게여름18
밤을건너는손바닥20
짝꿍의자랑23
눈을뜰수있다면26
창밖이푸른곳28
짝꿍의모래30
짝꿍의이름33
아끼는비밀36
작은물결38
하염없이긴계단40
공동주택42

2부두손은한줌의재
녹지않는눈45
의자들47
계단과물50
주말상설공연52
생존수영54
반듯한사랑56
구름위에서달을볼때58
옥탑에게61
산비둘기찾아와둥지를틀고64
가족일기66
공유지68
텐트앞에서70
새로산공책72
쓴적없는일기75
뜸하게,오늘77

3부봄의끝에서펄럭이는
정말먼곳81
언제나처럼작고텅빈83
검정몰래84
예고편86
죽은나무들88
점,선,면90
쉬운일92
서로를볼수없는곳에앉아같은소리를들었다94
비를쏟아낸얼굴96
거울을보니검은개가98
선명한기준100
계약직102
녹음의기원104
()에게105
잠의방향112
가족일기프리퀄114
기념촬영116
빈118
이별일기120
보리감자토마토122
못다한말124

작품해설125
꿈과돌의시_김보경(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낭떠러지의꿈

낭떠러지의꿈은이어지고
짝꿍은종일낭떠러지아래서이름을주웠다
봄꽃을닮은이름,달리기를좋아하는이름,잘웃는이름
주워도주워도주워지지않는이름을붙들고엉엉울었다
잠에서깨면그이름을잊는다고엉엉울었다
―「짝꿍의이름」에서

박은지의시에서진실은침묵하는사람들의표정뒤로감춰진다.러시안룰렛을가르치는선생님은게임의룰을알려주는대신“넌이렇게이해가한박자늦다”(「죽은나무들」)며다그치고,예언자는“너는더착해질수있을거야”(「쓴적없는일기」)라고말하며화자의두눈과두귀를가릴뿐이다.낭떠러지가많은마을에사는아이에게낭떠러지가위험하다고말해주는이도없다.아무도진실을알려주지않기에인물들은짐작에몰두하고,짐작은꿈으로번진다.박은지의인물들은그렇게꿈에서도현실의무게를고스란히안고있지만,그모습이무력하게만느껴지지는않는다.박은지의시에서꿈은진실에우회해다가가는길이자,사라진친구들을다시만나는방식,사랑을지킬수있는방식이기때문이다.시인의말을통해“나진짜열심히사랑할거야더많이더오래성실하게”라고건넨다짐과약속에도사랑에대한시인의태도가녹아있다.열심히하는사랑이무엇인지,그것으로우리가무엇을지켜낼수있을지,정답은누구도알수없다.그러나박은지의시는바로그불분명함으로부터꿈을꾸기시작한다.눈을감지않고도펼쳐지는꿈,현실가운데펼쳐지는기묘한꿈은사랑이불가능한세계의풍경을조금씩바꿔놓는다.

■요괴의춤

요괴는환영의춤을추었네작은새의날갯짓같기도하고삽질같기도한춤.나는손과발을깨끗이씻고요괴가끓여준수프를먹었다그러곤요괴에게이름을물었지우리는해가뜰때일어나밭을일구었고,해가지면집으로돌아와꿈으로엮은노래를불렀네
―「보리감자토마토」에서

박은지시의인물들은산책을하다가,열차를타고여행을떠나다가,교실에가만히앉아있다가문득기묘한존재들을마주친다.모든계절을한번에살아내는나무,숲을헤매다마주친요괴,문설주에바른양의피를넘어교실로들어오는악마가마치평범한일인듯일상속에등장한다.이렇게현실로태연히걸어들어온기묘한존재들은현실의시공간사이사이에환상을겹겹이포개어놓는다.요괴,비밀,발소리같은환상이현실과뒤섞이고,그가운데로들어가는인물들을따라우리의감각은비현실적인세계를향해활짝열린다.오늘에붙박여있으면서도과거-현재-미래를한번에살아내는모습을그려본다.까마득히먼미래에도거듭될실패를예감하면서,밥을지어먹고춤추고노래한다.이런인물들의모습들은일상의슬픔을견디는우리의모습과도닮았는데,그모습이위안이되는것은슬픔위로내려앉은환상의풍경이우리가아는슬픔을조금더머물만한장소로만들어주기때문이다.그렇게『여름상설공연』은슬픔앞에서가져볼수있는단단한마음을상상하게한다.오늘의슬픔을,어쩌면슬픔다음에올풍경까지도가만히마주하고들여다볼수있는단단한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