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말 상자 (배진우 시집)

얼룩말 상자 (배진우 시집)

$12.56
Description
살아 움직이는 사물들의
영원히 마를 수 없는 이야기
말과 세계 사이, 언어와 인식 사이,
어긋난 인과를 응시하고 새로 잇는
배진우의 첫 시집

2016년 《문예중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배진우 시인의 첫 시집 『얼룩말 상자』가 민음의 시 317번으로 출간되었다. 등단할 당시 “얼핏 단정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송곳처럼 찌르는 구석이 있다.”(오은 시인)라는 심사평처럼, 배진우의 시는 세계를 향한 진중하고 끈질긴 탐구 끝에 문득 방향을 바꿔 던진 질문, 진리에 반동하는 듯한 에너지를 품고 움직인다.
밤새 셔터를 열어 두는 천체 사진가처럼 오래도록 응시하는 배진우의 시는 사물의 모든 순간을 한 컷에 담아낸다. 배진우의 사물들은 완성된 채로 존재하지 않는다. 귀는 귀를, 숲은 숲을, 이야기는 이야기를 닮아 가는 중이다. 시간의 나열이 아닌 모든 순간의 겹침으로 사물이 존재하는 이곳에서 사물을 향한 우리의 관습적인 서술은 모두 빗나간 것이 되고, 말을 잃은 우리는 이 작고 신비로운 방을 그저 응시하게 된다.
말과 세계 사이, 사물에 가장 근접한 언어를 찾는 입술과 생동하는 사물을 바라보는 눈 사이, 배진우는 언어와 인식 사이에 놓인 시차에 머문다. 그 양극단을 부단히 오가며 어긋난 인과를 신중히 새로 잇는다. 그렇게 인과와 무관한 줄로만 알았던 신비의 영역은 배진우의 시를 통해 실체가 되어 우리 앞에 놓인다. 사물들과 함께, 두 번 반복될 수 없는 얼룩처럼 모든 순간 서로 다른 빛과 형태로 일렁이는 우리 자신을 마주한다.
저자

배진우

2016년《문예중앙》신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1부
내몸에는남는방이있었다11
모서리12
없던일14
사물의월식16
숲과숲18
1의애인20
부분22
싸움28
보이지않는도시30
얇은방32
계약34
덫은36
코너40
상자43
왼손잡이용햄버거47
포장풀린상자는상자와같아서50
연구53


2부
창문없는방59
책갈피서사60
얼룩말상자62
20367
운70
비내리는비72
한명이후74
사이76
마지막장소78
스물80
물의서사82
과일걷기86
저녁에는담장이자란다89
날개92
서른97
빈꿈102
노랑아래106
환절기108


3부
봉합된복도117
벽에게118
나의방옷장과천장사이스핑크스가엎드려있다122
한쪽138
비상구140
영원한것뒤에는무엇이놓여있습니까144
철거하다149
폴리곤153
소거법158
안내사항162

작품해설-최선교(문학평론가)165
추천의말-신용목(시인)179

출판사 서평

■정물의속도
오래훔쳐본유리일수록빨리녹는다오래지켜본눈일수록
쉽게잠긴다
-「싸움」에서

배진우는사물에속도를맞춘다.사물의움직임을측정하는인간기준의단위가‘속도’라면,배진우는사물의단위로써‘흔적’을발견한다.『얼룩말상자』의첫시「내몸에는남는방이있었다」에서들여다본‘몸’의주름을시작으로‘박스’,‘나무’,‘물결’,‘도시의밤’등배진우의화자는사물곳곳에서접힌자국,그어진선,얼룩같은흔적을발견하고,이를통해사물의시간과공간앞뒤를살핀다.
『얼룩말상자』에서흔적은사물의과거와미래를연결하는지표가된다.얼굴의주름이이전의감정과이후의움직임을보여주듯,배진우의시에서‘흔적’은과거의잔해만이아니라미래의모양이기도하다.흔적을통해사물의속도에맞춰움직이는배진우를따라,우리는정물의생동을마주한다.소리도없이,움직임도없이다음순간으로고요하고가뿐하게나아가는존재들의힘을.


■손을한번도떼지않고그린그림
덫은상처의모양을생각하고만든첫번째물건
(......)

덫은덫을닮았다
상처는상처를닮았고
상처와덫이자리를바꾸고
덫위와덫아래에있는고요가다를때
한동작을앞서가고있는것만같고
물건이있고상상이있고
어떤일이일어날것만같았다

흉터는상처를주는물건과닮아간다
-「덫은」에서

생동하는정물은서로연결된다.표제작「얼룩말상자」에서두사람이손을잡고“한번도손을떼지않고”그린그림의사물들이복잡한선으로연결될수밖에없는것처럼,배진우의사물들은서로필연적으로연결되어공명하고전이되며때때로사건을일으킨다.
「덫은」의‘덫’과‘상처’는닮은모양을따라자리를맞바꾼다.상처가있던자리에덫이놓일때발생하는차이는화자의상상을촉발하고,상상은사건의징조가된다.“나무와그늘이있는곳에눅눅한함정”처럼놓였던‘덫’은그와닮은‘상처’와‘흉터’로이어지다“내가보고싶어했던사람”이되고,‘그사람’은나의“문제”“잘못”“사랑”으로이어지며마음깊은곳에도착한다.덫,상처,흉터,함정,내가보고싶어했던사람,문제,잘못,사랑은한번도손을떼지않고그린그림처럼하나의복잡한선으로연결된다.“이야기가없기에단단한것”(「싸움」)이었던정물들이이야기가운데놓이며살아움직인다.무엇이먼저있고무엇이나중에왔는지,무엇이무엇을닮아갔는지알수없다.무엇을출발점으로삼느냐에따라새로쓰이는배진우의시를담는이제“영원히마를수없는이야기”(「물의서사」)가되어우리앞에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