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양장본 Hardcover)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양장본 Hardcover)

$13.00
Description
■ 지금, 김이듬이라는 이름
김이듬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가 민음의 시로 출간되었다. 김이듬은 『명랑하라 팜 파탈』, 『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투명한 것과 없는 것』,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등 다수의 시집을 비롯해,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 산문집 『디어 슬로베니아』, 『모든 국적의 친구』 등을 발표하며 시·소설·산문을 넘나드는 폭넓은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구축한 이 다층적인 작업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꾸준한 주목을 받아왔다. 전미번역상,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 김춘수시문학상, 샤롯데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 국내외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며 김이듬은 동시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시단에서 지금 ‘김이듬’은 서사적 스토리텔링과 시적 비약이 가장 균형 있게 공존하는 이름이다. 김이듬은 개인의 체험과 동시대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언제나 “바로 지금”을 쓴다. 자신이 겪은 사건과 감각을 언어로 즉각 호출하며 일상의 경험을 이미지와 구상성을 통해 시적 언어로 변환해 왔다. 이렇듯 직정성(直情性)과 현실성을 바탕으로 한 김이듬의 시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믿기 어려운 순간들을 정면에서 포착한다. 삶의 압력과 언어의 한계를 동시에 밀어붙이는 태도는 김이듬 시의 고유한 긴장이자 그를 동시대 시단에서 독자적인 위치에 서게 한 힘이다.
신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는 시인이 직접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던 시간, 그리고 “올해 봄날이 잿더미 암흑세계”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파국적 경험 위에서 출발한다. 화재라는 현실적 재난 앞에서 시인은 생체발광처럼 “차가운 빛”을 만들고자 했고, 더듬듯 시를 켜는 순간 “절벽이 보였다”고 말한다. 이 시집은 바로 그 절벽 앞에서 쓰인 시들의 기록이다. 시는 위안이나 장식이 아니라 존재를 더듬는 최소한의 행위로서 다시 호출된다.
물리적 집의 상실은 곧 언어의 집이 무너지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시는 더 이상 안전한 은신처가 되지 못하고, 언어는 한때의 은유로 붕괴한다. 그럼에도 이 시집은 폐허에 머무르지 않는다. 불타버린 집과 무력한 언어의 집에 동시에 거주하면서도, 시인은 그 잔해 위에서 다시 언어로 ‘오지의 건축물’을 짓는다. 이는 완결된 미학적 구조라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세워 올린 임시적이고도 절박한 건축이다.
저자

김이듬

김이듬_2001년《포에지》에시를발표하며등단했다.『명랑하라팜파탈』,『히스테리아』,『표류하는흑발』,『투명한것과없는것』,『누구나밤엔명작을쓰잖아요』등다수의시집을비롯해,장편소설『블러드시스터즈』,산문집『디어슬로베니아』,『모든국적의친구』등이있다.전미번역상,루시엔스트릭번역상,김춘수시문학상,샤롯데문학상,이형기문학상을등을수상했다.

목차

1부

이세상에없는것13
에튀드16
소비뇽18
봄,비,공원20
현기증22
산책24
귀여운여인26
덜떨어진사람30
귤따기체험34
공용어통신36
쪽에서쪽빛을얻기까지38
한여름저녁한시간반40

2부
첫눈은매년첫눈이된다45
좋아하는일48
멀고도가까운이사51
흼은색깔이아니다54
똑같은식물이아니다56
마그마58
조감도60
패터슨에게62
나의이방인264
심수색일지68
시험범위71
풀은노래한다72
애프터눈티74

3부
즐거운사람에게봄날이오면79
우유부단84
초봄대피소86
여름야유회준비88
그때보다지금이나은지90
재에몸을묻고92
봄날정경93
오지의건축물98
불탄집아래100
아무도미워하지않고한계절이지나갔다104
생활과시106

4부
여자와사는여자109
넌아직재밌니110
마르게리따112
폭우가우울을부르지않을때114
동경게스트하우스116
상주의지혜118
송년120
사월122
가을하다125
빌러비드128
입동무렵130

해설_조강석(문학평론가)
시가다시밀려오게된경위에대하여133

출판사 서평

■파국이지나간뒤에
아무도미워하지않고한계절이지나갔다아무에게도알리지않고한계절이지나갔다미움이없어분노가없어관심과눈치도없이봄이지나갔다지나고보니봄이었다올리브유로비누만들기만큼쉽게지나갔다
봄에나는죽어있었고내가죽으면애인은어찌살까걱정하지않았다애인은내가죽기전에죽었으니까나의집은황무지가되었다풀들이불에탔다아무도미워하지않고한계절이지나갔다나는벽돌만한비누를집어던지지않았다
-「아무도미워하지않고한계절이지나갔다」에서

표제작이기도한이시는시집을관통하는윤리적중심을가장분명하게드러내는작품이다.“아무도미워하지않고”라는반복은관용이나용서의선언이라기보다,미움을선택하지않기로한결단에가깝다.이시에서봄은찬란한갱신의계절이아니라,“올리브유로비누만들기만큼쉽게”지나가버린시간이며,지나고나서야비로소인식되는사후적계절이다.
시인은죽음의상상,불타버린집,관계의붕괴를통과하면서도누구의탓도묻지않는다.자연재해조차인간의책임으로환원되는세계에서,화자는비난의언어를거부한다.후반부에등장하는동생의에피소드는‘미워하지않음’이무관심이나비사랑이아님을분명히한다.사회적규범과오해속에서상처받은타인을다독이는장면은,이시집이끝내포기하지않는감정이연민과사랑임을드러낸다.“향기로웠다봄이었다”라는마지막행은,모든상실이후에도계절이감각으로남는다는사실을담담히확인한다.

■이별의형식,삶의온도
가을오후네시는심란하고황량한벌판같다,가을오후네시는문상가기좋은시간,산사람을만나기에는어중간한시간.가을오후네시에는맨발로봐도괜찮은친구를만나고싶다.
우리집에올래?나랑차한잔하러와줄수있겠어?잼과스콘,포도도많아.
-「애프터눈티」에서

「애프터눈티」는이시집의정조를가장섬세하게드러내는작품이다.가을오후네시라는시간은삶과죽음,만남과이별이느슨하게겹쳐지는경계의시간으로설정된다.“문상가기좋은시간”이면서도“맨발로봐도괜찮은친구”를만나고싶은이오후는,파국이후삶이도달한감정의온도를정확히가리킨다.
시속의화자는티타임을준비하듯이별을상상한다.잼과스콘,음악과옷차림을고르는장면들은죽음을비장하게다루는대신,지나치게평범한감각으로채워진다.이는삶을붙드는의지라기보다,미워하지않고보내려는태도에가깝다.마지막만남이마지막헤어짐이될지도모른다는예감속에서도시는끝인사를유보하고가벼운포옹을선택한다.이시는파국이후에도취향을고르고음악을고민하는인간의존엄을조용히보여준다.
1.1.1.

■시가다시밀려오는경위
문학평론가조강석은이시집을“시가다시밀려오게된경위”로읽는다.파국을통과하며미적범주역시용해된다.미와추,우연과필연의구분은의미를잃고,시는의도와계산을내려놓는‘힘빼기’의상태에도달한다.그과정에서시의핵이되는‘심(心)’-촛불심,연필심,마음의심-은오히려무심할때비로소날아온다.
이시집은침묵과내면응시의시간을거쳐,시짓기의재미와창작의동력이어떻게회복되는지를보여준다.언어의무력함을정면으로통과한뒤에야가능한시,더이상확신하지않으면서도쓰지않을수없는상태에서비롯된시들이여기에실려있다.
김이듬의이번시집은재난이후의시,언어의무력함을통과한뒤에야가능한시에대한기록이다.그것은다시쓰기위한선언이아니라,쓰지않을수없게되는순간에대한증언이다.파국이후에도시가왜,어떻게다시밀려오는지를『아무도미워하지않고한계절이지나갔다』는조용하지만단단하게보여준다.

■해설에서
“지나고보니봄이었다”.집은황무지가되었고풀들이불에탔지만아무도미워하지않고한계절이지나갔다.“아무에게도알리지않”아미움도분노도관심도눈치도누그러질수있었겠다.이것은가장소극적의미에서의회복이다.그런데“아무도미워하지않는다고아무도사랑하지않는건아니었다”.이것은적극적이라고까지는몰라도,스피노자식으로말하자면,슬픔으로부터기쁨쪽으로신체변용되는정동이다.(중략)파국앞에서시가무엇을할수있겠느냐마는언어의집마저허물지않고보낸한계절이그렇게지나갔다.
-조강석(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