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신 지연 (양장본 Hardcover)

회신 지연 (양장본 Hardcover)

$13.00
Description
살아 있기 위한 사라지기 연습
빈칸이 되려는 언어의 은신술
제44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회신 지연』이 민음의 시 338번으로 출간되었다. 수상자 나하늘 시인은 독립문예지 《베개》의 창간 멤버로 2017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파업 상태의 언어’와 ‘읽히지 않는 책’을 시라는 장르로 매개하는 작업을 지속해 오고 있는 시인의 작품 세계는, 독립출판물 『Liebe』와 『은신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Liebe』는 문장부호만 남기고 글자들은 지운 채 발행되었고, 『은신술』은 양쪽이 모두 바인딩된 닫힌 책으로서 훼손 없이는 펼칠 수 없도록 제작되었다. 읽히기를 거부하는 이러한 책들은 의미의 고정점을 계속해서 흔들며 독자를 언어의 파업에 연루시킨다.
공백의 형식을 변주함으로써 의미의 확정을 유예하고, 나아가 인간의 존재 자체를 빈칸으로 만드는 나하늘 시인만의 스타일은 『회신 지연』에서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집은 지금-현재라는 감각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건축술에 능하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지지를 받았다. 문장이 단정하고 과장이 없으며, 시적 플롯이 탄탄하여 “무리한 파격으로 치닫지 않으면서도 다채롭게 전개되는 스타일에는 매번 합당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는 점도 다른 응모작들과 변별되는 지점이었다. 『회신 지연』은 자신의 언어가 어떤 궤적을 그리며 어디에 가닿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시인 특유의 단단함으로, 세상에 셈해지지 않는 자리를 만든다. 경쟁으로 과열된 시대에 소진된 이라면 누구든, 과장 없는 담백한 언어로 구현된 나하늘 시의 빈칸 안에서 잠시 머물다 가도 좋을 것이다.
저자

나하늘

저자:나하늘
1992년서울에서태어났다.낭독으로만존재하는책『Liebe』,펼칠수없는책『은신술』등을만들었다.제44회김수영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1부
문서정보13
교외실습14
문제415
작아지기16
순무가자라는마을18
()20
마녀의생일22
밖에서는볼수없는집23
숨을수있는숲26
추도사28
사라지기130

2부
회신지연37
제목39
c/o40
할머니없음42
파티44
이문장을읽지마시오46
사라지기248
부상50
스머징52
ㅁ54
소도시여행56
사랑에빠지게하거나죽은사람살리는건안돼58
ㅇㅇ60
비빔말64
그가누워있다68
일기69
커트코베인평전70
문제172

3부
사라지기375
반마녀76
이하의동작77
리틀쿠바78
<의자>의너비80
시간이느리게가는시82
문제583
기다림84
쓰기시간86
ㅎㅇㅅㄴㄷ88
읽을수없는책90
읽을수없는책91
유령서점92
미도호스텔94
도쿄95
서양미술사96
피자인간97
재채기98
그는방금새로운단어를배웠다100
낙원과추방102
4월24일103
사라지기?막104

작품해설?양경언(문학평론가)
언어의숨바꼭질로저항하기107

출판사 서평

제44회김수영문학상수상시집

공백의존재론

지금답장할수없다는말은
쉬이용서받기어려운데

그러나
도저히열어볼수없었다고
그게
내가살아있다는뜻이라고
-「회신지연」에서

『회신지연』은지연(遲延)의감각으로가득한시집이다.정지의반대는나아감이다.시간을과거,현재,미래로삼등분하기시작한이래로,시간은효율적으로운용해야하는자산으로취급되었고그것을잘활용하지못하는인간은도태되었다거나실패했다고평가받았다.생산성이라는신자유주의의메타플롯은전세계를집어삼킨AI열풍으로대변된다.이러한시대에나하늘은시간을멈추는법에대해연구한다.시간의정지는의미의연착을유발한다.줄을그어문장을완성하기전까지는읽을수없는시(「문제1」),제목부터본문까지군데군데뚫린빈칸으로온전한독해가어려운시(「()」)등,나하늘은구조적으로‘읽을수없는’상태를만들고,그리하여독자를텍스트앞에서잠시정지시킨다.의미는뒤늦게,불완전한상태로도착하거나아예완결되지않는다.이는문장의차원을넘어‘사라지기’라는존재론적차원에서도시도된다.

살아있기,사라지기

나는l의서가로사라졌었고,이후에는l의서가에서사라지는방식으로세상에서완전히사라졌다.

내가발견한작동법은이렇다.처음부터곧장세계에서사라지고자하면실패하기쉽기때문에마음둘작은공간하나만큼,사람한명만큼을남겨두고사라지는것이다.이제그작은공간에서사라지거나그한사람을잃고나면비로소당신은사라지게된다.
-「사라지기-막」에서

「사라지기」연작은세상에서사라지기위한시인의실험을담은연작시이다.“온라인상의나를지움으로써,비유가아니라말그대로,실제내일부를삭제하는일이가능하다는것”(「사라지기1」)을알게된시인은소셜미디어를탈퇴하고,모든관계에서멀어지며작은서가에칩거하고,마침내그서가에서도사라짐으로써온전한‘사라지기’에성공한다.죽음과사라지기는무엇이같고,또다를까?사람들의눈앞에보이지않는다는것,그리하여집계불가능한인간이된다는점은같다.그러나사라지기는내가나로서살아있기위해세상과‘나’사이에틈을벌리는일에가깝다는점에서죽음과구분된다.‘하지않기’(Undoing)의적극적수행으로서의사라지기는,효율성과생산성으로코딩된세계에오류를유발하는“급진적수동성”의저항을보여준다.

책속에서

비가오는날에는비를맞고
눈이오는날에는눈밭에발이빠지면서
살고싶다
겨울이오고싶다

여기까지내가삼킨말조각을하나뿐인나의언니가모국어로옮긴것이다
-「부상」에서

전설적인탈옥수슬림할리데이는교도소에서지낸세월동안시간을다루는법을깨달았다디테일에신경쓰면시간이천천히간다는것에착안해반대의효과를이끌어낼수있었던것이다시간이멈춘다면광장도밀실이다그의방에그대신남아있던문장이다시간이멈춘다면광장도밀실이다그의방에그대신남아있던문장이다시간이멈춘다면광장도밀실이다그의방에그대신남아있던문장이다시간이멈춘다면광장도밀실이다그의방에그대신남아있던문장이다시간이멈춘다면밀실이다그의방에그대신시간이멈춘다면밀실이다그의남아있던문장이다시간이밀실이다그대신있던시간이
-「시간이느리게가는시」

서점지기는항상흰천을쓰고있으나흰천자체가서점지기인것은아니다이간극으로인한피치못할소음이발생한다어떤문장에는바스락바스락소리가딸려갈수있다

유령서점은분실및도난서적의수가매년타서점의여섯배에달한다

는사실외에는보통의서점과다를바가없다무엇보다유령서점이최근언덕아래로이전했다는것은사실이아니다유령서점은개점이래로쭉같은자리에서방문객들을맞이하고있다당신이유령서점을오해하기시작한것이언덕위에서더이상유령서점을발견하지못했기때문이라면그건당신이어떤책한권을훔쳤기때문이다
-「유령서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