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들이여 (김수영 40주기 기념 시집)

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들이여 (김수영 40주기 기념 시집)

$9.32
Description
김수영에게 바치는 우리 시대 젊은 김수영들의 작품들!
김수영 시인의 40주기를 기념하는 시집『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들이여』. 김수영의 시 세계를 계승하는 우리 시대 젊은 시인들의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모아 엮었다. 이원, 이장욱, 박연준, 오은 등 40인의 시인들에게서 '젊은 김수영'을 발견할 수 있다.

김수영은 1968년 불의의 교통사고를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새로운 감수성의 시인이자, 날카로운 현실감각과 사유를 지닌 산문가로 활동하며 한국 현대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과감하고 전위적인 시를 통해 오늘날 모더니즘 시의 바탕을 마련하였으며, 문학의 정치 참여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다.

이 시집에는 김수영의 몰년인 1968년 이후에 출생한, 김수영의 계보를 잇는 시 세계를 보여주는 시인들의 작품을 수록하였다.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개성 넘치는 시와 짧은 산문 한 편씩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김수영의 작품에서 모티프를 얻은 산문을 통해 김수영에 대한 그리움과 경의를 표현하였다.
☞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밀실의 바보> - 황병승

청춘이 오면 피가 끓겠지
청춘이 가면 피가 마른다
얼굴은 점점 납빛이 되어 가고
가슴은 차가워
언제 포옹했더라?
언제 키스했었지?
저승사자가 다가와 불쑥 손을 내밀면
맙소사, 죽 그릇을 떨어뜨리며
입을 떡 하니 벌린다
저자

서동욱

철학자이자 시인, 문학평론가다. 벨기에 루뱅대학교 철학과에서 들뢰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5년부터 계간 《세계의 문학》 등에 시와 비평을 발표했다. 루뱅대학교와 어바인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등에서 방문교수를,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방문작가를 지냈다. 한국프랑스철학회장을 역임했으며, 계간 《철학과 현실》 편집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 《차이와 타자》, 《들뢰즈의 철학》, 《일상의 모험》, 《철학연습》, 《생활의 사상》, 《타자철학》, 《차이와 반복의 사상》, 《익명의 밤》 등이 있으며, 시집 《랭보가 시쓰기를 그만둔 날》, 《우주전쟁 중에 첫사랑》, 《곡면의 힘》을 펴냈다. 엮은 책으로 《싸우는 인문학》,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 《철학의 욕조를 떠도는 과학의 오리 인형》, 《한 평생의 지식》(공편), 《스피노자의 귀환》(공편)이 있고, 시집 《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들이여》(공편), 《별은 시를 찾아온다》(공편),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공편)도 엮었다.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 《프루스트와 기호들》(공역)과 레비나스의 《존재에서 존재자로》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목차

강성은_켈라드리안 숲
강정_무덤이 떠올라 별이 되는 세상은 한참이나 적막하더라-김영태 풍으로
김경인_도마뱀의 편지
김경주_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2
김근_거리
김민정_나미가 나비를 부를 때
김언_소설을 쓰자
김이듬_오빠가 왔다
김중일_날개들의 추격전-풀,(마리아),피터,사막쥐,양귀비
김지녀_여름이 모든 잎을 흔들며 떠나간다
김행숙_가로수의 길
문혜진_호미니드의 발자국-물의 프랙탈
박연준_소혹성 B612호에 혼자 남은 꽃
서동욱_산부인과 초음파
손택수_망치라는 물고기
신용목_인디언의 땅
신해욱_나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심보선_극악한 그리움
안현미_암설에서 뜯어 온 시간
오은_식충이들
유형진_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올드밤비의 마지막 새끼 곰
윤의섭_화계(花界)
이근화_꿀이라고 생각되는 맛
이승원_Plan B
이영주_나의 인사
이원_트랙-출산
이장욱_강철로 만든 저녁
이재훈_트릭스터(trickster)
이준규_문
이철성_늑대의 옷
장석원_청년과 슬픔
정재학_유실문-「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 부쳐
조동범_사고의 날들
조연호_조화공예(弔花工藝)
진은영_감기 선언
최금진_머리카락 종교
최하연_파라다이스 텔 3805호
하재연_서커스
황병승_밀실의 바보
황성희_원숭이의 간편 처세술

엮은이의 말
이 책에 참여한 시인

출판사 서평

그의 시는 영원히 현재다
“오늘의 김수영들이, 김수영에게 바친다.”


김수영은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나 1968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기까지 새로운 감수성의 시인, 밀도 높은 사유와 날카로운 현실감각을 지닌 산문가로 활동하며 한국 현대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과감하고 전위적인 시작법으로 오늘날 모더니즘 시의 뿌리가 되었으며, 문학의 정치 참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 또한 보여 주었다. “내일의 시는 미지(未知)”라는 그의 실험 정신은 언제까지나 신선한 충격으로 남을 것이다.
40주기를 기념하여 출간되는 이번 시집에서는, 김수영의 시 세계를 다채롭게 계승한 우리 시대의 젊은 김수영들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펼쳐 낸다. 이원, 이장욱에서 박연준, 오은에 이르는 40인의 시인들에게서 김수영은 틀림없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은 “거대한 뿌리”에 대한 기념일 뿐 아니라 무섭게 생장하는 ‘실뿌리들’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기도 하다.

영원한 청년, 김수영에게 바치는 오마주

이 시집에 시를 실은 시인들은 모두 40명이며 김수영의 몰년인 1968년 이후 출생한 이들로서, 김수영의 계보를 잇는 시 세계를 보여 주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인들이다. 시인들 각자는 개성 넘치는 신작 시 한 편과 짧은 산문 한 편을 실었다. 특히 산문은 김수영의 작품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김수영과 오늘날의 젊은 시인들이 일으키는 화학반응이 매우 독특한 형태로 드러난다. 모두 김수영의 구절들을 인용하거나 변형한 것인 산문의 제목은, 그리움과 경의를 함께 담고 있다.

* 서동욱
창문-담배·연기-바람. 그렇다, 바람
-「반시론」에서

생의 막바지에 김수영은 한 미인에게 집착한다. 문학사적 스무고개 놀이의 골인 지점인 Y 여사.
그 오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같이 식사하고 담배를 피웠으며, 살며시 창문을 열어 연기를 내보냈다. 이 마지막 동작에 시인은 스스로 감동했다. “창을 연 것은 담배 연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천사 같은 훈기를 내보내려고 연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 창문 -담배, 연기- 바람. 그렇다, 바람.” 두 개의 몸이 가만히 있는 동안에도 두 몸 사이에서 무엇인가 놀라운 작용을 하는 ‘바람’을 시인은 발견했던 것이다. 에이, 바람둥이…….
바람을 라틴어에서는 스피리투스 또는 아니마라 부르는데, 영혼뿐 아니라 ‘숨결’을 뜻한다. 히브리인들은 바람을 뤼아라고 부른다. 바람이 몸속에 들어와 숨결이 되기에 그것은 생명의 바람이고, 그 신성한 의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이 히브리어는 각국의 언어 속에서 ‘성령’이라 번역된다. 같은 정도의 존경심에서 시인은 바람에게 “신적인”이라는 꾸밈말을 붙인다. 자신과 그녀의 몸을 오가는 훈기 또는 “신적인 미풍.” 그가 릴케로부터 인용하듯 “신의 안을 불고 가는 입김. 바람.”
우리에게 알려진, 김수영의 최초의 시와 마지막 시가 공통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이름말은 “바람”이다. 통념과 달리, 마지막 시에서 그는 익명의 풀들을 일으켜 세우는 무서운 힘이 바람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풀들의 성령인 바람이 콧속으로 들어와 허파를 움직이고 뼈와 살을 못살게 굴면 유골은 일어나 세상의 첫 아기가 된다. 어느 날 바람이 몸 안에서 떠나면 유골은 실이 끊어진 나무 인형처럼 놀이를 중단하고 주저앉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몸 안에 바람이 들어와 있는 동안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알고 있다. 바람은 기침으로 진화하며, 가래를 쏘는 총이 된다. 바람(숨결)의 예외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운동인 기침 앞에서 언어는 뭉개지고 언어의 예절을 닮은 세상의 법도 가래를 뒤집어쓴다. 그것은 카프카에게선 동물들의 숨결이 실어 나르는, 법(분절) 없는 무서운 소리로 둔갑하기도 하며, 베르크에게선 음표의 시니피앙으로 묶어 둘 수 없는 룰루의 비명 소리가 되기도 한다.

* 김행숙
움직이는 비애여
- 「비」에서

움직이는 다리여. 허공에 담긴 오른발이여. 인파 속에서 꼬꾸라지는 다음번의 파도여. 흐린 날씨여. 움직이는, 계속 움직이는, 먼저 움직이는 다리여.
나는 가장 늦게 도착할 것이다. 나는 오지 않은 사람으로, 나는 거리에서, 나는 도중에서, 나는 붐비는 사람으로, 한적해진 거리에서 나는 거의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나는 거의 저녁에 이를 때, 나는 너를 스쳐 먼 곳에서 너에게 도착할 때.
움직이는, 움직이는 시간이여. 길이여. 시간과 길을 묻는 사람들이여. 시간도 길도 없다고 대답하는 바쁜 사람들이여. 후퇴하지 않는 행인들이여. 행진, 행진이여. 물결이여. 물속에 잠긴 우리들의 도시여.

* 김이듬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공자(孔子)의 생활난」에서

내일은 내 생일이다. 대충 그럴 거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가지고도 서너 명 진술이 엇갈렸고 언니뻘 되는 아이의 사망신고 대신 내 출생신고를 했다고 큰 이모는 말했고, 돌아가셨다. 아무래도 괜찮다. 난 생일과 공휴일 혹은 기념일 같은 날들을 좋아하지 않으며 예술가의 생가로 여행하지 않는다. 김수영의 시 한 줄을 써 놓고 시작해야 하는 글은 나를 부담스럽게 했고 지금도 괴롭다. 헤엄치며 생각한 기술을 땡볕으로 나오자마자 까먹곤 했던 얼치기 수영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김수영을 수영한다. 그가 밀어내기 때문에 나는 떠오른다. 그 위에 눈을 가늘게 뜬 채 누워 있다. 흰 구름이 흘러가고 나도 흐른다. 나는 그에게 깊이 빠지지 않는다. 서로가 약간 거만하고 이게 맘에 든다. 단지 난 나를 위로하는 시를 썼고 여기에 시는 빠져 있고 인용 부호도 빠져 있다. (……) 어중간하게 나는 죽을 것이고 아무도 그날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맘에 든다.

* 강정
나날이 새로워지는 괴기한 청년들이여
-「절망」에서

밥을 먹다가도 똥을 싸다가도 술에 취해 즐겁게 떠들고 술이 깨서 괴로워하다가도 시인 족속은 늘 이상한 거울을 눈 밑 코 밑마다 달고 산다. 그건 축복이고 저주고 고통을 빙자한 자족적 환희겠지만 그래도 그 거울에서 가장 먼 자는 늘 시인 자신이다. 시 쓰기는 자기 자신에게 밀착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방기하고 질책하는 짓거리다. 그래서 시인은 항상 엄살이다. 자기가 잘못 놓은 주사에 화를 부르고 병을 조장하니 이만큼 한심한 인간들이 또 어디 있으랴.
병든 고양이처럼 스스로를 감싸 안고 샅을 핥으며 세상 한편에서 꾸물거리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모든 게 무참하다고 헛울음 흘릴 때가 있다. 그건 세수 안 한 맨얼굴에 와 닿은 세상 전부가 극명해지는 순간이자 매번 괴로운 어제이고 파탄 난 내일이자 돌아오지 않는 정념의 화살이 발등에 와 박히는 순간이다. 그러니 더 울자. 더 괴기하게 더 새로운 세상을 망가뜨리기 위해.

■ 엮은이의 말 중에서

사라진 식물들은 어디로 가는가? 한 식물이 하늘 아래서 꽃과 나무와 파란 잎사귀로 살기를 그만두고서 오랜 시간이, 가령 40년이 흐르면 어떻게 되는가? 땅이 품은 불길 속에서 말라 사라지기도 하지만, 뿌리로서의 삶을 시작하고 40년 동안 땅속에 거대한 숲을 이루기도 한다. 이렇게 김수영은 그의 시구 하나를 자신의 운명 속에 인용해 넣었다. “거대한 뿌리.”
뿌리는 중심도 가장자리도 없이 마구 자란다. 계보가 없으니, 그의 실뿌리들 각자는 자신이 온 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새로 태어나 정체를 포착할 수 없는 이들 역시 김수영의 시구 하나를 자신들의 운명 속에 인용해 넣었다. “괴기한 청년.”
이 시집은 ‘괴기한 청년들의 이야기’이다. 동시에 자기 뒤의 시, 곧 “내일의 시”란 단지 미지의 시여야 한다고 했던 ‘거대한 뿌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40년 동안 놀랍고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을 뻗어 나가 거목을 이룬 한 식물의,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이야기 말이다. 우리는 이 시집에서, 김수영의 구절들에서 빠져나오는 묵은 잉크가 현재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정신과 뒤섞여 만들어 내는 놀라운 색깔과 소리와 현란한 무늬를 보고 듣게 될 것이다. - 서동욱(시인 ·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