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개의 말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양장)

89개의 말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양장)

$15.00
저자

밀란쿤데라

저자:밀란쿤데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태어났다.1975년프랑스에정착하였다.2023년세상을떠났다.

역자:김병욱
프랑스사부아대학교에서문학박사학위를받고성균관대학교에서학술연구교수로일했다.현재성균관대학교초빙교수로재직중이다.『불멸』,『느림』,『배신당한유언들』,『읽지않은책에대해말하는법』,『누가로저애크로이드를죽였는가?』,『불의정신분석』,『물과꿈』,『문학의쓸모』등을우리말로옮겼다.

목차

소개의말7

89개의말11

프라하,사라져가는시95

출판사 서평

쿤데라특유의날카롭고도유머러스한철학적성찰,
그리고번역이라는망명속에살아가는작가의고뇌가담긴101개의말

밀란쿤데라는1975년프랑스에정착해2023년사망할때까지조국인체코로돌아가지않았다.체코어로쓴작품들이조국에서판매금지된후『느림』(1993년)부터프랑스어로작품을집필한그는죽기전까지자신의전작이체코어로출간되는것을보지못했다.돌아가지못한/않은조국체코와프랑스사이에서그는평생물리적ㆍ언어적디아스포라로살아가야했다.그런쿤데라에게정확한번역은매우중요했고,그에게‘말’이란끊임없는의심과점검의대상이었다.

「89개의말」은이같은번역에관한이야기로시작된다.쿤데라가그토록번역에예민하고철저해질수밖에없었던것은,많은나라에서번역저본으로선택된프랑스어판이엉망으로번역된데다이후프랑수아케렐이라는번역가와파트너를이루어작업했음에도체코어로집필한작품이결국같은언어를쓰는동포독자들에게가닿을수없었던제한적조건때문이었다.그래서쿤데라는“미래의프랑스어판본을메아리처럼들으며”집필할수밖에없었고,결국에는프랑스어로글을쓰기시작했다.이런작가의고뇌에피에르노라는제안한다.“자네의개인사전을써보면어떻겠나?자네가중요시하는말들,자네를골치아프게하는말들,자네가애착하는말들을모은……?”작가는즉시이생각에매료되었고,「89개의말」은그렇게탄생한글이다.이소사전은‘절대(Absolu)’에서시작해‘저속함(Vulgarite)’까지101개의단어가알파벳순서로펼쳐진다.그안에는쿤데라특유의날카롭고도유머러스한철학적성찰과함께번역이라는망명속에살아가는작가로서의고뇌도함께드러난다.

특히눈길을끄는것은그가엄정하게선택한단어가번역을거치며재창작에가까울정도로변형되어의도가완전히바뀌어버린일화나,그가소설이라는예술에대해품고있는철학이다.첫항목인‘절대’에서그는“소설은본질적으로형이상학에손을대는것인만큼,형이상학적인말들(절대,본질,존재등)은소설에인용될권리가있다.”고못박으며시작한다.이어서‘정의(Definition)’항목에서는“모호성속으로빠져들고싶지않다면,내가그말들을극도로정확하게선택해야함은물론그것들을정의하고또정의해야한다.”고말한다.‘존재(Etre)’항목에서등장하는『참을수없는존재의가벼움』의제목에대해그의주변에서보였다는반응도흥미롭다.그는제목의‘존재’라는단어가많은이들을당혹스럽게했다고말하며,‘존재’의대척점에있는‘죽음’에대해설명하면서그유명한『햄릿』의대사(“존재할것이냐,말것이냐”)에대해서이야기한다.작가가기쁨,관능,쾌락이라고쓴곳마다‘오르가슴’으로바뀌어있는미국번역판에관한에피소드(‘오르가슴[Orgasme]’)와‘도덕적상황’에관한‘미학적판단’이라는쿤데라의날카로움을드러내는항목(‘추함[Laid]’)은웃음과함께생각할거리를던져준다.

프랑스어에서국외자일수밖에없는그가모국어와프랑스어의간극에서느낀낯선아름다움과때로는익살스럽기까지한안타까움에관한이야기들도있다.예컨대B항목의‘Bander(꼴리다)’에서그는『우스운사랑들』에서쓴문장에서실은‘꼴렸다’는말을썼어야했는데체코어에그단어가존재하지않아생각해내지못한일화를이야기한다.뒤늦게적확한단어를찾은쿤데라는“내모국어가꼴릴줄도모르다니!”하며한탄한다.C항목의‘Chez-soi(내집)’에서는정치적,국가적버전으로서의‘조국’과‘집’으로서의고향사이에존재하는틈에대해성찰하고,‘책(Livre)’항목에서는‘내책’과‘내가사는마을’이라는프랑스어사이에존재하는음과박자에서독특한발견을하는식이다.

그가각별한애정을품은중부유럽과유럽작가들에대한항목들,그중프라하의상징과도같은작가카프카를언급한항목들은쿤데라라는작가와겹쳐보게하며긴여운을남긴다.“카프카는비참하게덫에걸린인간의상황을그렸다.지난날,카프카전문가들은카프카가우리에게희망을주었는지아닌지를놓고많은논쟁을벌였다.아니,희망은없다.다른게있다.카프카는삶이불가능한그런상황조차도,기이한,검은아름다움으로발견한다.아름다움,그것은더는희망이없는인간이가질수있는최후의승리다.예술에서의아름다움이란,한번도들어본적없는것이발하는돌연한빛이다.위대한소설들이발하는그빛은세월이흘러도어두워지지않는다.인간은늘인간의실존을망각하기에,소설가들이이룬그발견들은아무리오래되어도부단히우리에게놀라움을안겨주기때문이다.”(‘아름다움[Beaute]’항목)

천년역사의마지막메아리를남기고
‘전체주의의밤’에파묻힌문화에대한밀란쿤데라의고찰

이어실린「프라하,사라져가는시(詩)」는쿤데라의프랑스망명초기,즉렌대학교에서‘카프카와중앙유럽의문학’을강의하던1980년에피에르노라의요청으로《데바》지에발표한글로,점점멀어져가는고국을향한애틋함과절망이깃들어있다.수년전떠나온조국과프라하에대한쿤데라의향수,소련침공으로“전체주의의밤”속에파묻혀버린고국에대한그리움과안타까움은물론,프라하의위대한문화에대한그의자부심도느낄수있는,큰울림을주는글이다.

프라하는서유럽문화의오래된중심지이자,점점동유럽의변방으로밀려난도시다.라인강동쪽최초의대학도시이자종교개혁의요람이자바로크의수도였고,1968년에는서구적사회주의실험의무대였던곳.그러나쿤데라는이도시가체코어라는언어장벽과반복된정치적침략속에서아틀란티스처럼멀고도낯선곳이되었다고말한다.
체코문화는오랫동안서구에서간접적으로만이해되었다.드보르자크,야나체크,카프카,네즈발,무카르조프스키등체코예술가와지식인들의작업은그들이속한언어,환경,사유의맥락없이해석되었고,체코어는유럽의불투명한유리벽이었다.그는덴마크,카탈루냐,폴란드,체코같은소국들이대국의문화를모방한다고여기는통념이얼마나잘못된것인지지적한다.그에따르면이들소국은서로다른시각과감수성을지닌또다른유럽을형성한다.

프라하의문화사는이성보다환상과불합리의계보에속한다.황제루돌프2세궁정의비학과환상예술,바로크시대의광기,초현실주의시인네즈발에이르기까지,이도시는늘비합리의정서에민감했다.이런전통은카프카와하세크,차페크같은작가들을낳았다.그들은유럽이진보와이념에도취되던1차세계대전후이미그이면의위협과병리성을꿰뚫고있었다.특히『소송』의요제프K.와『용감한병사슈베이크』의주인공슈베이크는전체주의라는기계앞에선인간의두가지태도를상징한다.쿤데라는이들이30년후프라하의현실을예견했다고본다.

한편프라하는세기초부터현대예술의모험이활발하게이루어졌던공간이었다.쿤데라는유명한카프카전기를집필한클라우스바겐바흐를비판한다.바겐바흐가프라하를세상과동떨어진곳,고립된한지방도시로파악함으로써카프카를오해하게끔했다는것이다.프라하는또한구조주의의요람이자최초의대도시이기도했다.쿤데라는프라하에서꽃핀구조주의와체코구조주의자들의특성,그것이인간과예술에대해가지는의미가무엇인지도성찰한다.또한체코초현실주의에대해서도다루는데,서구의합리주의에반하는프랑스초현실주의와달리체코의초현실주의는프라하예술전통에서유기적으로발전했다.그런전통에서탄생한네즈발의시는특히“구체성에대한도취”를통해독특한미학을드러낸다.

이런흐름은음악에서도이어진다.야나체크는말러와쇤베르크이후음악낭만주의의한계에맞서,삶과심리에밀착된음악을시도했다.그런데쿤데라는야나체크가생애말년에작곡한마지막오페라「죽음의집」에대해이야기하면서,작곡가의삶과전혀무관한어두운비전으로가득찬그작품을창작한이유를묻는다.그로서는정답을찾기어려운이문제에대해그는다만카프카의『소송』,하셰크의『용감한병사슈베이크』와함께「죽음의집」이미래의지옥을그린20세기가장기념비적인예술작품이라고꼽는다.이작품들을통해“이미모든것이말해졌고,이후의역사는그상상을따라왔을뿐”이라면서.
1948년의쿠데타와1968년의소련침공은프라하를동유럽의위성국으로전락시켰고,천년의문화는그렇게붕괴했다.카프카가위협적인이유는그가반공주의자여서가아니라,러시아적세계관과결코섞일수없는낯선문화의구현자이기때문이다.쿤데라의결론은비극적이다.프라하에서사라진것은민주주의만이아니라,이해받지못한하나의위대한문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