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이성취한가장심오한작품중하나다.―발터벤야민
나는로베르트발저를존경한다.사람들은그의작품을읽어야한다.―헤르만헤세
로베르트발저는카프카가보여준문학에먼저도달했다.―수전손택
20세기문학의새로운영토를개척한수수께끼같은작가,
로베르트발저의‘작은세계’가열리다
독일어권문학뿐아니라20세기문학사에서가장기이한존재로여겨지는작가로베르트발저의대표산문과독특한소품을엄선해엮은『산책:로베르트발저작품집』이민음사에서출간됐다.로베르트발저는일찍이프란츠카프카,헤르만헤세,로베르트무질,발터벤야민등수많은작가와비평가들로부터높이평가되었지만,정작당대독자들에겐별다른관심을받지못했다.그는기울어가는가정형편탓에열네살무렵부터스스로생계를책임져야했고,정규교육을중단한채온갖직장을전전해야했다.하지만연극을사랑하고,시를짓는데에관심이많았던발저는어려운형편속에서도문학적열정을단념하지않았다.이불우한천재에게도몇차례의기회가찾아오기는했지만끝내대중적성공을이루지못했고,계속된가족의상실속에실낱같은희망마저전부배신당하고말았다.결국조현병증세를보이기시작한발저는정신병원으로보내졌고,상태가호전뒤에도오갈데가없었던그는최후의순간까지스스로병실에갇혀여생을보냈다.하지만발저는끊임없이이어진절망적인상황속에서도세상을사랑했고,돈이들지않는장거리도보여행을즐기면서종이를아끼기위해매우작은글씨로집필활동을하며엄청난분량의기록을남겼다.
작가스스로는의도하지않았을테지만,로베르트발저의작품에는20세기산업사회의광기와그늘,대도시가빚어내는비인간적환경과인간소외,고독의문제가잔혹할정도로생생하게담겨있다.수전손택의말처럼“카프카가보여준문학에먼저가닿았던”로베르트발저는찬란한문명과무한한진보가약속하는미래의환상에가려미처보이지않았던‘소수자’,‘소외당한개인’,‘도구처럼소모되는인간존재’의모습을문학속에펼쳐보였다.게다가그는전통적인서사구조를거부하면서완벽히‘새로운문학의영토’를열어젖혔고,단어를선택하거나시제를사용하는데에있어서도상식을파괴했다.가령발저는1차세계대전에참전했음에도그엄청난전쟁에대해서는거의언급하지않았으며,다른작가들에게선매우흔하게다뤄지는로맨스조차한평생입밖으로꺼내지않았다.또한개인형편상여러도시를전전하며매우다양한분야를두루거쳤음에도불구하고,오로지자신의내면과매우제한적인범위의경험만을되풀이했다.한편로베르트발저는두서없이이야기를시작했다가돌연중단하기도했으며,관료적산업사회에서줄곧강요받아온‘하류지향적태도’,언제든대체가능한‘부품으로서의인간상’을담담히토로하면서지난시대의거장들이이룩한‘교양소설’의전통과서구지성사가자랑스럽게간직해온‘인본주의적가치’를해체(전복)하기도했다.
이렇듯미증유의작품세계를선보인로베르트발저는20세기중후반에이르러포스트모더니즘의선구자로서다시한번크게상찬됐으며,노벨문학상을수상한엘프리데옐리네크를비롯해페터한트케와같은현대문학의거장들에게도공공연히존경을받고있다.어쩌면로베르트발저는,점점비인간화하는오늘날을살아가는독자들에게더의미심장하게읽힐지도모른다.
로베르트발저의대표산문「산책」을비롯해
작가의진면목을확인할수있는글들을엮은작품집
산책은말입니다.활기를찾고,살아있는세상과관계를정립하기위해반드시해야하는일입니다.세상에대한느낌이없으면나는한마디도쓸수가없고,아주작은시도,운문이든산문이든창작할수가없습니다.산책을못하면나는죽은것이고,무척사랑하는내직업도사라집니다.산책하는일과글로남길만한걸수집하는일을하지않으면나는더이상아무것도기록할수없고,긴노벨레는물론이고아주짧은글마저도쓸수없습니다.산책이없다면나는그무엇을인지할수도,스케치할수도없습니다.―「산책」에서
『산책:로베르트발저작품집』에는발저의산문작품중에서도가장널리읽히며나날이더욱중요해지는「산책」을필두로작가본인의예술관을결정적으로보여주는「툰의클라이스트」,「시인」,「작가」와대표작『벤야멘타하인학교』의모티프와주제의식을뚜렷하게살펴볼수있는「어느학생의일기」,「그것이면된다」등11편의다채로운작품들을두루만나볼수있다.
특히표제작「산책」은로베르트발저의뛰어난문학적성취를결정적으로보여주는매우귀중한작품이다.이이야기는어느날,아무런계기도없이시작되고,마치모든서사적필연성을거부하기라도하듯별다른사건없이,개연성으로부터멀리물러나의식의흐름에따라진행된다.「산책」의주인공‘나’는마을을돌며서점에들러잘팔리는책을살피기도하고,양재사와불필요한언쟁을벌이기도한다.한편갑자기찾아온행운,즉후원금의존재를확인하면서자신의역량을과시하기도하고,어느관대한귀부인이마련한점심식사에초대받았다며자랑하기도한다.그러다가느닷없이이야기의분위기가반전된다.주인공을환대하던귀부인이돌연협박을가하는가하면,엄중한관공서의관리는할일없이편히산책만즐기는,작가라면서달리‘사람구실’도못하는‘나’의삶을신랄하게비판한다.이제관심사는때묻지않은자연으로,그와대조를이루는산업화의현장으로이어지다가,뜬금없이낯선여인에게자신의환상을들려주는장면으로전환된다.이야기는도무지종잡을수없는방향으로,화자의감정또한기쁨과두려움,절망과희망사이를오가며다만나아갈뿐이다.오로지자신의내면을이야기하는데에만관심이있는듯한‘나’의이야기를쫓아가다보면,우리는(너무만연한나머지제대로감지하지못했던)현대사회에서의인간소외와고독,타자와거대한존재(국가기관등)에대한공포등을명확히체감하게된다.현대의병폐를예언하듯선취한「산책」은,발터벤야민의말처럼“이시대의가장심오한작품”이라고평가받기에조금도부족함이없다.
주제면에서「산책」의연장선상에놓인「그것이면된다」,「아무것도모르는사람」,「죽음에관한두개의이상한이야기」에는오늘날의독자들에게도섬뜩하게읽힐만한내용이잔뜩담겨있다.시민으로부터발언권을빼앗고그들이침묵하고복종하기만을바라는권력자,노동자가기계처럼일만하고어떠한불만도품지않기를원하는자본가,우중(愚衆)이늘어나기를노리는사이비언론의뒤틀린욕망을그대로되뇌는,이를테면욕심가득한권력의세뇌를받아꼭두각시가되어버린,완전히마비된개인의모습을반(反)영웅적표상으로드러내보이는이작품들을읽다보면,21세기대한민국의상황과묘하게중첩되는부분을어렵지않게찾아볼수있다.이처럼기능적효율성을맹신하는산업화가불러들인비인간화와자본주의가배태한황금만능주의,언제라도광기의소용돌이에휘말릴수있는인간사회의연약한일면을누구보다먼저내다보았고,또한그것을문학적으로성취해낸로베르트발저의작품들은과거보다오늘날,또지금보다앞으로더욱더중요하게읽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