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권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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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의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 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권태」에서
저자

이상

저자이상李箱은1910년2남1녀중장남으로태어났다.본명은김해경,본관은강릉이다.8살되던해신명학교에입학하여화가구본웅과만나오랜친구로지낸다.학창시절,미술에관심이많아화가를꿈꾸다가경성고등공업학교건축과에입학해수석으로졸업한다.학교추천으로조선총독부내무국건축과기수로발령받아근무한다.
1930년,잡지《조선》국문판에처녀작이자유일한장편소설「십이월십이일」을‘이상(李箱)’이라는필명으로연재한다.1931년조선미술전람회에서양화「자상」이입선하고,《조선과건축》에일본어로쓴시「이상한가역반응」등20여편을발표한다.폐결핵으로조선총독부건축기사를그만둔후,1933년서울종로1가에다방‘제비’를개업한다.1934년박태원,정지용,이태준등의도움으로연작시「오감도」를《조선중앙일보》에발표하고‘구인회’회원이된다.1936년구인회동인지《시와소설》창간호를발간하고단편소설「지주회시」,「날개」를발표하며평단의주목을받는다.1936년가을,일본도쿄로건너가작품활동을하다가1937년2월에‘사상혐의’로일본경찰에피검되어조사를받던중폐결핵이악화되어병원으로옮겼으나같은해4월,28세의젊은나이로세상을떠난다.

목차

날개
지주회시
봉별기
실화
김유정
산촌여정
권태

출판사 서평

‘박제가되어버린천재를아시오?’시대를앞서간실험적모더니스트이상
“한국어로쓰인가장격조높은산문”(김윤식)「권태」를비롯해
작가의대표단편소설과산문을골라엮은작품집

■편집자의말:왜이작품을소개하는가?

‘천재’,‘광인’혹은‘모던보이’라고불리는이상은시인으로도잘알려져있지만실험적구성과파격적문체를통해식민지근대한국과동시대를살아낸사람들의혼란스럽고불안한내면심리를형상화한뛰어난소설가,즉산문가이기도하다.이상은소설을가리켜“무서운기록”(「십이월십이일」)이라했고,덧붙여“최후의칼”을들고“죽지못하는실망과살지못하는복수”의싸움에서얻어낸것이라고도했다.결국이상에게소설은‘운명과도같은글쓰기’였고,산문은‘처절한자기고백’이었다.
이상은사회존재기반,삶의배경없이추상적으로만존재하는소설속등장인물들을통해뿌리뽑힌도시인과소외된지식인의억압된충동그리고감춰진욕구를폭로하며그들의무의식을처절하게드러내고자했다.어떤특정이념에기대지않은채단지자신만의특이한시각과생각에충실한‘글쓰기’는이상의모더니스트적면모와더불어시대의예술철학에도전한천재적재능을거침없이보여준다.실험성과전위성으로오늘날에도여전히다채로운비평담론과논쟁을야기하는이상의산문은그존재자체만으로도‘현실’에대한엄청난충격이라고할수있다.따라서그의‘소설’과‘산문’은다소낯설게느껴진다.이상의소설에는어떤사건,행동혹은하나의줄거리조차없으며,소설속인물들은말과행동을통해성격(캐릭터)을구축하기보다는의식과사고를통해존재를드러낸다.그래서하나의잘짜인서사구조,분명한개연성을기대하는독자에게이상의소설은혼란스럽게느껴질것이다.무능력한남편과살림을돌보기위해낯선남자들을상대해야하는아내의모습을그린「날개」,물질만능주의로인해타락해가는인간군상을‘띄어쓰기’없는글쓰기로묘파해낸「지주회시」,불안하고성마른,또종잡을수없는남녀의기묘한관계를담아낸「봉별기」와「실화」,문학적동지였던김유정의날것그대로의모습을살필수있는「김유정」과우울한도시인이들여다본시골의정취를섬세한언어로포착한「산촌여정」,「권태」에이르기까지,이상의소설과산문은독자들의감수성과이해력을쥐락펴락하며뒤흔들어놓는다.이렇듯이상은소설뿐아니라산문에서도어떤특정한이념이나가치를두드러지게드러내지않았다.이야기는해체되고,줄거리도뚜렷하지않다.소설가이자산문가로서의이상은특정서술법이나관점에기대지않고기존권위도추종하지않으며,가치와이념에도반대한다.그는단지자신만의고유한시각,사물에대한지각에충실하다.바로이러한점이모더니스트이상의면모라고도할수있다.
물론이상의소설과산문은현실에서벗어나지않는다.그러나그의언어는언제나이현실이라는영역을넘어설수있는또다른공간을준비하며이상은자신의글쓰기를통해시간과공간,현실과환상을넘나들며일상과현실이라는틀을파괴한다.이상문학에서시간은마치‘생각의흐름’처럼느려지기도하고순간적으로이동하거나도약하기도한다.이상의소설과산문속에선일반적인시간개념이뒤집어지고,주인공의행동이나사건대신관념적이고추상적인사념이이어지며등장인물의대화는모두생략되거나간접화된다.이과정에서이들의기억과욕망이무의식의세계와서로중첩되면서극적으로드러난다.바로이상이그려낸이들이식민지근대한국이라는위기와격동의시대를살아내야했던소외된지식인,뿌리뽑힌도시인이자오늘날불안정한이시대를살아가는우리들의모습이라고할수있다.어쩌면이것이야말로우리가이상을읽고또읽어야만하는절실한이유일지도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