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도,중심도없는삶속에서
마르그리트뒤라스가마주한사랑과고통,생명과죽음의윤무
이책에는시작과끝이없고,중간도없다.어느책이든존재이유가있다는말이맞다면,이책은책이아니다.이책은일기가아니고,신문에연재되는글도아니다.일상의사건에서벗어나있다.그냥,읽는책이다.이책은소설과거리가멀다.그런데말을받아쓴글이라는점에서신기하기는하지만,신문사설의글쓰기보다는소설의글쓰기에가깝다.-「들어가는말」에서
글을쓸때작용하는본능같은것이있다.쓰게될것은어둠속에이미있다.쓰기는우리바깥에,시제들이뒤섞인상태로있다.쓰다와썼다사이,썼다와또써야한다사이.어떤상태인지알다와모르다사이.완전한의미에서출발하기,의미에잠기기와무의미까지다가가기사이.세계한가운데놓인검은덩어리라는이미지가무모하지않다.-「검은덩어리」에서
나는사랑이내가생각한그것이아님을알게되는순간에바로그새로운사랑과함께있고,새로운사랑과함께떠난다.나는버려진사랑이가짜였다고말하지않고,그사랑이죽었다고말한다.-「스카프의푸른색」에서
남자들은동성애자다.모든남자들은잠재적으로동성애자다.모르고있을뿐이고,드러내줄사건이나증거를만나지못했을뿐이다.(……)이성애는위험하다.두욕망이완전한쌍방성에이르기를바라게된다.이성애안에는해답이없다.남자와여자는화해할수없다.그래도새로운사랑이올때마다되풀이하는그러한불가능한시도가바로이성애의위대함이다.-「남자」에서
여자들은서로물질적인삶에대해서만말한다.정신의영역으로는받아들여지지않는다.극소수의여자만이아는일이다.아직모르는여자들도많다.오래전부터여자들은스스로에대해서조차,여자는남자보다열등하다고가르치는남자들한테배웠다.그렇게뒤로박탈당하고억압된상태에서,말은더자유롭고더일반적이다.-「남자」에서
남자를많이사랑해야한다.많이,많이.남자를사랑하려면많이사랑해야한다.그렇지않으면,불가능하다.남자를감내할수없다.-「남자」에서
우리는모든타협을,사람들이다른종류들사이에서흔히시도하는‘조정’을모두거부했다.우리는그사랑의불가능성을직시했다.뒤로물러서지않았고,도망치지않았다.상상할수없는,멀리있는사랑이었다.너무이상해서,웃었다.우리는인정하지않았고,주어지는대로,불가능하게,정말로그대로살았다.고통을줄이기위해아무것도하지않았고,피하지않았고,무찌르려하지않았고,떠나려하지않았다.그것으로는충분하지않았다.-「책」에서
나는버렸다.그리고후회했다.살다보면늘버리고나서후회한다.하지만버리지않으면,없애지않으면,시간을전부간직하려면,인생을오로지물건을정리하고삶의자취를분류해서보관하는일로보내는수밖에없다.여자들이전기나가스요금고지서를이십년동안보관하기도하는이유는그저시간을기록해두고싶어서,자신들이해낸일을,자신들이살아낸,이제는아무것도남아있지않은그시간을기록해두고싶어서다.-「집」에서
그들은이렇게말한다.“당신은이해하지못할거예요.”“나도내가왜계속이러고있는지모르겠어요.하지만어쩔수없어요.”그들은서로사랑하는사이가아니지만,그들사이에있는것은이미사랑이다.실용적인혹은편의상의이유들로누군가를사랑하는게이미사랑이다.대부분의경우사랑한다고고백하지는않을테고,아마도깨닫지조차못하리라.하지만이미사랑이다.-「「인디아송」의굴뚝들」에서
사랑없이사는일은불가능하다.남은것이말뿐이라해도,사랑은늘살아간다.최악은사랑하지않는것이다.나는그럴수있다고생각하지않는다.-「편지」에서
그녀내면에자리잡고있는근원적인모순들,이질적인요소들을감싸안는한가지는,아마도그녀가느끼던,아주작은떨림에도존재를흔들리게하던고통,그녀가끌어안고자한세상의고통이리라.현실의파괴적폭력에맞서뒤라스는침묵과광기의글쓰기라는자신만의폭력을행사한다.장식없이벌거벗은공간에서울려퍼지는“목소리없는외침”은그출구없는비극성으로독자를매혹하고,어쩌면각자가마음속에품고있을고통을향해,멀리서,아주멀리서,위안을건넨다.-「옮긴이의말」에서
20세기프랑스문학을대표하는작가이자특유의‘여성적글쓰기’,미증유의작품세계로세계문학사에커다란족적을남긴마르그리트뒤라스의가장내밀하고사적인에세이『물질적삶』이민음사쏜살문고로출간되었다.프랑스령인도차이나에서경험한사랑과상실,가족의비극을시공간과인칭을넘나드는대담하고도시적인문체로그려낸『연인』(1984년공쿠르상수상작),알랭레네의연출로영화화되어작가에게전세계적명성을안겨준『히로시마내사랑』,자크라캉등유명석학,비평가들의열렬한관심을받으며프랑스문단에서가장빈번하게연구되는작품『모데라토칸타빌레』,『롤베스타인의환희』,문학과영화의경계를허물며20세기문화사에뚜렷한영향을끼친「인디아송」등에이르기까지마르그리트뒤라스의위업은오늘날에도여전히독자와평단을매료하고있다.인물과사건,감정과심리의흐름을극도로섬세하고함축적인언어로표현하며하나하나의작품을매번신비한수수께끼처럼제시해온뒤라스는,오직‘작품’을통해서만이야기하고외치고자하였던자신의바람대로주변비평에예민하게반응하거나일일이해명하고자애쓰지않았다.그런까닭에뒤라스의작품은종종논란이되었고,자전적성향의이야기들은작가의실제삶과한데맞물리면서온갖의문을불러일으키기도했다.
『물질적삶』에수록된마흔여덟편의글들은작가스스로명확히밝히고있듯이“책도아니고,일상의사건에서벗어나”있다.다만‘읽을수있는글’일뿐통념에부합하지않으며,상식에따라분류할수도없다.이를테면이책은,영화감독이자마르그리트뒤라스를주제로여러편의다큐멘터리를제작한제롬보주르에게작가자신이허심탄회하게‘털어놓은’모든것에대한아무것도아닌이야기다.그러나다른한편으로이책은작품이면에자리한작가의삶,사랑의잔상과죽음의긴그림자를오롯이보여준다는점에서뒤라스의애독자뿐아니라,거장이작품세계를들여다보고자하는모든사람들에게풍부한이야깃거리를제공해준다.특히나작품활동내내되풀이되어온불가능한사랑과치명적인상실그리고끝없는고통과불안,이른바인간존재의심연에대한뒤라스의냉철한통찰은일종의카타르시스와위안을선사한다.학생혁명과빈곤층가족의죽음,이민자문제와천박한속물자본주의,롤랑바르트의저작과미셸푸코의죽음등작가뒤라스를둘러싼세태와인물은물론,거듭된실패끝에광기에사로잡힌어머니의죽음,어린시절의기이한성애경험,이제껏좀처럼언급한바없는제라르자를로와함께한난폭한사랑,최후의반려자얀앙드레아와의관계등지극히사적인부분까지거리낌없이망라되어있다.그중에서도뒤라스본인조차이야기하기를주저하였던‘알코올중독’경험은가장적나라하고,처참하리만치생생하게기록되어있다.삶의고통과우울,한없는불안에얽매여병적인중독에시달려야했던뒤라스의초상은제각기인생의무게를견뎌내야만하는모든이들에게심심한위로를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