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의 보랏빛

배반의 보랏빛

$9.80
Description
글쓰기를 생활의 유일한 연장으로 삼은 일엽편주의 삶
아직 낡은 시대에 선보인 찬란한 서정의 조각들

‘이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거야.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겠어.’ 하고는 두건 겉에서 귀를 누르며 총총히 대여섯 보를 뛰기 시작하자 가슴의 두근거림은 어느새 멈춰 기분이 차분히 맑아졌으며, 핏기 없는 입술에는 쌀쌀맞은 웃음마저 떠올랐다.” ㅡ「배반의 보랏빛」에서
저자

히구치이치요

히구치이치요는일본근대여성문학의선구자이자여성서사의신경지를개척한인물이다.2004년일본5000엔권의도안으로선정되며화제를모았다.본명은나쓰(奈津),1872년도쿄에서하급관리의딸로태어났다.유년에는중산층가정에서고전문학을접하는등비교적모자람없이배우며자랐으나,큰오빠를폐결핵으로잃고,사업에실패한아버지마저병몰하며,방년18세에파산과동시에파혼을당한다.이에일가호주로서이상황을타개하고자소설을써돈을벌기로결심하는데,이는지인의성공사례에서동기를얻은것이었다.1892년「어둠진벚꽃」으로문단에등장한이래「파묻힌나무」로호평을얻지만생활고는여전했다.급기야요시와라유곽근처에서잡화점을운영하는가운데「꽃속에잠겨」를발표하기도했으나,집필에매진하기위해폐업한이후‘기적의14개월’이라불리는기간동안「섣달그믐」,「가는구름」,「도랑창」,「십삼야」,「키재기」등수작을완성한다.「배반의보랏빛」으로문학적전기를꾀한듯하나「바다대벌레」에모티프를제공하고미완에머물렀다.1896년11월,25세에폐결핵악화로세상을떠났다.

목차

다마다스키
여름장마
경상
눈오는날
캄캄한밤
처마에걸린달빛
이아이
바다대벌레
배반의보랏빛
작가연보

출판사 서평

2004년선보인일본화폐의주인공으로익숙한근대소설가히구치이치요.극심한가난에시달린그녀의짧은생을돌이켜보자면,고액권화폐속그의초상은얄궂은농담같다.아버지와큰오빠의죽음으로16세에호주가된이치요는실질적인집안의가장으로서,생계수단을소설로삼은전업작가다.메이지시대초,아직불안정한미디어였던‘소설’에본인과가족의삶을태우고나서,그는나쓰라는본명대신달마대사가강을건널때탔다는일엽편주의이름을빌려이치요(一葉)라자처한다.상류층사교계등협소한세계의경험,결혼이라는대단원구성이주되었던당시여성소설의스펙트럼을훌쩍벗어나,다양한처지의여성들삶과고뇌를그려낸히구치이치요의문학은,그저자신에게떨어진조건너머로본인스스로설정한한층중요한것,즉문학을향한소신을단호한에너지로뿜어낸다.
그간여러판본으로흩어져있던서정성짙은단편들을한데모은데더해상당량의초역을실은쏜살문고소설집세권『가는구름』,『꽃속에잠겨』,『배반의보랏빛』은히구치이치요의소설22편전부를감상할수있는드문기회를선사한다.옮긴이는젊고도세심한번역으로,작가가삶의도정에서가졌을법한사상내지는사고의경향이헤아려지도록각권마다전ㆍ후기작을아울러목차를구성하고표제작을선정했다.3권에는미완작인「배반의보랏빛」을비롯,「여름장마」,「바다대벌레」등이치요의명단편이담겨있다.이번소설집표지를장식한일러스트레이터마리아메뎀의단순하고도상징적인선과색상은,지난시대이자먼공간에자리한소설가의목소리와어우러지며색다른울림을조성한다.현실의진창속에서도줄곧추구하고,끝내는붙잡아낸히구치이치요의진실이발하는빛을마주치는계기가되기를희망한다.

눈물이적신무거운소매,
그끝으로나와맞잡은우정의두손

유코가고마워서오야에의손을잡고“전생에우린무슨사이였을까.친자매한테도없을배려구나.이뒤에도잘부탁한다.앞으로는특별한일이라면뭐든지네충고를따르마.이제방금전과같은말은하지않을테니용서해주렴.”이라고하자오야에는사과를받기도황송해,“기다리는자에게복이온다고하잖아요.”하고가벼운듯이말했지만,의리는무거웠기에눈물에젖어무거운소매는마를새가보이지않았다.…..한가지를꺾어서한송이는주인에게,또한송이는자기에게꾸며보는것도기분을풀어주는일이었다.각자서로의마음은알수도없이논두렁길을오가며놀다어느덧해가저물었다.ㅡ「여름장마」에서

흔히이치요문학은냉담한세계를향해부르짖는외톨이의고독한외침이라표현되지만,그속에는귀한우정이고요히,그러나눈에띄게빛을발한다.특히신분을넘어선소녀간의갈등과우정을다룬「여름장마」는여러날을거듭해서비가내리지만,사계속에서보면잠깐의궂은시기에불과한장마처럼,서로의마음을알지못하면서도해가저물도록시간을함께보내는거룩하고도소박한우정의온기가돋보이는작품이다.궁핍하고외로운삶을절절히경험한만큼,이치요는인간에게가장소중한가치가무엇인지끊임없이일깨운다.그의문학안에서지배와피지배의계층적질서는그저일시적인현상이자겉껍질에지나지않는셈이다.

가진자,배운자의크게타이르는소리보다
연약한생의나직한목소리에귀기울인기록

이아이의웃는얼굴처럼바로,눈앞에서집을뛰쳐나가려한제발을붙잡아주거나틀어진마음을가라앉혀준건없어요.무심히팥베개를베고양손을어깻죽지에내던지며잠들어있을때보이는이아이의얼굴은,대학자가머리꼭대기에서큰소리로타이르는것과는다르게마음으로부터눈물을차오르게하기에,아무리제가고집이세다고하지만저도“아이는조금도불쌍하지않다고요!”하며억척부리지는못해요.ㅡ「이아이」에서

새로운시대,자본주의의파도로에도적인일상이난파되던시점,실제자신이중류계급에서빈곤층으로전락하고고된육체노동을체험하면서,이치요는인간을인위적인신분으로구별하는허상을깨달았다.진실은여성과아이,처참한처지의사람들에게서구해야할것을안이치요의문학은한인간의본질과그를뒤덮은표피를예리하게발라낸다.
이치요의후기명작「바다대벌레」는하급관료로서소박하게사랑하며살고자했던요시로가아내를잃고나서물불가리지않고돈을좇는붉은귀신으로변하는과정을담았다.차별과억압이어느때보다심했던메이지시대에,쉽게입신양명하지못하는자아,맺어지지않는사랑,가련한밑바닥인생을제삶과견주며이차가운세상을뜨겁고도섬세한필치로그려냄으로써이치요는낡은시대의변화의여명을길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