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운하 시대 (1415~1784 |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 양장본 Hardcover)

대운하 시대 (1415~1784 |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 양장본 Hardcover)

$28.00
Description
유럽에 대항해 시대가 있다면
중국에는 대운하 시대가 있다
저서 『대운하와 중국 상인』으로 중국 근세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조영헌 교수가 10년 만에 주저를 선보인다. 중국의 ‘명·청 시대’를 ‘대운하 시대’라는 획기적 개념으로 포착해 낸 책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제국이었던 중국은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약 1800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운하를 통해 물자와 인력, 정보를 실어 나르며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대운하 시대는 중국의 ‘바다 공포증’을 더욱 강화해 제국의 쇠퇴를 불러온 역설의 시대이기도 했다. 저자는 황제와 관리, 상인, 해적, 선교사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생생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대운하 시대를 대항해시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사적 시간으로 끌어올린다.
저자

조영헌

(曺永憲)
서울대학교동양사학과를졸업하고중국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의방문학자(2003~2004년)와하버드-옌칭연구소의방문연구원(2004~2006년)을거쳐,2006년에서울대학교동양사학과에서논문「대운하와휘주상인」으로박사학위를취득했다.홍익대학교역사교육과교수를지냈고,현재고려대학교역사교육과교수이다.
15년간‘인문학과성서를사랑하는모임(인성모)’을주선해왔으며,2021년부터고려대학교의지원을받아‘북아시아민족및지역사연구회’를구성하여공동연구중이다.중국근세시대에대운하에서활동했던상인의흥망성쇠및북경수도론이주된연구주제이고,앞으로동아시아의해양사와대륙사를겸비하는한반도의역사관점을세우는것에관심이있다.저서로『대운하와중국상인:회·양지역휘주상인성장사,1415~1784』와『옐로우퍼시픽:다중적근대성과동아시아』(공저),『주제로보는조선시대한중관계사』(공저)등이있고,역서로『하버드중국사원·명:곤경에빠진제국』과『바다에서본역사:개방,경합,공생-동아시아700년의문명교류사』(공역)등이있다.

목차

추천의글

여는글중국의‘해양력’과‘대운하시대’
정화는해양중국의선구자인가?/‘대항해시대’와의비교/‘유럽의성공’때문인가?/유럽중심주의와중국중심주의를동시에경계하면서/‘해금’도‘개해금’도아닌중국의관행을어떻게이해해야할까?/대운하를통해국내와외부의물류추세를가늠할수있게된시대/협의의대운하시대의두가지특징/이책의구성과서술방식

1장1415년,영락제가북경천도를준비하며대운하를재건하다
청강포의개통과‘파해운’/파해운/정화원정단이가져온기린/쿠데타와살육의어두운그림자/북경천도/북경천도성공의시금석,대운하재건/북경천도와쿠빌라이칸/왜영락제는해운을금지했을까?/대운하로조운이일원화된의미/정화파견과조공국의증가/왜중국은정화이후바다로의진출을주저했는가?/1415년,포르투갈의세우타점령

2장1492년,휘주상인이염운법의변화로새로운기회를잡다
1492년,섭기의운사납은제실시/북변으로의군향조달과연계된명대의소금유통법/1449년,토목보의변을통한‘육상제국’화/개중법의첫번째수혜자,산서상인과섬서상인/회양지역의중심도시,양주/휘주상인에게천재일우의기회가된운사납은제/휘주상인의대외진출과은경제의확산/환관노보의파견과염상계의판도변화/휘주상인의선택/또다른선택지는없었을까?/휘주상인이자해상인왕직이시사하는바/다시1492년을생각하다

3장1573년,조운총독왕종목이바닷길로조운을시도하다
1573년,바다에서조운선이전복되다/해운에대한비방의견/북경민심을달래기위한세가지해결책/장거정이라는정치적변수/‘파해운’,해운이다시정지되다/1573년의해운‘요절’이지닌세계사적의미

4장1600년,예수회선교사마테오리치가대운하를평가하다
1600년,마테오리치와서광계의첫만남/1600년,리치는왜남경에있었나?/대운하를이용하여북경을왕래했던리치/외국인조공단이탑승한선박/조운선의‘편법’운용을발견한리치/마테오리치의난제/바다에대한두려움의실체:(1)왜구/바다에대한두려움의실체:(2)임진왜란/바다에대한두려움의실체:(3)유럽의무장세력/서광계의변경인식/1608년무렵에그려진중국인의해양지도/1600년의세계사적의미

5장1666년,소금상인정유용이천비궁을다시건립하다
1666년,양주천비궁의이전건립/정유용의천비궁재건이야기/마조신앙의형성과확산/해신에서하신으로의변화/위치변화를통한양주천비궁의기능회복/대운하의말뚝제거사업/정유용의노림수/아담샬의사망과양광선의공격/1666년,‘경이로운해’

6장1684년,강희제가대운하를이용해강남순방을시작하다
1684년,강희제의첫번째강남순행/남순의목적/하공과조운을한꺼번에해결하는묘책/네곳의해관설치/정씨해상세력의계보/천계령의부작용/해양교역에대한새로운활력소/안보와이윤의‘절충’/황제의남순로가된대운하가의미하는것

7장1757년,건륭제가남순이후서양선박의해관을하나로줄이다
영파에출현한영국선박의정체/제2의마카오가될것을우려하다/건륭제의2차남순과그배경/건륭제와양주염상의유착/1757년,네곳에서한곳으로줄어든바다의창구/건륭제의두려움?/우려와두려움의실체(1):늘어나는해외이주와‘불온한’서양세력과의결탁/우려와두려움의실체(2):기독교의내지전파와확산되는기독교네트워크/왜광주인가?/서북변경정책과연동하는해양정책

8장1784년,건륭제가대운하를이용해마지막강남순행을마치다
1784년,건륭제의여섯번째남순/마지막남순에대한양주상인의아쉬움/1784년의광주교안사건/서양인과회교도의연계가능성에노심초사하는건륭제/미·중교역의시작과‘아메리칸임팩트’/레이디휴스호사건의여파/대운하시대의종점,1784년

맺는글‘대운하시대’의종결,그이후
‘주저’하다는표현을주저한이유/해양진출동기의결핍?/북방민족의위협?/남북통합의아이콘,대운하를통해본결핍론과위협론/바다의통제불가능성에대한‘두려움’과‘통제적개방’/‘바다공포증’에대한예의바른해석/세계문화유산에등재된‘중국대운하’와일대일로정책사이의연관성


참고문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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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세계최대의내륙수상운송네트워크대운하,
변방의도시북경을제국의수도로만들다

중국의대운하라고하면우리는보통수나라의대운하를떠올린다.그러나이책에서다루는대운하는수나라의대운하보다약800년뒤의것으로,명나라제3대황제인영락제가완성했다.영락제는즉위직후부터수도이전을추진했다.남경(난징)을떠나북경(베이징)으로옮길생각이었다.많은역사가가북경천도의‘이유’를설명하려고했다.북경은몽골과너무가까웠고,땅은척박했다.게다가경제중심지인강남지방과지나치게멀었다.명은금이나원처럼북방에기원을둔정복왕조도아니었다.
저자는북경천도의‘과정’에주목한다.천도에앞서영락제는대운하를대대적으로정비하는사업에착수했다.고도가다른지역의수심을고르게했고,방죽을쌓아범람을막았으며,갑문을설치해물줄기를돌림으로써막혔던구간을새로개통했다.이렇게완성된물길은이전시대의대운하와는비교도안될정도로많은양의물자를실어나를수있었다.대운하가북경천도의필요조건을충족시킨것이다.공급문제가해결되자영락제는천도를공식화했고,이때확립된정치중심지북경,경제중심지강남이라는구도는오늘날까지이어진다.

번영도쇠퇴도모두대운하에서시작되었다
중국은왜문을닫아걸었는가?

앞서보았듯이수도북경은몽골의위협에노출되어있었는데,이때안보면에서중요한역할을한것이대운하의염상(소금상인)들이었다.대운하가재정비되면서원대에쇠퇴했던소금의생산과유통도다시활발해졌다.중국의역대왕조는소금전매권을쥐고있었는데,이는명대에도마찬가지였다.염상들은조정으로부터소금을판매할권리를얻는대신에북변으로군향(군량)을직접조달했고,제도가바뀐뒤에는은을납부하는방식으로국방에기여했다.
대운하를무대로활동했던청초기의상인정유용은눈여겨볼만한사례한가지를제공한다.정유용은동료상인들과함께사비를들여대운하의도시양주에천비궁을재건했는데,천비는항해신마조를가리킨다.바다의여신이이시기에이르러서는내륙에서운하의여신으로모셔질정도로대운하는번영하고있었던것이다.관리도아닌일개상인이지역사회의공익사업을주도할정도로위상이높았다는점도짚고넘어갈대목이다.
하지만대운하의번영에는이면도있었다.영락제는대운하를개통한후바닷길을통한조운(漕運)을금지했다.이에명의만력제때조운총독을지낸왕종목은남쪽에서수도로곡물을운반할때대운하뿐만아니라바다도이용하자고제안했다.일리있는주장이었다.황하의범람은대운하의원활한통행을주기적으로위협했고,훗날중국을방문한예수회선교사마테오리치가증언했듯이대운하는지나갈차례를기다리는선박들로교통체증이일어날정도로미어터지는상황이었다.
왕종목의제안은어찌되었을까?왕종목은실각했고,중국은바다로나아갈기회를또다시포기했다.표면적원인은정치적갈등이었지만,저자는그진정한원인을마테오리치가제기한“바다와해안을침범하는해적에대한두려움”에서찾는다.명과청은모두바다로나아가는것을금지하는‘해금’을기본정책으로삼았는데,동남해안에서창궐한왜구나임진왜란의발발,유럽무장세력의진출등으로이러한기조는더욱강화되었다는것이다.

중국은왜해양진출을‘주저’했는가?
21세기중국의‘해양굴기’를어떻게볼것인가?

1684년,청의강희제는상해(상하이),영파(닝보),하문(샤먼),광주(광저우)에각각해양무역을담당할해관을설치하도록허용했다.전례가없는수준의개방적조치였는데,전해에대만의정씨세력을무너뜨린자신감의발로처럼보이기도했다.하지만동아시아까지진출한서양인들은지속해서추가로문호를개방하라고요구했고,강희제의손자건륭제는네곳의해관중세곳의문을닫는것으로응수했다.건륭제에게는통상에서이익을얻는것보다바다에서오는위협을막는것이더중요했다.
당시에청은굳이해양으로진출할필요를느끼지못할만큼전성기를누리고있었다.조부강희제가강남으로여섯차례순행한것처럼건륭제도강남을여섯차례방문했다.강희제의남순이민심을달래고치수의상황을살피는데집중했다면,건륭제의남순은대운하를따라내려오는유람의성격이강했다.건륭제의강남순행은대운하의상인들에게좋은기회였다.그들은황제를융숭하게대접함으로써명예와특권을얻었다.건륭제또한남순을통해강남의유력자들과유대를다지면서안정되고통합된제국의위세를과시할수있었다.대운하시대는절정에달해있었고,그무엇도부족함이없어보였다.
저자는중국이해양진출을‘주저’한이유로흔히꼽히곤하는‘지대물박(地大物博)’의논리,즉땅이넓고물자가풍부했기에해양으로진출하지않았다는논리가지닌부족한설득력이대운하를통해높아질수있다고본다.대운하가광대한제국내에서남북간의유통을원활하게하고물자를효율적으로이전함으로써균형발전을유도해‘결핍’을못느끼게했다는것이다.
그렇다면오늘날의중국이과거와는전혀다른방향의해양정책을추진하게된까닭은무엇일까?중국은근래에들어영락제시절에아프리카까지도달했다는정화함대의원정을재조명하는가하면,일대일로(一帶一路)정책을통해육상실크로드와나란히해상실크로드를강조하고있는데,이는남중국해의영유권주장등으로이어지고있다.이처럼신중화주의적프로파간다로역사를재해석하는상황에서대운하시대의흥망성쇠를되돌아보고중국은왜해양진출을주저했는지생각해보는것은해양대국으로거듭나려는21세기중국의‘해양굴기’를이해하는데좋은실마리가되어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