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평전 : 네 얼굴의 유의 (양장)

허준 평전 : 네 얼굴의 유의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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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동의보감』으로 조선의 의료 전통을 집대성한 의학자
실증에 근거해 우리 산천의 동식물 지식을 정리한 자연학자
애민과 제민 정신으로 역병에 맞서 공동체의 안녕을 구한 역학자
조선 최고의 명의, 유의(儒醫) 허준의 일생을 바로 읽는다
조선을 대표하는 명의이자 『동의보감』의 주인공, 평생을 의술과 의학에 헌신한 허준의 삶을 그린 『허준 평전』이 출간되었다. 일찍이 『동의보감』과 허준의 의학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래 조선 시대 의학사와 법의학 연구에서 일익을 담당해 온 역사학자 김호 교수(서울대 아시아연구소)가 그동안 축적한 성과와 새로 밝혀진 사실들을 반영해 허준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소설과 드라마로 형상화되어 대중에게 친숙한 허준의 이야기는 물론 더 극적이며 흥미롭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어긋나는 점도 많다. 서자 출신으로 내의원 의관에 봉직하며 스스로 목소리 낼 일이 거의 없었던 탓에 허준의 삶에는 사료에 남지 않은 불확실한 지점이 상당하다. 저자는 『양천허씨세보』와 『장성읍지』, 유희춘의 『미암일기』, 성혼의 『우계집』까지 허준을 기록한 각종 자료를 치밀하게 검토하며, 『동의보감』을 비롯해 일상의 구급을 위한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언해태산집요』, 감염병에 대응한 말년의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 등 그가 편찬한 의서들의 행간에서 일생을 의학에 투신하며 지향한 바를 읽어 낸다. 이로써 허준을 둘러싼 오해를 걷어 내고 역사상의 실제에 더해 의학자, 자연학자, 역학자로서 허준의 면모를 부각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마침내 동의의 전통을 수립한 의학자

허준(1539~1615)은 사대부 자제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사서삼경 등 유교 경전을 섭렵했으며, 노장과 불교의 서책까지 두루 읽었다. 당대 조선의 사상계는 성리학이 중심이었지만 도가를 지향하거나 실증의 중요성을 강조한 학자들 덕분에 다양한 풍경을 보이고 있었다. 유ㆍ불ㆍ선 삼교를 아우르면서도 성리학의 통치 기획에 부합하는 의서가 필요했다.
인간의 생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만큼 농업과 의술은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고 선정을 베푸는 데 필수적인 지식이자 기술이다. 조선을 ‘장수하는 땅’으로 만들고자 한 선조는 허준에게 의서 편찬을 명하며 병들기 전 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조선의 약재(향약재)를 활용하여 많은 백성들에게 혜택이 미치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조선 사람의 질병은 조선의 환경과 이곳에서 나고 자란 다양한 향약재로 치료할 수 있었다. 그 바탕에 조선의 유구한 향약 전통과 인간의 심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다. 기질(氣)의 차이를 알려면 인간의 보편성(理)에 대한 이해가 동반되어야 한다. 조선 사람은 보편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조선인의 기질에 따라 특별했다. 허준의 동의(東醫)는 중국의 남의ㆍ북의에 비해 동쪽 사람들의 기질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인간다움을 갖춘 보편적인 사람을 치료하는 특별한 방법이었다.
『동의보감』의 보편적 인간관은 근본적으로 성리학의 수양론과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자연을 모사한 소우주로 설명하고 성리학자들이 원하는 도덕적 삶, 즉 당위(사람다움)의 근거를 자연에 두었다. 인간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함은 그것이 본성(자연)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윤리를 결합하고 심신의 절제와 조화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삶의 방법으로 제시한 『동의보감』은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정치적 성과였다. 인간의 도덕적 삶과 그 토대인 자연의 원리를 탐구함으로써 『동의보감』은 조선 사회에 깊이 뿌리 내렸으며 질병 치료나 약물 투여에 국한된 단순한 방서(方書) 이상의 의서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허준이 단순한 의원이 아니라 유학을 토대로 불교와 도가의 인간론을 통섭할 수 있는 유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술(仁術)은 곧 인정(仁政)이다
사회적 정치적 실천의 모범을 보인 공공 지식인의 초상

동의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허준의 업적은 조선 의료의 오랜 전통 지식을 속방(俗方)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속방 가운데 상당수는 왕실 의료를 담당했던 내의원 어의들의 처방이었기에 『동의보감』에는 조선 왕실의 의약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허준은 민간에서 널리 쓰이던 향약 전통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속방의 이름으로 수록했다. 향약재의 명칭과 함께 약재를 채취하고 말리는 방법, 약재를 제조하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기록하여 향촌에서도 쉽게 활용할 수 있었다. 고려 말 이후 수백 년 동안 전래된 전통 의약 지식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에는 허준의 노고가 큰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허준은 조선의 수많은 생물과 약재들 이름에 한글을 부기하여 민간에서 활용하기 쉽도록 정비했다. 조선에 존재하는 초목과 동물, 날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을 정확하게 명명하고 약재의 향명(조선 이름)을 밝혀 널리 알린다면 약재의 혜택을 누릴 사람도 많아질 것이었다. 향약으로 대체할 수 있는 약재를 굳이 중국에서 구입해 올 이유가 없었다. 명(名)과 실(實)의 상부, 조선 산천의 약재와 향명의 연결은 『동의보감』이 이룩한 가장 어려운 학문적 성취이면서 가장 실용적인 지식이었다. 『동의보감』에 등장하는 여러 약제와 음식 처방(食治)이 오늘날까지도 널리 알려지고 활용되는 이유다.
노년에 이른 허준은 1612~1613년에 크게 유행한 온역과 독역에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역병 의서 집필에 헌신했다. 칠순의 나이에도 난생처음 겪는 당독역(성홍열)을 조사하고 치료하느라 환자들의 임상과 진단을 마다하지 않았다. 역병을 여귀나 마마의 소행으로 보고 약물 치료를 피하던 시대였다. 귀신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 하늘에 빌거나 음식을 올릴 뿐이던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치료를 권하려면 역병의 원인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과 설득의 과정이 필요했다. 또한 환자의 증세가 가벼운 단계에서 심각한 수준으로 변할 때마다 증상에 맞는 구체적이고 손쉬운 처방을 제공해야 했다. 세속의 구태와 금기에 구애되지 않고 새로운 의학 지식을 수용한 허준의 치료법은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으로 결실을 맺었으며,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 증상의 관찰과 묘사가 세밀하다. 주술이나 미신을 배제하고 정확한 진단을 강조한 그의 경험적, 합리적 태도는 후대에도 널리 칭송받았다.
역병 유행은 한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붕괴를 부르는 심각한 문제다. 역병의 극복은 환자 개인의 감염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으며 환자를 돌보는 최소 단위인 가족의 유지와 이를 넘어 향촌 공동체의 안녕이야말로 궁극의 목표였다. 허준은 바로 인술이 곧 인정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강하게 인식하고 실천한 유의였다.

■ 의국의 정신으로 평생 의학을 연구한 허준의 생애

허준은 내의원 출사 전에는 서울과 호남을 오가며 활동한 유의였다. 양친의 집안 모두 무관 출신으로 아버지 허론은 무과에 합격한 후 지방관을 역임했고 외가인 영광 김씨도 전라도 지역의 무반(武班)이었다. 허준의 어머니는 서녀로 지방관이었던 허론의 첩이 되어 서자 허준을 낳았다. 조선의 서자들은 문ㆍ무과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으며 관로 진출에 제약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잡과로 출신하거나 의술을 익혀 지방의 유의로 활동하곤 했다. 유의들은 지역의 양반이나 중앙에 진출한 고관대작의 신병(身病)을 치료하고 그들 가족과 친구들의 건강을 돌보면서 책객처럼 드나들었다.
허준은 젊은 시절 경학과 사서를 읽어 여느 선비들과 다르지 않은 학식을 갖추었지만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선조 대의 대표적인 호남 사림 중 한 사람인 미암 유희춘은 사서삼경과 의서에 밝고 경향에 이미 의술로 이름을 떨치던 허준을 잘 알고 있었다. 주요 관직을 역임한 유희춘의 천거로 30대에 내의원에 들어간 허준은 당대 최고의 명의 양예수를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이후 허준은 사망할 때까지 내의원 어의로 활동했다. 그만큼 내의원 의관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 한 사람의 몸을 치료하듯 한 나라의 병을 치료하는 의국(醫國)의 정신으로 충만했다. 의학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정치였다. 40대에 진맥에 관한 의서를 평설한 후 허준의 ‘의국의 의학론’은 더욱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의술이 더욱 원숙해진 허준은 50대 이후 전쟁 중에 사라진 구급용 의서의 집필에 전념했다. 임진왜란 직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려면 구급용 언해본 의서들이 절실했다. 언해본 의서를 마무리한 후 드디어 1610년에 조선 최고의 의서 『동의보감』의 편찬 작업을 완료했다. 『동의보감』의 간행(1613)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1612년과 이듬해인 1613년 발생한 온역 및 당독역의 치료법을 집필하여,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이 연이어 간행되었다. 이처럼 말년까지 감염병 연구에 매진한 허준은 1615년 향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자

김호

저자:김호

서울대학교국사학과를졸업하고동대학원에서「허준의동의보감연구」로박사학위를받았다.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책임연구원과경인교육대학교사회교육과교수를거쳐현재서울대학교아시아연구소에재직중이다.조선의통치시스템과위기극복의역사에관심을기울이면서미래지향의한국학을모색중이다.

저서로『허준의동의보감연구』,『조선왕실의의료문화』,『조선의명의들』,『정조의법치』,『정약용,조선의정의를말하다』,『100년전살인사건:검안을통해본조선의일상사』등이있고『신주무원록』,『다산의사서학』(공역)등을우리말로옮겼다.

목차

책을내며
들어가는글:역병의시대에허준을생각하다

1역사속의허준
역사와허구
허준의젊은시절
미암유희춘과의인연
명의양예수와허준의내의원시절
인생을바친의서편찬

2동의의전통을수립하다
자연을닮은인간
이용후생과향약
속방의재발견
구급과역병대책

3조선의생물을탐구하다
향명,말과사물의일치
다양한동물성약재의활용
새로운본초와자연학의심화

4역병에맞서백성을구하다
1612년온역발생과『신찬벽온방』
온역을물리치는다양한방법들
연속되는당독역유행과『벽역신방』
허준의합리적태도와독창성

나가는글:네얼굴의허준을마무리하며

연보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동의보감』으로조선의의료전통을집대성한의학자
실증에근거해우리산천의동식물지식을정리한자연학자
애민과제민정신으로역병에맞서공동체의안녕을구한역학자
조선최고의명의,유의(儒醫)허준의일생을바로읽는다

인간과자연에대한이해를바탕으로
마침내동의의전통을수립한의학자

허준(1539~1615)은사대부자제들과마찬가지로어려서부터사서삼경등유교경전을섭렵했으며,노장과불교의서책까지두루읽었다.당대조선의사상계는성리학이중심이었지만도가를지향하거나실증의중요성을강조한학자들덕분에다양한풍경을보이고있었다.유/불/선삼교를아우르면서도성리학의통치기획에부합하는의서가필요했다.
인간의생사와직접적으로연관된만큼농업과의술은백성의삶을안정시키고선정을베푸는데필수적인지식이자기술이다.조선을‘장수하는땅’으로만들고자한선조는허준에게의서편찬을명하며병들기전예방의중요성을강조하는동시에조선의약재(향약재)를활용하여많은백성들에게혜택이미치도록하라고당부했다.
조선사람의질병은조선의환경과이곳에서나고자란다양한향약재로치료할수있었다.그바탕에조선의유구한향약전통과인간의심신에대한깊은이해가있다.기질(氣)의차이를알려면인간의보편성(理)에대한이해가동반되어야한다.조선사람은보편적인간이면서동시에조선인의기질에따라특별했다.허준의동의(東醫)는중국의남의/북의에비해동쪽사람들의기질을고려하면서,동시에인간다움을갖춘보편적인사람을치료하는특별한방법이었다.

『동의보감』의보편적인간관은근본적으로성리학의수양론과부합하는것이기도했다.허준은『동의보감』에서인간의몸과마음을자연을모사한소우주로설명하고성리학자들이원하는도덕적삶,즉당위(사람다움)의근거를자연에두었다.인간이윤리적이고도덕적이어야함은그것이본성(자연)이기때문이다.자연의법칙과인간의윤리를결합하고심신의절제와조화를자연스럽고당연한삶의방법으로제시한『동의보감』은조선성리학의중요한정치적성과였다.인간의도덕적삶과그토대인자연의원리를탐구함으로써『동의보감』은조선사회에깊이뿌리내렸으며질병치료나약물투여에국한된단순한방서(方書)이상의의서로자리매김했다.이는허준이단순한의원이아니라유학을토대로불교와도가의인간론을통섭할수있는유의였기에가능한일이었다.

인술(仁術)은곧인정(仁政)이다
사회적정치적실천의모범을보인공공지식인의초상

동의의정체성을확립하는데빼놓을수없는허준의업적은조선의료의오랜전통지식을속방(俗方)으로집대성한것이다.속방가운데상당수는왕실의료를담당했던내의원어의들의처방이었기에『동의보감』에는조선왕실의의약문화가고스란히담겨있다.또한허준은민간에서널리쓰이던향약전통을수집하고정리하여속방의이름으로수록했다.향약재의명칭과함께약재를채취하고말리는방법,약재를제조하는방법까지상세하게기록하여향촌에서도쉽게활용할수있었다.고려말이후수백년동안전래된전통의약지식이후대에전해질수있었던것에는허준의노고가큰역할을했다.
이외에도허준은조선의수많은생물과약재들이름에한글을부기하여민간에서활용하기쉽도록정비했다.조선에존재하는초목과동물,날짐승과바다의생물들을정확하게명명하고약재의향명(조선이름)을밝혀널리알린다면약재의혜택을누릴사람도많아질것이었다.향약으로대체할수있는약재를굳이중국에서구입해올이유가없었다.명(名)과실(實)의상부,조선산천의약재와향명의연결은『동의보감』이이룩한가장어려운학문적성취이면서가장실용적인지식이었다.『동의보감』에등장하는여러약제와음식처방(食治)이오늘날까지도널리알려지고활용되는이유다.
노년에이른허준은1612~1613년에크게유행한온역과독역에서백성들을구하기위해역병의서집필에헌신했다.칠순의나이에도난생처음겪는당독역(성홍열)을조사하고치료하느라환자들의임상과진단을마다하지않았다.역병을여귀나마마의소행으로보고약물치료를피하던시대였다.귀신을화나게해서는안된다고여겨하늘에빌거나음식을올릴뿐이던사람들에게적극적인치료를권하려면역병의원인에대한합리적인설명과설득의과정이필요했다.또한환자의증세가가벼운단계에서심각한수준으로변할때마다증상에맞는구체적이고손쉬운처방을제공해야했다.세속의구태와금기에구애되지않고새로운의학지식을수용한허준의치료법은『신찬벽온방』과『벽역신방』으로결실을맺었으며,지금의기준으로보아도그증상의관찰과묘사가세밀하다.주술이나미신을배제하고정확한진단을강조한그의경험적,합리적태도는후대에도널리칭송받았다.
역병유행은한개인의고통이아니라공동체전체의붕괴를부르는심각한문제다.역병의극복은환자개인의감염을예방하거나치료하는데머무르지않으며환자를돌보는최소단위인가족의유지와이를넘어향촌공동체의안녕이야말로궁극의목표였다.허준은바로인술이곧인정이라는사실을누구보다강하게인식하고실천한유의였다.

의국의정신으로평생의학을연구한허준의생애

허준은내의원출사전에는서울과호남을오가며활동한유의였다.양친의집안모두무관출신으로아버지허론은무과에합격한후지방관을역임했고외가인영광김씨도전라도지역의무반(武班)이었다.허준의어머니는서녀로지방관이었던허론의첩이되어서자허준을낳았다.조선의서자들은문/무과시험에응시할수없었으며관로진출에제약이많았기때문에이들가운데일부는잡과로출신하거나의술을익혀지방의유의로활동하곤했다.유의들은지역의양반이나중앙에진출한고관대작의신병(身病)을치료하고그들가족과친구들의건강을돌보면서책객처럼드나들었다.
허준은젊은시절경학과사서를읽어여느선비들과다르지않은학식을갖추었지만과거에응시하지않았다.선조대의대표적인호남사림중한사람인미암유희춘은사서삼경과의서에밝고경향에이미의술로이름을떨치던허준을잘알고있었다.주요관직을역임한유희춘의천거로30대에내의원에들어간허준은당대최고의명의양예수를만나는행운을누릴수있었다.이후허준은사망할때까지내의원어의로활동했다.그만큼내의원의관으로서의정체성이강했다.한사람의몸을치료하듯한나라의병을치료하는의국(醫國)의정신으로충만했다.의학은단순한기술이아니라정치였다.40대에진맥에관한의서를평설한후허준의‘의국의의학론’은더욱깊어진것으로보인다.
의술이더욱원숙해진허준은50대이후전쟁중에사라진구급용의서의집필에전념했다.임진왜란직후도탄에빠진백성들을구하려면구급용언해본의서들이절실했다.언해본의서를마무리한후드디어1610년에조선최고의의서『동의보감』의편찬작업을완료했다.『동의보감』의간행(1613)을기다리는동안에도쉬지않고1612년과이듬해인1613년발생한온역및당독역의치료법을집필하여,『신찬벽온방』과『벽역신방』이연이어간행되었다.이처럼말년까지감염병연구에매진한허준은1615년향년76세의나이로세상을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