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누구보다도 많은 책을 평생 읽었던 독자 프루스트는 말한다.
책은 질문을 던지고, 독자의 응답을 기다릴 뿐이라고.
독자인 당신이 책의 물음에 답할 때,
비로소 그 책은 당신에게 존재하는 책이 된다.”
책은 질문을 던지고, 독자의 응답을 기다릴 뿐이라고.
독자인 당신이 책의 물음에 답할 때,
비로소 그 책은 당신에게 존재하는 책이 된다.”
프루스트라는 고원에 올라앉아 읽기와 쓰기를 사유하다
『느낌과 알아차림』은 오직 한 작품을 3년 4개월 동안 읽고 또 읽어간, 한 특이한 독자의 유례없는 독서 후기다. 읽어간 작품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어간 독자는 고전 탐독가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은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 『평균의 마음』의 작가 이수은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하 『시간』)는 ‘언젠가는 완독해야 할 고전’으로 빠짐없이 꼽히지만, ‘아무도 다 읽지는 않는 걸작’의 대명사가 된 대작이다. 갈리마르 출판사의 1927년 초판본 기준 3031쪽, 126만 7069단어, 2022년 완간된 민음사 번역본 기준 총 13권, 약 5600쪽, 300만 자가 넘는다. 『시간』은 끝날 듯 끝이 나지 않는 지독한 만연체의 문장들(예컨대 931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한 문장)과 유난한 길이에 비해 유난히 사소해 보이는 이야기로도 악명 높다. “2000명에 이르는 등장인물의 약 97퍼센트”가 모두 대화로만 언급될 정도로 한담과 사색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라니! 독해의 난이도에 따른 매우 낮은 완독률과는 대조적으로 이 작품이 문화의 다양한 층위에서 여전히 열렬히 소비되는 현상들은 놀랍다. ‘홍차와 마들렌’으로 대변되는 프루스트 효과, 센티멘탈한 기억을 소환하는 상품 마케팅, 소설 속에서 언급된 그림, 음악, 작품, 장소 들을 찾아보는 다양한 강의와 문학 기행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와 같은 열광은 대부분 프루스트라는 작가의 생애와 이미지만을 소환하고 소비하는 데에 그친다.
『느낌과 알아차림』은 “안 읽었다고 순순히 인정하기는 내키지 않지만, 읽었다고 섣불리 말했다간 봉변을 당할 것” 같은 이 문제작을 한번은 자기만의 눈으로 읽어내리라는, 저자의 작은 의협심(!)에서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는 데도 필생의 지구력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시간』을 읽고, 또다시 읽으며 품게 된 일련의 ‘의아함’들은 프루스트와 이 작품에 관한 또 다른 책들을 찾게 했고, “프루스트라는 거인의 장력”에 사로잡혀 쉽게 해독되지는 않지만, 매혹적인 기호들로 가득한 『시간』을 놓지 못하는 날들은 점점 길어졌다. 1년에서, 2년으로, 2년에서 3년으로 ‘읽기’의 나날이 늘어나는 동안 맞닥뜨린 당혹감들, 프루스트의 전기적 일화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감상, 글이 쓰인 맥락에 대한 몰이해로 점철된 공허한 찬사, 그저 “무수한 단상들로 이루어진 잠언집으로, 심오한 심리 철학 예술의 아포리즘으로 받아들이며 작가의 자전적 일기나 일화의 편린으로, 맥락 없이 발췌된 문장들로” 『시간』을 단정하는 상투적 소비에 대한 불만은 더 치밀한 독해로 이어졌고, 『시간』의 핵심에 가닿기 위해 스스로 찾아낸 물음들, 『시간』이 열어 보여준 사유의 계기들을 자신처럼 이 작품을 읽어갈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의욕이 어느새 26편의 독특한 ‘연작 독후감’을 낳았다.
프루스트의 『시간』에 대한 친절한 요약이나 깨알 같은 주석을 제공하는 글들은 아니다. 비할 데 없이 독특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분석의 대상으로 삼기 어려운 『시간』과 긴 시간 씨름하며 던졌던 물음들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의 빈틈 없는 기록이다. 『시간』이 언제나 파편적으로만 읽힌다면, 이 소설은 왜 그렇게 쓰여야 했는가?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통독했을 때 『시간』은 대체 어떤 소설인가? “아무런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으나 모든 것이 진술되어 있는” 서사로 프루스트가 읽히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시간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는 이 작품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느낌과 알아차림』은 프루스트와 『시간』에 관한 기존의 탐구들에서 핵심적으로 거론되어온 주제와 논점들도 꼼꼼히 짚어간다. 프루스트의 문학과 글쓰기를 향한 욕망의 기원, 자의식에 영향을 미쳤을 사회적, 정치적 사건들, 유년의 흔적을 둘러싼 사실과 사실적인 거짓과 거짓, 프루스트의 성적지향과 그것이 ‘스완’과 ‘마르셀’에게서 나타나는 집착적 사랑의 기괴한 단면에 드리운 그림자, 메제글리즈, 콩브레, 발베크, 게르망트 등 프루스트가 이름을 쓰며 의미의 회로망을 짓는 방식, 교묘하게 모호한 전지적 일인칭 시점 ‘나’의 역할 등….
『시간』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 중 하나인 샤를뤼스에게 할애한 「디오게네스의 사람 찾기」 챕터는 프루스트와 『시간』에 대한 저자의 감응이 빛을 발하는 글이다. 오독에 대한 압박과 두려움을 안고 들어섰던 『시간』 안에서 프루스트만의 “황금빛 그로테스크”를 발견하고, 나약한 한 인간이 불가사의한 집념으로 문학에 헌신할 때 이룩할 수 있는, 한 인간의 숭고한 형상화를 제시한다. 이수은 작가의 전작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 『평균의 마음』을 통해, 하나의 작품 분석을 위해 저자가 종횡무진 시대를 넘나들며 펼쳐 보여주는 책들과 사유의 지도를 신뢰하는 독자라면,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과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이 소환되는 「뾰족하고 높은 곳」과 「이름의 빛깔」에서 프루스트를 읽어야 할 신선한 동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프루스트, 그리고 『시간』이라는 웅장한 호수에 긴 시간, 깊게 잠겼던 저자가 파헤친 주제들은--‘산사나무’에서 ‘딜레탕트’ ‘플라토닉’ ‘세 종탑’과 ‘파이드라 비극’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간』이라는 전무후무한 작품의 놀라움과 그 안에 아직 읽히지 않은 공간의 광활함을 짐작게 한다. “『시간』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마주치는 심상, 상징, 비유, 오감과 공감각이 만들어낸 이미지들의 파도, (…) 언어를 다루는 천부적 재능을 느낄 수 있는 프루스트의 정밀 묘사로 재생되는 기억, 추억, 지나간 시간, 마들렌 과자, 마르탱빌 종탑,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포석 등, 무한히 확산하는 이미지들로부터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 프루스트는 『시간』의 7편 「되찾은 시간」에 마치 이 물음에 대한 준비된 대답 같은 말을 남겨두었다. “모든 독자는, 읽는 동안에, 그 자신의 독자다. 작가의 글이란 다만, 아마도 독자 스스로는 알아보지 못할 무언가를 책을 통해 식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광학기구 같은 것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어느 쪽이 더 잘 보이는지, 이것인지 저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안경인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써볼 수 있도록, 커다란 자유 속에 그들을 내버려두어야 한다.” 『느낌과 알아차림』은 그 커다란 자유 속에서 “프루스트를 읽어간 하나의 진지한 예시”이다.
『느낌과 알아차림』은 오직 한 작품을 3년 4개월 동안 읽고 또 읽어간, 한 특이한 독자의 유례없는 독서 후기다. 읽어간 작품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어간 독자는 고전 탐독가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은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 『평균의 마음』의 작가 이수은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하 『시간』)는 ‘언젠가는 완독해야 할 고전’으로 빠짐없이 꼽히지만, ‘아무도 다 읽지는 않는 걸작’의 대명사가 된 대작이다. 갈리마르 출판사의 1927년 초판본 기준 3031쪽, 126만 7069단어, 2022년 완간된 민음사 번역본 기준 총 13권, 약 5600쪽, 300만 자가 넘는다. 『시간』은 끝날 듯 끝이 나지 않는 지독한 만연체의 문장들(예컨대 931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한 문장)과 유난한 길이에 비해 유난히 사소해 보이는 이야기로도 악명 높다. “2000명에 이르는 등장인물의 약 97퍼센트”가 모두 대화로만 언급될 정도로 한담과 사색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라니! 독해의 난이도에 따른 매우 낮은 완독률과는 대조적으로 이 작품이 문화의 다양한 층위에서 여전히 열렬히 소비되는 현상들은 놀랍다. ‘홍차와 마들렌’으로 대변되는 프루스트 효과, 센티멘탈한 기억을 소환하는 상품 마케팅, 소설 속에서 언급된 그림, 음악, 작품, 장소 들을 찾아보는 다양한 강의와 문학 기행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와 같은 열광은 대부분 프루스트라는 작가의 생애와 이미지만을 소환하고 소비하는 데에 그친다.
『느낌과 알아차림』은 “안 읽었다고 순순히 인정하기는 내키지 않지만, 읽었다고 섣불리 말했다간 봉변을 당할 것” 같은 이 문제작을 한번은 자기만의 눈으로 읽어내리라는, 저자의 작은 의협심(!)에서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는 데도 필생의 지구력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시간』을 읽고, 또다시 읽으며 품게 된 일련의 ‘의아함’들은 프루스트와 이 작품에 관한 또 다른 책들을 찾게 했고, “프루스트라는 거인의 장력”에 사로잡혀 쉽게 해독되지는 않지만, 매혹적인 기호들로 가득한 『시간』을 놓지 못하는 날들은 점점 길어졌다. 1년에서, 2년으로, 2년에서 3년으로 ‘읽기’의 나날이 늘어나는 동안 맞닥뜨린 당혹감들, 프루스트의 전기적 일화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감상, 글이 쓰인 맥락에 대한 몰이해로 점철된 공허한 찬사, 그저 “무수한 단상들로 이루어진 잠언집으로, 심오한 심리 철학 예술의 아포리즘으로 받아들이며 작가의 자전적 일기나 일화의 편린으로, 맥락 없이 발췌된 문장들로” 『시간』을 단정하는 상투적 소비에 대한 불만은 더 치밀한 독해로 이어졌고, 『시간』의 핵심에 가닿기 위해 스스로 찾아낸 물음들, 『시간』이 열어 보여준 사유의 계기들을 자신처럼 이 작품을 읽어갈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의욕이 어느새 26편의 독특한 ‘연작 독후감’을 낳았다.
프루스트의 『시간』에 대한 친절한 요약이나 깨알 같은 주석을 제공하는 글들은 아니다. 비할 데 없이 독특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분석의 대상으로 삼기 어려운 『시간』과 긴 시간 씨름하며 던졌던 물음들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의 빈틈 없는 기록이다. 『시간』이 언제나 파편적으로만 읽힌다면, 이 소설은 왜 그렇게 쓰여야 했는가?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통독했을 때 『시간』은 대체 어떤 소설인가? “아무런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으나 모든 것이 진술되어 있는” 서사로 프루스트가 읽히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시간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는 이 작품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느낌과 알아차림』은 프루스트와 『시간』에 관한 기존의 탐구들에서 핵심적으로 거론되어온 주제와 논점들도 꼼꼼히 짚어간다. 프루스트의 문학과 글쓰기를 향한 욕망의 기원, 자의식에 영향을 미쳤을 사회적, 정치적 사건들, 유년의 흔적을 둘러싼 사실과 사실적인 거짓과 거짓, 프루스트의 성적지향과 그것이 ‘스완’과 ‘마르셀’에게서 나타나는 집착적 사랑의 기괴한 단면에 드리운 그림자, 메제글리즈, 콩브레, 발베크, 게르망트 등 프루스트가 이름을 쓰며 의미의 회로망을 짓는 방식, 교묘하게 모호한 전지적 일인칭 시점 ‘나’의 역할 등….
『시간』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 중 하나인 샤를뤼스에게 할애한 「디오게네스의 사람 찾기」 챕터는 프루스트와 『시간』에 대한 저자의 감응이 빛을 발하는 글이다. 오독에 대한 압박과 두려움을 안고 들어섰던 『시간』 안에서 프루스트만의 “황금빛 그로테스크”를 발견하고, 나약한 한 인간이 불가사의한 집념으로 문학에 헌신할 때 이룩할 수 있는, 한 인간의 숭고한 형상화를 제시한다. 이수은 작가의 전작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 『평균의 마음』을 통해, 하나의 작품 분석을 위해 저자가 종횡무진 시대를 넘나들며 펼쳐 보여주는 책들과 사유의 지도를 신뢰하는 독자라면,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과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이 소환되는 「뾰족하고 높은 곳」과 「이름의 빛깔」에서 프루스트를 읽어야 할 신선한 동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프루스트, 그리고 『시간』이라는 웅장한 호수에 긴 시간, 깊게 잠겼던 저자가 파헤친 주제들은--‘산사나무’에서 ‘딜레탕트’ ‘플라토닉’ ‘세 종탑’과 ‘파이드라 비극’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간』이라는 전무후무한 작품의 놀라움과 그 안에 아직 읽히지 않은 공간의 광활함을 짐작게 한다. “『시간』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마주치는 심상, 상징, 비유, 오감과 공감각이 만들어낸 이미지들의 파도, (…) 언어를 다루는 천부적 재능을 느낄 수 있는 프루스트의 정밀 묘사로 재생되는 기억, 추억, 지나간 시간, 마들렌 과자, 마르탱빌 종탑,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포석 등, 무한히 확산하는 이미지들로부터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 프루스트는 『시간』의 7편 「되찾은 시간」에 마치 이 물음에 대한 준비된 대답 같은 말을 남겨두었다. “모든 독자는, 읽는 동안에, 그 자신의 독자다. 작가의 글이란 다만, 아마도 독자 스스로는 알아보지 못할 무언가를 책을 통해 식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광학기구 같은 것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어느 쪽이 더 잘 보이는지, 이것인지 저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안경인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써볼 수 있도록, 커다란 자유 속에 그들을 내버려두어야 한다.” 『느낌과 알아차림』은 그 커다란 자유 속에서 “프루스트를 읽어간 하나의 진지한 예시”이다.
느낌과 알아차림 : 나의 프루스트 읽기 연습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