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자신의유년시절을그려낸가장자전적인소설
아름다운여름날,헤브리디스군도의작은별장에램지가족과그들의손님들이모인다.막내제임스가등대에가고싶어하자,램지부인은희망적인대답을들려주지만램지는현실적인이유를들어아들을낙담시킨다.재능이있으나성정이불안한남편램지를한결같이보살피고내조하는전형적인빅토리아시대여성램지부인은단절되고분열된사람들을화합으로이끄는매력적인인물이다.그러나정작자신은감정적인피로에시달리며,자기행동이이기심이나허영심의발로는아닌지괴로워하는“비관적인”인물이기도하다.
『등대로』는울프의작품중가장자전적인소설로꼽힌다.어머니가돌아가시기전세인트아이브스해안에있는별장에서울프는열세살되던해까지매년여름을보냈다.1925년봄,그섬에서보낸어린시절과부모에대한기억을짧은소설에담겠노라고일기장에쓴울프는이듬해본격적으로집필에착수하여1927년『등대로』를발표했다.아버지를형상화한램지는위엄있고가부장적이며위선적인인물로,어머니를염두에둔램지부인은헌신적이고순종적인여성으로묘사된다.그러나한편,램지는안쓰러울만큼타인의공감에집착하며고독하고유약한모습을보이고,부인은때때로주변사람들에게화해와유대라는덕목을지나치게강요함으로써지배적인면모를드러내기도한다.작가자신이어릴적기억을밑거름삼아소조한인물인만큼,램지와램지부인은소설적인간을넘어서,복잡하고다면적인현실의인간으로다가온다.작품속에는어린시절위압적인아버지밑에서울프가느꼈던가족관계내부의제국주의적폭력성에대한적개심과,그럼에도아름답고아련한유년시절에의깊은향수가아슬아슬하게균형을이루고있다.
▶‘의식의흐름’기법으로인간내면의풍경을묘사하다
버지니아울프가제임스조이스,마르셀프루스트와더불어‘의식의흐름’사조를이끈모더니즘문학의기수란것은잘알려진사실이다.『등대로』는전작들에서보다완숙하고완성적인형태로‘의식의흐름’기법을소화해냈다고평가받는작품이다.울프는평범한일상사건에램지와램지부인,그리고그밖의등장인물저마다의시점을투영하고,발화와생각,대화와설명을명확히구분짓지않는화법을구사함으로써,인간내면에서끊임없이생성되는의식의흐름을부각한다.마치피카소의큐비즘처럼인물의시점을자유자재로옮겨가면서내면심리를묘사하는울프의실험적서술은,같은사건이라도시점에따라의미와평가는판이하게달라지며,설령같은인물이라도과거와현재의인식은동일하지않다는사실을우리에게분명히알려준다.
『등대로』의첫문장은등대에가고싶어하는막내아이에게램지부인이들려주는“그래,물론이지.내일날이맑으면말이야.”라는대답이다.잔뜩기대에부푼아들이재미삼아오려낸카탈로그사진에는환희의테두리가둘린다.“감정들을서로떼어놓지않고가까이있는현실에,기쁘거나슬픈미래에대한예감을덧씌우는”아들의감정이등대원정과는무관한가위질에옮겨가는것이다.그런아들을바라보며램지부인은단호해보이는아이의이마와눈초리에서판사나지휘관이된장래의모습을상상하는데,전혀엉뚱한공상처럼보이지만아들의장래를긍정하듯,아들의소망에무조건적으로긍정하려는어머니로서의심정이잘드러나는대목이다.곧바로램지는날씨가궂을것이라고단언하고,아이는“도끼나부지깽이,아니면아버지의가슴에구멍을낼수있는어떤무기라도가까이있었다면”하고격렬히반응한다.부인의대답에한껏솟구쳤던아이의감정이아버지의한마디에일순간분노와패배감으로바뀌는모습은한인물이다른인물에게서얼마만큼심리적영향을받게되는가를잘보여준다.제임스의시선을따라처음에램지는“칼날처럼가느다란몸으로옆에서서기대를깨뜨려버리”는인물로묘사되다가,그뒤로램지본인의속내인듯“자기갈빗대에서생겨난자식들은모름지기삶이란힘겨운것이고,사실이란타협할수없는것”이란사실을어린시절부터알아야한다는문장이이어진다.이처럼작가는인물의속마음이나발언을직접인용하지않으면서도여러등장인물의시점을번갈아서술함으로써,타인과마주하는일상속에서일어나는아주미묘한기분변화,그리고그로인한인간관계의변이양상을민감하게포착해낸다.
▶삶과죽음,인생과자연의의미를구하는실존적물음
여덟이나되는아이들을키우면서,그아이들은물론남편이나이웃들에게서까지여러요청을받는램지부인은“자신이사람들의감정에흠뻑젖은스펀지일뿐”이라고느낀다.그러다이따금사색에빠져들며“어둠의쐐기”가되는상상을하고,조바심과초조한마음이사라진후에차분히등대의빛줄기를바라보면서“다끝날거야,다끝날거야.”라고읊조리곤한다.그녀에게세상은“이성이나질서,정의라고는전혀없고,오직고통과죽음,빈곤이”있는곳이다.눈앞에펼쳐진만의풍경에어린애처럼큰소리로“아,너무아름다워요!”라고외치는그녀이지만,속으로는“세상이아무리비열한배반도능히저지를수있”다는위협을느끼고있는것이다.그녀가가끔보이는초연하고고적한모습에램지는고통을느낀다.그리고십년의세월이흐른다.램지는“어느어둑한날아침에비틀거리며복도를따라걷다가양팔을내밀”지만전날밤램지부인이갑작스레죽었기에“그의팔은텅빈채로남고”만다.
전쟁이라는인간이일으킨재난에더해해일이나지진같은자연재해의위협앞에서인간존재는더욱위태롭고가련해보인다.“삶에대해서,죽음에대해서,램지부인에대해서”끊임없이고민하지만“누구에게든그어떤말도할수없다고”느끼는릴리나,햇살가득한낮에도“우중충한녹색의졸음기”에싸여서아무말도하지않는카마이클,때지난유행가를웅얼거리며램지가족의별장을정돈하는맥냅부인등『등대로』의인물들에게삶은결코가볍거나유쾌한것이아니다.작은섬을바라보며“처량하게도하찮은곳이군.”이라고했던램지의말은마치이들,아니넓게는인간의운명에대한암시처럼의미심장하게느껴진다.대륙이아닌섬은안정감과생의영속적의미를탐구하는인간에게그야말로비극적인배경인것이다.이처럼소멸위기에봉착한불안정한인간의삶이과연어떤방향으로나아갈수있는가라는물음에천착한『등대로』는전후시대실존의풍경화라고할수있을것이다.
▶젊은세대여성,나아가예술가로서의삶의방식을모색한작품
램지부인의이웃이자아마추어화가인릴리브리스코는매력적인램지부인을화폭에담으려하지만,존경스러우면서도거북하게느껴지는모순되는인상들로,그내면의본질을파악하는데애먹는다.부모세대와는다른삶의방식을고민하는젊은여성이자,기법과주제면에서자신만의비전을찾기까지고된여정을멈추지않는예술가릴리는버지니아울프의분신으로보인다.“여자는그림을그릴수없어.글도쓸수없어.”라는탠슬리의말과,여자라면남자를보살피고다독여야한다는램지부인의눈빛에끊임없이시달리던릴리브리스코는작품말미에서마침내램지부인의그림을완성해낸다.자신만의비전을얻은것이다.
“노예가아니라자유로운인간이라면,자신이써야하는것이아니라스스로선택한것을쓸수있다면(……)플롯도,희극도,비극도없을것”(「현대소설」)이라는울프의말처럼『등대로』에익숙한로맨스나대단원은없다.다만무수히쏟아지는인상들과,그것들이결합하여탄생한중요한순간이있을뿐이다.그러나시간이흘러도지워지지않고하나의‘예술품’과같이사람들마음속에남는것은강렬한순간의기억이며,예술은그순간에옷을입히고구체화하는,삶의적극적인방편임을울프는역설한다.『등대로』는젊은세대여성예술가로서울프가끊임없이고민해온정체성이라는주제에대해,그녀나름의해법을들려주는소설이다.이작품에는주요한삶의기점들을예술품과같이마음과인간정신에새김으로써,보다온전하고충만한미래로나아갈수있다는희망적인메시지가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