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살아움직이게하는것은이야기들이었다.
앞못보는사람이익숙한물건을찾듯,
이야기들을가지고그는어둠속을헤쳐길을찾았다.”
이스탄불의변호사갈립의아내뤼야(터키어로‘꿈’이라는뜻)가짧은메모만남긴채사라진다.유명한칼럼작가인그녀의의붓오빠제랄역시종적을감춘다.갈립은뤼야가제랄과함께있을거라확신하고,자신의하나뿐인사랑이자친구인그녀와,질투와숭배의대상인그를찾아이스탄불전역을헤매고다니기시작한다.그는이둘을추적하면서찾아가는모든거리,집,식당에서자신의과거와기억을다시발견한다.또한이스탄불곳곳에숨겨진신화,전설,이야기뿐아니라,소설의배경인1980년대터키의대중문화,새로이유입된서양문화가뒤섞인채그모습을드러낸다.갈립은제랄의칼럼을읽으면그둘이어디에있는지알수있을거라생각하다가,제랄의삶을산다면그의생각을알수있을거라믿게되고,결국은자신이제랄의이름으로칼럼을써서뤼야와갈립에게메시지를보내기시작한다.또한그는자신이평생제랄이되기를원했고,제랄이된다면뤼야가드디어자신을사랑해줄거라고생각해왔다는사실을깨닫는다.
제랄과뤼야와함께하고자하는바람이마음속에서강하게솟구쳐올라고함을지르고싶었다.마치꿈을꾸는것만같았고,마치몸의반쪽이찢겨져멀고어두운곳으로끌려가는것같았고,마치이함정에서벗어나려면누군가구해줄때까지발버둥을치고소리를질러야만할것같았다.하지만저깊이를알수없는어둠속을차가운겨울밤과눈의습기를얼굴에느끼며바라볼뿐이었다.(본문중에서)
“자기자신이될수있는유일한길은다른사람이되는것,
혹은다른사람의이야기속으로사라지는것이다.”
오르한파묵은그동안사랑,죽음,행복이라는인간의보편적주제를포스트모더니즘기법으로응축해왔다는평가를받았다.『검은책』에서도그는자신의정체성을잃어버리고다른사람이되려는사람들이이야기를통해,질투나사랑같은절대변하지않는인간의감정과,태어나서죽을때까지혼자일수밖에없는인간의외로움을그려내고있다.
또한작가의다른소설처럼『검은책』도독특한서술구조를보여준다.홀수장은3인칭시점으로서술된갈립의추적과정을보여주면서이야기를전개해나가고,짝수장은제랄의1인칭시점으로서술된칼럼으로이루어져있다.작품끝부분에가서야드러나는놀라운결말은독자에게명확한실마리를던져주지않은채,다만제랄을대신해서갈립이쓰는칼럼을통해짐작할수있도록유도해놓고있다.특히흥미로운부분은제랄의칼럼으로,이칼럼에는현재의터키상황과미래에닥쳐올문제에서부터수천년전이스탄불에서일어났던역사적사건,신화,전설에이르기까지폭넓은스펙트럼이담겨있다.그러나다양한역사의층위에서일어났던사건은서로연관되어있으며,과거의일이현재에반영되어있고,오래전의사건이현재를사는사람들에게영향을주고있음이드러난다.그뿐아니라이런내용을담고있는칼럼이실제전개되는사건,즉갈립이아내와제랄을찾아다니는과정에겪고만나는일들과사람들과도아주밀접한연결고리를지니고있다는것이점차분명하게드러난다.이미오래전에쓰였던제랄의칼럼이갈립에게일어날일을예견했거나그런일이일어나도록제랄이미리계획해놓았다는의미이다.이에대해오르한파묵은다음과같이설명한바있다.“도시는텍스트로,텍스트는도시의신호로변하고,이신호를통해갈립은뤼야와제랄의자취를추적하지요.소설은사실주의소설처럼사건이전개되는동시에칼럼이등장하는데,이둘은고리처럼서로연결되어있습니다.”(오르한파묵인터뷰중에서)
『검은책』은파묵의다른소설과는달리,그가미국에머물면서완성한소설이다.마치이스탄불곳곳을직접걷는듯한느낌을독자들에게주는이소설이이스탄불밖에서쓰였다는사실이놀랍다.그는미국에서체류하는동안자신의문체를찾았다고이야기한다.파묵은1985년부터뉴욕의컬럼비아대학에서방문교수로지냈고,그곳에서자신의정체성에대한고민을시작하게되었다.미국문화의다양성을접하면서‘내가나타내려는것이무엇인가?’라는질문을하게된것이다.이러한자기반성을통해‘이슬람고전’으로눈을돌렸고,자신의정체성을찾는데서자신만의문학을시작할수있다는것을깨달았다고한다.파묵은보르헤스에게받은영향을바탕으로오스만제국,페르시아,이슬람문학을재조명했고,이들이나타내는종교적,도덕적,사회적맥락이아닌그이야기자체만을볼수있게되었다고한다.그는이같은경험에대해“이야기의신기원이내눈앞에펼쳐진것입니다.이때쓰기시작한책이『검은책』입니다.진정한내목소리를찾은작품이죠.”라고고백했다.
이스탄불이라는이름의매혹,그안에숨겨진삶의진실
오르한파묵은또한『검은책』을통해이스탄불이얼마나흥미로운도시인지,얼마나슬픈도시인지이야기한다.그는“거대하고풍부한서사를통해,두대륙사이에놓인도시이스탄불의병적인갈등을포착하려했다.”고언급했다.실제로이스탄불은독특한맥락을지닌도시이다.지형적으로는일부가아시아대륙에,또다른일부가유럽대륙에걸쳐져있다.당연히문화적,종교적으로두문화의영향을동시에받아왔다.또한역사적으로수많은민족에게침략당하고점령당하여여러제국의수도가되기도했다.본문중에“비잔티움,비잔트,노바로마,안투사,차르그라드,미크라그라드,콘스탄티노플,코스폴리,이스틴―폴린바로그아래에는이전문명이피난했던지하통로가있다.”라는문장이등장하는데,여기서언급되는지명은모두현재의이스탄불을일컫는다.그만큼역사적부침(浮沈)이심했음을짐작게한다.이처럼수천년의역사를넘나들면서이도시에서일어났던사건들이사람들에게어떤영향을주었는지를오르한파묵은그려내고있다.역사적으로유입된다양한문명외에도,근래에새로이들어온서구문명,특히미국문화가사람들에게새로운희망과절망의이유가되고있음을예리하게표현했다.이를통해그는원래의자신을잃어버린사람들,나아가원래의자신이누구였는지를알지못하는사람들의삶을들여다본다.찰스디킨스에게런던이,마르셀프루스트에게파리가,제임스조이스에게더블린이있었다면,오르한파묵에게는이스탄불이문학적저력의원천이자자신의마음상태라고할수있을것이다.그는언론과의인터뷰에서다음과같이밝힌바있다.“독자들이내글을통해이도시가주는공포를느낄수있었으면합니다.이스탄불시내를걷는다고떠올려보세요.할리치만을잇는다리를건넌다고생각해보세요.어떤장면들이떠오릅니까?마주치는슬픈표정들,극심한도로정체,공장으로변한이천년이넘는역사를간직한비잔틴양식의건물.참을수없는광경입니다.『검은책』에서나는이런절망을보여주고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