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했던 청년 윤동주가 사랑했던 시
20세기 초 식민지 조선에서 러시아 문학은 다른 어떤 외국문학보다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중 투르게네프는 이광수, 톨스토이와 함께 당시 조선에서 가장 많이 읽혔던 3대 작가 중 하나였다. 투르게네프 산문시의 쉽게 읽히는 시어와 거기에 담긴 삶의 지혜와 통찰은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투르게네프는 프랑스의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프랑시스 잠 등의 산문시에서 영향을 받았고, 그의 산문시는 다시 한국 근대문학 형성기에 전통의 정형시를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근대적인 시를 모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 네가 믿는 것에 환멸이 올 수 있음을 잘 알잖아? 그 믿음이 기만이고, 젊음을 헛되이 파멸시킨다는 것을 언젠가 알게 되잖아?”
“그것도 알아요. 그래도 저는 들어가고 싶습니다.”
“들어와라!”
여자가 문지방을 넘어서자 ? 그녀 등 뒤로 무거운 막이 내려졌다.
“바보 같은 년!” 누군가가 뒤에서 이를 갈았다.
“성녀다!” 응답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울려 퍼졌다.
― 투르게네프, 「문지방」에서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중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은 바로 「거지」였는데, 1910년~1930년 사이 최소 12회 반복하여 번역되었다. 가난이라는 시대의 현실 앞에서 민중에게 손 내밀고자 하는 공감과 연민의 휴머니즘이라는 주제는 당시 지식인들의 영혼에서부터 공명을 이뤄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명은 투르게네프의 시를 번역하고 탐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창작으로 이어졌다.
가지고 나온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거지는 마냥 기다리고 있는데……
내민 손이 힘없이 떨린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한 나는 떨리는 그의 더러운 손을 꼭 잡았다…….
“형제님, 미안하오,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못했소.”
거지는 충혈된 눈으로 나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의 파리한 입술에 엷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는 그가 차디찬 내 손가락을 꼭 잡아 주며 속삭였다.
“형제님, 저는 괜찮아요.
이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형제님, 그 역시 적선이지요.”
그때 나는 이 형제한테 내가 적선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투르게네프, 「거지」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노래했던 윤동주 역시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를 탐독하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가 남긴 「투르게네프의 언덕」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거지」를 오마주한 것이다.
자신을, 남을, 모든 사람을, 짐승을, 새들을 불쌍히 여기노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불쌍히 여기노라.
불행한 자들과 행복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노라…… 불행한 자들보다 행복한 자들을 더 불쌍히 여기노라.
개선장군들과 위대한 화가들을, 사상가들과 시인들을 불쌍히 여기노라.
살인자들과 희생자들을, 추악함과 아름다움을, 압제자와 학대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노라.
이 연민의 정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 불쌍함 때문에 살고 싶은 마음조차 없는데…… 연민에 권태까지 더해진다.
오, 권태여, 지루함이여, 모두가 혼합된 연민이여! 인간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다.
차라리 부러워하는 마음이라도 있다면…… 진짜 좋을 텐데!
그래, 나도 돌을 부러워한다!
― 투르게네프, 「불쌍히 여기노라……」에서
● "투르게네프의 시적 촉수는 언제나 그 풍경을 찢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세목들에 가장 민감한 바람과 풀잎처럼 반응한다." ―김행숙
투르게네프 특유의 “꿀과 기름처럼 완벽하게 유연하고 세련된 문장”으로 러시아의 풍경,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하는 예술적 특징은 그의 시적 내면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그의 소설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그의 산문시집에서도 역시 19세기 러시아의 가혹한 농노제 아래 일어났던 어두운 이야기들을 고발했던 리얼리즘 소설 대가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치며 울었습니다. ‘이 욕심쟁이 땅 귀신! 아내를 잡아먹다니…… 나도 잡아먹어라! 아, 마샤!’”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마샤!”라고 한 번 더 불렀다. 고삐를 쥔 채,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 옆으로 털어 버리고 어깨를 추어올렸다.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썰매에서 내릴 때, 나는 15코페이카를 더 주었다. 그는 양손으로 모자를 잡고 나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회색빛 안개로 둘러싸인 텅 빈 정월의 눈길은 매섭게 추웠다. 그는 말을 몰고 천천히 걸어갔다.
― 투르게네프, 「마샤」에서
산문시집의 투르게네프의 목소리는 대체로 슬프고 다정다감하지만, 때때로 냉정하고 신랄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산문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인생의 막바지에 이른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삶의 불가해함에 대한 체념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한편으로는 바로 그것이 선물처럼 가져다 줄 화해와 용서에 대한 기대이다.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를 읽는 것은 바로 독자들에게 투르게네프가 자신의 인생을 비춘 등불에 나의 얼굴을 비춰보고 그것이 역시 마찬가지로 보통의 부끄럽고도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나는 겁이 나 미사여구를 피한다. 그러나 미사여구에 대한 두려움 역시 일종의 불만이다.
그렇게 복잡한 우리 생활은 이 두 외래어 사이를, 불만과 미사여구 사이를 오가며 헤맨다.
― 투르게네프, 「미사여구」에서
그분의 얼굴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다. 보통 사람들과 같은 그런 얼굴이다. 눈은 약간 위쪽을 주의 깊게 조용히 보고 있다. 입술은 다물었지만, 굳게 다문 것은 아니다.
(……)
다시 한번 힘을 냈다…… 역시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얼굴이 보였다. 낯선 윤곽이긴 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얼굴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슬퍼졌고, 잠에서 깼다. 그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바로 그런 얼굴, 보통 사람과 비슷한 얼굴, 그 얼굴이 바로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것을.
― 투르게네프, 「그리스도」에서
1973년 시작한 역사적인 <세계시인선>
반세기 가장 긴 생명력을 이어온 시리즈
1 호라티우스, 『카르페 디엠』
▶ 로마 라틴어 서정시 국내 최초 완역!
2 호라티우스, 『소박함의 지혜』
▶ 서양 문학의 거장 시인들이 숭배하는 시성 국내 초역!
3 『욥의 노래』
▶ 히브리 시문학의 정수! 시인 블레이크 그림과 함께 감상하는 비극의 세계
4 프랑수아 비용, 『유언의 노래』
▶ 중세 암흑기 대표 작가, 그러나 지극히 현대적인 시인 비용 국내 최초 소개!
5 김수영, 『꽃잎』
▶ 참여시인을 넘어 한국 모더니스트로서의 문학적 가치 재발견!
6 에드거 앨런 포, 『애너벨 리』
▶ 김경주 시인의 새로운 번역! 도레의 그림과 함께 감상하는 고딕 낭만의 세계
7 보들레르, 『악의 꽃』
▶ 우리 문학계 스타 어른 황현산 문학평론가의 참신한 번역!
8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철』
▶ 한국 불문학의 전설 고 김현 선생의 살아 있는 번역!
9 말라르메, 『목신의 오후』
▶ 한국 불문학의 거장 김화영 교수의 믿을 수 있는 번역!
10 윤동주, 『별 헤는 밤』
▶ 한국 문학의 가장 순수한 영혼의 고뇌! 윤동주 자필 원고 수록
11 에밀리 디킨슨,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고독과 슬픔의 시인, 간결한 문체와 모던한 감수성의 결합!
12 부코스키,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현대 시인 부코스키 시집 국내 초역!
13 브레히트, 『검은 토요일에 부르는 노래』
▶ 시인이자 니체주의자로서의 브레히트 정수가 담긴 『가정기도서』 국내 초역 다수
14 헤밍웨이, 『거물들의 춤』
▶ 특유의 생략적 글쓰기를 잘 보여 주는 헤밍웨이 시집 국내 초역!
15 백석, 『사슴』
▶ 백석 평전을 쓴 안도현 시인이 백석의 정수만을 뽑아 전하는 선집
16 부코스키,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
▶ 미국 서점에서 가장 많이 도둑맞는 책의 작가 1위!
17 T. S. 엘리엇, 『황무지』
▶ 신비평을 주도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영어로 쓰인 최초의 현대시”!
18 이브 본푸아, 『움직이는 말, 머무르는 몸』
▶ 보들레르의 정통성을 계승하며 오늘날 프랑스 시단을 대표하는 본푸아의 첫 시집
19 기욤 아폴리네르,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 아폴리네르 연구에 매진한 황현산 문학평론가가 가려 뽑은 아폴리네르 시선집
20 정지용, 『향수』
▶ 한국 시단의 이미지스트, 모더니스트 계열의 선구자 정지용 시의 정수!
21 윌리엄 워즈워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 영국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시인의 목가적 시편들을 가려 뽑은 선집
22 빌헬름 뮐러, 『겨울 나그네』
▶ 독일의 대중적 낭만주의 시인 빌헬름 뮐러의 대표 연작시 국내 최초 완역
23 D. H. 로렌스, 『나의 사랑은 오늘 밤 소녀 같다』
▶ 휘트먼적인 자유시를 통해 휘두르는 강렬한 감정과 신비로운 교감의 세계
24 페르난두 페소아,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 변방의 포르투갈 문학을 유럽 모더니즘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천재 시인
25 페르난두 페소아,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 페소아가 가장 사랑했던 이명(異名), 알바루 드 캄푸스 대표 시선
26 로베르 데스노스, 조재룡 옮김, 『알 수 없는 여인에게』
▶ 앙드레 브르통이 인정한 초현실주의 기수 데스노스 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