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문학의언어를새롭게창조해낸서정시인
20세기라틴아메리카문학의거장세사르바예호의대표시집『조금밖에죽지않은오후』가‘세계시인선’52번으로출간되었다.시인이자극작가,소설가,저널리스트였던바예호는칠레의파블로네루다,멕시코의옥타비오파스와더불어20세기라틴아메리카문단을대표한다.바예호는토착적언어사용으로‘선주민정서(sentimientoind?gena)’를구현한인종과혈통의시인이라고평가받는다.바예호의시근저에는인디오의어조가있으며,인디오특유의목가적이고애니미즘적인상징성들도함께비친다.
농부의주먹은비단결처럼부드러워지고,
입술마다십자모양으로윤곽이그려진다.
축제일이다!쟁기의율동날아오르고
워낭은하나하나청동의합창지휘자.
투박한것은날이서고,허리춤의전대(纏帶)는말을
한다……
인디오의핏줄에서반짝인다,
눈동자를통해태양의향수(鄕愁)로
걸러지는핏빛야라비.
-「세편의선주민연작시」,『조금밖에죽지않은오후』에서
하지만바예호의시들은결코지역성에국한되지않는다.바예호의선주민정서는의도된언어의배치가아니라시인의내면을표현하는데토착적언어를사용함으로써자연발생적으로발현된것으로,진정성있는라틴아메리카어법을구사한다.바예호의시에는상징이나전원적이미지로감정을표현하는인디오특유의상징주의적요소외에도표현주의,다다이즘,초현실주의등다양한요소들이풍부하게구현된다.바예호시의고유성은시인이자신의서정을그려냄에있어라틴아메리카시세계의언어를새로이창조했다는점에있다.
●개인의고통에서타인의고통으로확장되는시적보편성
바예호의시들은그의파란만장한생애와닮았다.바예호는경제적어려움으로학업을여러차례중단하고생업에종사해야했으며,20대후반에는정치적소요에휘말려투옥되었고,석방된후에는평생을파리에서궁핍하게살았다.『조금밖에죽지않은오후』는바예호의첫시집으로삶의고통과좌절,실존의그늘을토로한다.이렇듯굴곡진삶은그의시에도반영되어작품전반에우울하고어두운정서가깔려있다.
사노라면겪는고통,너무나지독한……모르겠어!
신의증오같은고통.그앞에선가슴아린
지난날이밀물이되어온통
영혼에고이는듯……모르겠어!
-「검은전령」,『조금밖에죽지않은오후』에서
평생가난과고통속에살았던시인은“사노라면겪는고통,너무나지독한……모르겠어!”라며삶에대한좌절감과염세주의적태도를보인다.하지만시인은나르시시즘적인허무주의에빠지지않는다.자신의고통에비추어타인의고통에공감하고애정어린시선을보내며,타인의고단한삶에대한책임감을고백하기도한다.
내몸의뼈는죄다타인의것.
아마도내가훔쳤겠지!
어쩌면다른사람몫을
가로챘는지도몰라.
내가태어나지않았다면,
다른가난한이가이커피를마시련만!
난몹쓸도둑……어찌할거나!
-「일용할양식」,『조금밖에죽지않은오후』에서
시인의사랑은타인에대한연민과공감을넘어신성(神性)에까지미친다.자신의고통스러운삶을바라보는신역시창조주로서탄식하며마음아파할것을짐작하여시에녹여냈다.바예호는사회의부조리와고통을개인적차원에서‘우리’의차원까지확장한시인이었다.
당신은,얼마나탄식하실지……빙빙도는
그거대한가슴과사랑에빠지신당신은……
하느님,저를당신께봉헌합니다,그토록큰사랑주시니,
결코미소짓는법없으시니,언제나
찢어질듯가슴아프시리니.
-「하느님」,『조금밖에죽지않은오후』에서
●체게바라의배낭에서나온시집
체게바라가청춘기에친구와오토바이를타고라틴아메리카대륙을여행한과정을그린영화「모터싸이클다이어리」에는체게바라가사랑했던시집이등장하는데,그중하나가세사르바예호의작품이다.실제로도1967년볼리비아의밀림에서체포되었을당시그가평소메고다니던배낭속에는네루다,바예호,니콜라스기옌,레온펠리페시69편이필사된녹색노트가있었다고한다.
바예호는1936년스페인내전발발당시파블로네루다와함께스페인수호를위해힘쓰기도했다.그의시는고통으로가득차있지만,절망속에서도희망의가능성을잃지않았다.바예호의시는인간에대한사랑을바탕으로위로와용기를준다.그래서바예호의시는혁명가가힘의논리에만휘둘리지않고휴머니스트로서남아있도록잡아준다.
한병사,견장에상처입은
위대한병사,
비장한오후에활기를띠고,
웃음소리사이로,
발아래에흉측한헝겊같은
삶의뇌를내보인다.
우리는함께걸어간다,꼭붙어서,
불굴의빛,병자의걸음걸이로,
우리는함께묘지의겨자색
라일락옆을지난다.
-「순례」,『조금밖에죽지않은오후』에서
●1973년시작하여가장긴생명력을이어온최고의문학시리즈!
“탄광촌에서초등학교교사를할때세계시인선을읽으면서상상력을키웠다.”-최승호
“세계시인선을읽으며어른이됐고,시인이됐다.”-허연
〈민음사세계시인선〉은1973년시작하여반세기동안새로운자극으로국내시문학의바탕을마련함으로써,한국문단과민음사를대표하는가장중요한문학총서가되었다.1970-1980년대에는시인들뿐만아니라한국독자들도모더니즘의세례를적극적으로받아들였다.때로는부러움으로,때로는경쟁의대상으로,때로는경이에차서,우리독자는낯선번역어에도불구하고새로움과언어실험에흠뻑빠져들었다.이러한시문학르네상스에박차를가한것이바로세계시인선이다.
민음사는1966년창립이후한국문학의힘과세련된인문학,그리고고전소설의깊이를선보이며종합출판사로성장했다.특히민음사가한국문단에기여하며문학출판사로발돋움하는계기가바로‘세계시인선’과‘오늘의시인총서’였다.1973년12월이백과두보의작품을실은『당시선』,폴발레리의『해변의묘지』,라이너마리아릴케의『검은고양이』,로버트프로스트의『불과얼음』네권으로시작한세계시인선은박맹호회장이김현선생에게건넨제안에서비롯되었다.
“우리가보는외국시인의시집이라는게대부분일본판을중역한것들이라서제대로번역이된건지신뢰가안가네.(……)원본을함께실어놓고한글번역을옆에나란히배치하면신뢰가높아지지않을까.제대로번역한시집을내볼생각이없는가?”
대부분번역이일본어중역이던시절,원문과함께제대로된원전번역을시작함으로써세계시인선은우리나라번역수준을한단계높이는데기여하게되었다.당시독자와언론에서는이런찬사가이어졌다.“우리나라에서는처음있는일이요,또책임있는출판사의책임있는일이라이제는안심하고세계시인선을구할수있게되었다.”
이처럼세계시인선은문청들이“상상력의벽에막힐때마다세계적수준의현대성”을맛볼수있게해준영혼의양식이었다.특히지금한국의중견시인들에게세계시인선탐독은예술가로서성장하는밑바탕이었다.문화는외부의접촉을독창적으로수용할때더욱발전한다.그렇게우리독자들은우리시뿐만아니라세계적인시성들과조우했고,그속에서건강하고독창적인우리시인들이자라났다.
하지만한국독서시장이그렇게시의시대를맞이할수있었던것은시문학전통이깊은한국인의DNA에잠재된자신감이아니었을까?이러한토대에서자라난시문학은또한번의르네상스를맞이했다.국내출판역사에서시집이몇권씩한꺼번에종합베스트셀러랭킹에자리를차지하는것은이례적인현상이다.속도가점점더빨라지는세상을향해보다더인상적인메시지를던져야만하는현대인에게생략과압축의미로강렬한이미지를발산하면서도감동과깊이까지숨어있는시는점점더매력적으로다가오고있다.그씨앗을심어왔던세계시인선이지금까지의독자호응에감사하는마음으로,새시대에필요한새로운고전을다시만들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