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삶에서 열린 삶으로
「갇힌 여인」은 프루스트 사후 일 년 만에 출판된 작품이다. 따라서 플레이아드가 1954년에 발간한 판본과 1988년에 발간한 새로운 판본 사이에는 상이한 문장 배열이나 단어 표기가 곳곳에서 발견되며, 사라진 인물이 다시 등장하는 등 구성상의 허점도 존재한다. 또한 이 작품은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인 어조, 일종의 독백처럼 서술된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구성하는 여타의 작품과도 구별된다. 고모라의 핵심, 뱅퇴유 양의 친구에 의해 키워졌다는 알베르틴의 폭탄 같은 선언으로 불안감에 사로잡힌 화자는 알베르틴을 파리로 황급히 데려오고, 그리하여 발베크에서의 바캉스가 끝난 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 대략 육 개월 동안의 칩거 생활이 펼쳐진다. 장사꾼들이 거리에서 외치는 소리에 잠이 깨는 아침부터, 알베르틴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고뇌를 진정시키는 밤에 이르기까지 화자는 알베르틴의 사소한 몸짓이나 시선, 말 한마디에도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사랑하는 이의 진실에는 결코 이르지 못한 채 이별을 결심한다. 그러나 정작 떠나는 사람은 화자가 아닌 알베르틴이다. 이 여섯 달간의 삶은 대략적으로 ‘5막 구성’의 고전 비극 모델에 따라 각기 다섯 나날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 날과 두 번째 날은 화자의 깨어남과 잠든 알베르틴의 관조, 감미로운 바깥세상의 유혹과 베네치아로 떠나고 싶은 열망이, 간헐적으로 폭발하는 질투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행복한 분위기를 띤다. 그리고 세 번째 날은 사건의 변전이 가장 많은 날로, 알베르틴의 트로카데로 공연 관람, 베르고트의 죽음, 베르뒤랭네의 연회에서 뱅퇴유의 칠중주곡 감상, 베르뒤랭 부부의 모략 탓에 샤를뤼스가 모임에서 제명되는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음악과 문학에 관해 알베르틴과 긴긴 대화를 나누는 네 번째 날에 이어, 알베르틴의 떠남을 알리는 전조(화자의 의혹이 알베르틴의 무의식적 폭로에 의해 확신으로 돌변하는 순간), 마지막으로 “알베르틴 양이 떠나셨어요.”라는 운명적인 한마디와 더불어 「갇힌 여인」은 막을 내린다.
「갇힌 여인」을 기점으로 작품의 관념적이고 시적인 어조는 지극히 사실적이고 파편적인 어조로 바뀐다. 거기에는 자전적 체험을 넘어, 포착할 수 없는 타자, 그리하여 이해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타자라는 불가능의 지평이, 라캉이 언급한 보다 근본적인 ‘존재의 결여’에 대한 인식론적 체험이 자리하는 까닭이다. 게다가 「갇힌 여인」과 「사라진 알베르틴」은, “질투의 상대가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화자는 연적인 남성을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알베르틴을 사랑했던 혹은 사랑할지도 모르는 모든 여성들을 질투한다. 질투라는 주제는 이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반에 존재하며(발베크에서의 첫 번째 체류, 특히 두 번째 체류에서), 회고적이며(「갇힌 여인」의 주제이다.), 또 알베르틴의 사라짐 이후에도 격렬해지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지속적이다.(「사라진 알베르틴」의 주제이다.)”라는 쿠데르의 지적처럼, 질투라는 긴 갈등 구조 위에 축조되어 있다.
그런데 프루스트적 질투는 타자에 대한 광기 어린 앎의 욕망, 또는 배타적 소유의 욕망으로 정의된다. 사랑하는 이는 우리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포착할 수 없는 타자를 표상하므로 이처럼 환원 불가능한 타자를 대상으로 하는 담론은 필연적으로 오인과 왜곡으로 굴절된 독백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시도는 끝없이 반복되고 부인되고 해체될 운명에 놓인다. 결국 사실상 ‘갇힌 사람’은 알베르틴이 아니라, 자신의 질투와 의혹에 갇힌 화자다. “질투는 상상력의 실패이며 (……) 질투를 이야기로 구성하는 것은 사랑의 아픔에 맞서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라는 크리스테바의 말처럼, 어쩌면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싶은 그 미친 듯한 욕망, 즉 질투를 통해, 그리고 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유효한 지극히 내밀한 몸짓과 시선을 향한 끝도 한도 없는 탐색 작업을 통해 미세한 내면의 사건을 이야기로 재구성하려는 고통스러운 여행을 감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갇힌 여인」의 주제는, 프루스트가 모색한 사랑의 담론을 정의하는 질투와 부재의 의미와, 이런 삶의 질곡에 맞서 열린 삶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베르고트의 죽음과 뱅퇴유의 칠중주곡 등이 구현하는 의의에 있다고 하겠다. ‘알베르틴 소설’을 특징짓는 또 다른 축인 애도와 망각, 무한한 글쓰기는 6편 「사라진 알베르틴」(2021년 출간 예정)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어지게 되리라.
질투와 부재
알베르틴과 그녀를 둘러싼 사건, 화자의 기억과 감정은 「갇힌 여인」의 중심축을 이룬다. 특히나 화자 마르셀이 알베르틴에 대해 가지는 ‘사랑’은, 5편의 가장 중요한 주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루스트가 이야기하는 진정한 사랑의 출발점은, 알베르틴을 처음 만났던 발베크 해변에서의 행복했던 나날이 아니라, 그녀의 부재가 화자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혼미의 소용돌이, 그것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이다. 이처럼 프루스트에게서 사랑하는 연인은 언제나 부재하거나 혹은 지속적인 출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나’는 마치 “역 한구석에 내팽개쳐진 수화물처럼”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항상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 앞에서만 성립된다.”라는 바르트의 언급은, 부재하는 대상을 향한, “지시물로서는 부재하지만 대화 상대로서는 현존하는” 존재에 대한 끝없는 독백이 사랑의 담론임을 확인하게 해 준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다는, 완전히 알 수 없으리라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며, 그리하여 이제 그의 모든 열정과 관심은 오로지 자신이 모르는 그 미지의 세계를 탐독하는 데 집중된다. 사랑의 대상이 지닌 은밀한 생각, 고백하지 않은 욕망, 상상할 수 없는 쾌락, 항상 다른 것을 향한 시선까지도, 간단히 말해 사랑하는 이의 본질과 관계되는 것은 모두 의혹과 배신의 기호가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질투와 의혹이 사랑을 부양한다. 화자는 알베르틴이 끊임없이 거짓말을 했다고 상상하거나 환각하며, 또 이런 상상과 환각을 통해서 사랑의 감정을 키우고 유지하며, 또는 신뢰할 수 없는 동조자들인 앙드레와 운전사, 프랑수아즈에게 감시를 맡기면서 알베르틴에 대한 의혹과 질투를 증폭시킨다. 앙드레와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인지 관능적인 사랑인지, 운전사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이제 알베르틴의 진실은 영원히 어둠 속에 파묻힌 채로, 사랑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놓인 그 아물지 않는 상처만이 무한대로 벌어질 따름이다. 이런 질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잠시 안식을 얻는 순간은 잠든 알베르틴을 응시할 때뿐이며, 이는 다시 완전한 소유(완전한 앎)가 사랑의 종말임을 환기한다.
베르고트의 죽음과 뱅퇴유의 칠중주곡
「갇힌 여인」의 또 다른 주제는 베르고트의 죽음과 뱅퇴유의 칠중주곡이 암시하는 예술의 참된 가치다. 2부 서두에서부터 화자는 스완의 죽음을 비롯하여 신문 삼면기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타자의 죽음을 환기한다. 프루스트가 죽기 일 년 전 ‘죄드폼 미술관’에서 열린 네덜란드 회화 전시회에 갔던 자전적 체험을 바탕으로 기술된 이 일화는, 마치 작가 자신이 꿈꾸는 죽음인 듯, 또는 모든 예술가들의 열망인 듯, 처음부터 예술의 무용성과 삶의 아름다움을 대조하려는 시도에서부터 출발한다.
베르메르의 「델프트 풍경」(1660) 중에서도 ‘작은 노란 벽면’이 그토록 잘 그려졌다는 비평가의 글을 읽고, 베르고트는 미술관을 장식하는 수많은 그림들을 건너뛰어 자신이 간절히 보고 싶어 하던 그림 앞에 선다. 한산하고 일상적인 도시 풍경을 담은 이 그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하늘과 구름,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구교회와 신교회의 첨탑과 건물들, 정박 중인 배와 강물에 비친 건물의 그림자, 그리고 모래밭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달리 별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평가가 지적한, 그래서 베르고트가 찾아가서 보고자 열망한 그 ‘노란 벽면’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령 “작가에게 문체란 화가에게 색채와 마찬가지로 기법의 문제가 아닌 비전의 문제이다.”라고 「되찾은 시간」에서 화자 마르셀이 단언하였듯이, 예술 작품에서 표현 방식은 작품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하며, 아니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적 구별은 프루스트에게서 더 이상 무의미함을 말해 준다. 여기에 비추어 베르메르가 그려 낸 ‘작은 노란 벽면’을 응시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분홍색 모래밭과 푸른색 옷을 입은 작은 인물들, 즉 한가로이 산책하는 델프트 시민들을 포착하게 된다. 이처럼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베르고트를 사로잡은 것은 위대한 신화적 인물의 재현이나 삶 속의 중요한 사건, 특별한 광경에 대한 묘사가 아닌, 햇빛과 공기와 물의 반사를 통해 정교하게 빛을 발하는 어느 순간의 풍경이며, 그리하여 베르고트는 자신이 추구했던 ‘삶의 글쓰기’가 이런 구체적 삶의 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 진리만을 나열하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하는 ‘건조한’ 문자의 열거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자문하기에 이른다.(이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품었던 ‘예술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닿는다.) 따라서 베르고트의 이런 물음, 혹은 반성을 통해 세부적인 것이나 단편적인 것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하는 프루스트의 미학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건조하고 메마른 삶과 일상적이고 친숙한 삶의 풍경을 화폭에 고정시켜 영원한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예술의 아이러니는,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담보로 진정한 예술를 표방했던 베르고트의 죽음과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았던 스완의 죽음 사이에 놓인 간극을 드러나게 한다. 사교계 여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이 가진 미학적인 지식이나 능력을 허비한 스완의 죽음은 “석간신문을 위한 전시회 기사거리”에 지나지 않으며, 그래서 뱅퇴유의 칠중주곡 연주와 더불어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하지만, 예술을 위해 삶을 포기한 베르고트의 죽음은, 마치 베르메르의 또 다른 그림인 「저울을 든 여인」(1662)을 연상시키듯, “한쪽 쟁반에는 자신의 삶을 담고, 다른 쪽 쟁반에는 그토록 아름답게 노란색으로 칠해진 작은 벽면을 담은 천상의 저울”에 의해 영원성을 평가받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