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년간(1909~1922) ‘잃시찾’을 써 나간 마르셀 프루스트,
10년간(2013~2022) ‘잃시찾’을 번역해 온 불문학자 김희영의 결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지막 7편 「되찾은 시간」으로 드디어 완간!
마르셀 프루스트 서거 100주년이 되는 올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지막 7편 「되찾은 시간」(민음사판 12, 13권)이 민음사에서 출간됨으로써 총 13권이 완간되었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3편 「게르망트 쪽」, 4편 「소돔과 고모라」, 5편 「갇힌 여인」, 6편 「사라진 알베르틴」에 이어 10년 만의 결실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총 7편에 이르는 연작 소설로서, 그 분량을 합하면 수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이다. 2013년 첫 책인 1편 「스완네 집 쪽으로」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출간 100주년을 맞아 펴낸 이래, 민음사에서는 7편 「되찾은 시간」을 끝으로 2022년에 완역을 성취했다. 이로써 김희영 역자의 ‘프루스트 번역 10년 프로젝트’가 완료되었으며, 이는 세기를 교차하는 문학사의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원서 1편 「스완네 집 쪽으로」는 1913년에 출간되었으며, 원서 7편 「되찾은 시간」은 프루스트 사후 오 년 만인 1927년에 출간되었다. 민음사에서는 1편 출간 100주년 기념이 되는 해인 2013년부터 완역을 목표로 『스완네 집 쪽으로 1, 2』(1권, 2권)를 출간하였으며,(1판 1쇄일은 2012년 8월 25일) 마지막 7편 『되찾은 시간 1, 2』(12, 13권, 1판 1쇄일은 2022년 11월 18일)을 프루스트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에 출간함으로써 완간의 순간을 맞이했다.)
1909년부터 1922년 11월 18일 죽는 날까지, 마르셀 프루스트는 작가의 내적 고향은 동일하며 따라서 작가는 엄밀한 의미에서 한 권의 책밖에 쓰지 못한다고 외치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고 또 썼다. 프루스트가 1909년에 계획했던 책은 ‘마음의 간헐’이라는 제목 아래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의 이분법적인 구성이었다. 그러나 그가 출판사 찾기에 실패하면서 1913년 신생 출판사인 그라세 출판사(현 갈리마르 출판사)가 자비 출판을 조건으로 예고한 작품은 처음의 두 권에서 세 권으로 늘어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제목 아래 「스완네 집 쪽으로」, 「게르망트 쪽」, 「되찾은 시간」의 세 권이었으며, 이것이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수많은 교정 작업 덕분에 일곱 권으로 늘어난다. 그러므로 「되찾은 시간」의 여정은, 일찍부터 문학적인 소명을 꿈꾸어 온 한 문학청년이 무엇을 쓸 것인가와 어떻게 쓸 것인가에 관한 답을 발견하고, 드디어는 작가의 꿈을 실현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 「되찾은 시간」에 관하여
「되찾은 시간」은 질베르트의 초대를 받아 화자가 콩브레 근방 탕송빌성에 체류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과거 콩브레를 산책하며 품은 꿈이 하나씩 무너지는 걸 보면서, 공쿠르의 미발표 일기를 읽으면서, 마르셀은 자신이 오랜 세월 꿈꾼 문학이 이런 것이라면 차라리 재능의 부족으로 글을 쓸 수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며 삶과 문학에 대한 깊은 회의와 우울증에 빠진다. 이어 긴 투병 생활이 이어지고 파리를 떠나 두 번의 요양원 생활을 한다. 그러다 1914년과 1916년 파리에서의 짧은 체류 중 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목격하고, 비행기 공습으로 컴컴한 파리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쥐피앵이 운영하는 수상쩍은 호텔에서 기이한 손님들과 사슬에 묶여 채찍질당하는 샤를뤼스를 목격한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옛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게르망트 대공 저택에서 열리는 오후 모임에 참석하려 저택에 들어가는 순간 포석을 밟으면서, 또 연이어 게르망트 대공의 서재에서 어린 시절 종탑을 보며, 화자는 문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일련의 비의지적 기억을 체험한다. 그리하여 “문학 작품의 모든 소재는 내 지나간 삶”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고 ‘가면무도회’에 들어가는 순간,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나, 드디어 피로와 승화의 절정에서 긴 여정을 마감한다.
■ 심리적 파장과 내면의 인상까지 담은 총체적 리얼리즘
지옥으로 하강한, 실패한 귀족 샤를뤼스 이후 새로이 열리는 20세기
「되찾은 시간」 전반부에서 화자는 공쿠르의 미발표 일기를 읽으며 실망을 금치 못하는데, 이 글은 공쿠르가 실제로 쓴 일기가 아니라 프루스트가 공쿠르의 문체를 모방해서 쓴 허구적 패스티시다. 프루스트는 왜 공쿠르를 자신의 문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을까. 프루스트는 객관적인 사실만 나열하고 묘사하는 기록 문학은 이미 드러난 진리만 반복하는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문학이라고 비판한다. 현실을 넘어서서 존재 깊숙이 매몰되어 있는 내적 현실까지 포착하려는 프루스트의 시도는 공쿠르나 졸라의 리얼리즘 문학과는 다르다. 프루스트의 문학은 단순한 현실의 묘사를 넘어서서 우리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파장이나 내면의 인상까지 담으려고 한 총체적인 리얼리즘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 작품을 물신화하는 공쿠르의 성향은 프루스트가 보기에 일시적인 미학적 기쁨에만 몰두하는 실패한 예술에 해당한다. 프루스트는 도스토옙스키와 플로베르에 주목하며, 단순한 문체론적 모방을 넘어 작가의 내적 고향을 탐색할 수 있는 패스티시 작업은 자기 정화, 자체 창조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프루스트에게 러스킨의 번역이나 발자크와 플로베르 또는 공쿠르, 나아가 미술이나 음악, 건축 등 예술 전반에 대한 성찰은 작품의 주요한 주제가 되며, 이런 주제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과 추적을 통해 자신의 글을 창조한다.
「되찾은 시간」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은 샤를뤼스다. 모두가 비행기 공습으로 공포에 떠는 가운데 화자는 어느 날 우연히 쥐피앵이 운영하는 유곽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사슬에 묶인 채 채찍질당하는 샤를뤼스의 모습을 목격한다. 또 샤를뤼스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젊은 남성의 모습에서 (샤를뤼스가 연모하는) 모렐의 이미지를 본다. 샤를뤼스란 인물은 남성성과 여성성, 물질과 정신을 결합한 존재로, 지옥으로 하강한 인물, 추락한 늙은 귀족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샤를뤼스와 더불어 19세기의 모든 가치와 전통은 종말을 고하고, 그와 더불어 새로운 20세기가 시작된다. 화자에게 스완과 샤를뤼스는 예술의 딜레탕트인 실패한 예술가의 전형이며, 샤를뤼스는 모렐이란 바이올리니스트를, 스완은 오데트란 화류계 여인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삶을 위해 예술을 포기한 자들이다. 화자는 샤를뤼스와의 만남을 통해 문과 달의 이미지와 마주한다. ‘문’과 ‘달’의 이미지는 「되찾은 시간」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이미지로, 지옥의 어둠 속으로 하강한 후에야 새로운 빛에 이를 수 있다는 듯, 이들의 실패한 삶을 마주한 이후 비로소 화자는 새로운 삶, 새로운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따금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를 구원하는 신호가 온다. 모든 문을 두들기지만 그 문은 어느 것에도 이르지 않고, 그렇지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문, 100년 동안 헛되이 찾았을지도 모르는 문에 알지도 못한 채 부딪치게 되고, 그리하여 문이 열린다.”(13권 24쪽)
■ 비의지적 기억과 인상의 진리, 가면무도회와 몸의 글쓰기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오직 문학, 예술
요양원 생활 이후 오랜만에 사교계에 발을 들이는 화자는 게르망트 대공 부인이 개최하는 오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 고르지 않은 포석을 밟으며 예전에 마들렌을 먹을 때와 똑같은 기쁨을 맛본다. 또 발베크 근교의 나무들과 마르탱빌 종탑의 풍경, 뱅퇴유 음악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되찾은 시간」에서 화자는 고르지 않은 포석과 스푼 소리와 뻣뻣한 냅킨을 통해 마들렌을 맛보았을 때처럼 어떤 초시간적 실재를 경험하지만, 나무들의 풍경이나 마르탱빌 종탑은 꿈이나 상상력에 호소하는 자연의 모호한 인상을 가리키고, 뱅퇴유 음악은 미학적 인상이라는 점에서 순수한 의미에서의 비의지적 기억과는 구별된다. 프루스트는 이 모든 것들을 가리켜 인상(impression)이라고 칭한다. 자연의 인상은 어떤 사유의 이미지를 감추고 있으며 “절반은 대상 속에 싸여 있고, 다른 절반이 우리 마음속으로 연장되어 우리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이중적인 존재(13권 63쪽)이므로, 이런 대상 속에 감추어진 인상을 예술가는 펼치고 설명하고 번역해야 한다. 작가는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인상을 파헤치고 규명하고, 자신의 언어로 옮기는 번역가다.
그렇다면 이런 인상을 어떻게 자신의 언어로 번역할 것인가. 은유를 통해서다. 은유는 외관의 미학이 아닌 깊이의 미학을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프루스트의 은유는 두 요소의 현존이 아닌,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기하고 대체하는 ‘부재 속의 은유’다. 그것은 본질이 가진 동일성이나 유사성보다는 차이를 겨냥하며, 이 차이가 무한한 의미를 생산하고 텍스트를 다른 것으로 향하게 한다. 프루스트에게 은유는 단순한 기법상의 문제가 아닌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며, 모든 것이 획일적인 세계에서 예술만이 이런 진정한 차이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라면, 그것은 은유가 겨냥하는 공통된 본질보다는 차이가, 각각의 개별적인 주체가 보고 이해하는 관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이런 차이와 다양한 관점을 통해서만 타자가 보는 세계 속으로, 무한 속에 굴러가는 타자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되찾은 시간」의 진정한 주인공은 ‘시간’이다. 그것은 대문자 ‘시간(Temps)’으로 쓰는 고유 명사이며, 작품의 첫 번째 단어인 ‘오랜 시간(Longtemps)’과 작품의 맨 마지막 단어인 ‘시간 속에서(dans le Temps)’를 통해 반복되어 나타나며 작품의 순환적 성격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이런 시간의 주제 위에 축조되었음을 말해 준다. 프루스트가 「되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