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이 책은 1910년 이승만 대통령의 프린스턴 대학 박사학위 논문(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S)을 번역한 것이다. 그가 왜 이런 제목을 선택했을까? 이 제목은 1899년~1904년(5년 7개월) 한성감옥 투옥시 이미 구상되었을 것으로 역자는 추정한다. 살아서 감옥을 나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1904년 감옥에서 쓴 불후의 명저「독립정신」에서 보듯이 그는 우리나라를 구해 줄 수 있는 나라로 신흥국 미국을 꼽았다. 감옥에 있는 동안 미국, 캐나다 등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많은 책을 읽고 소화해서 당시 조선인 누구보다도 세상 물정(物情)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이야말로 차세대 세계를 이끌어 갈 나라로 생각했다.
이승만은 1904년 일 ㆍ 러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퇴한 결과 갑자기 석방되어 밀명(密命)을 띠고 미국으로 갈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났다. 고종이 미국특사로 보낸 셈이다. 특사로서 임무를 수행한 후, 그는 귀국하지 않고 이 기회를 이용해서 미국에서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독립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 헌신할 뜻을 확실히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1905/1906년 학기부터 조지 워싱턴 대학교(학사), 하버드 대학교(석사) 과정을 마치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1910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을 선택한 데에는 이 박사로서는 건국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해한 미국은 백여 년 전(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해, 천부의 권리인 자유, 평등 그리고 정의를 표방하며, 유럽의 식민열강으로부터 중립통상을 지키면서 번영하고 있는 나라였다. 그가 무엇보다 주목한 것은 구주 식민열강과는 달리 미국은 영토 욕심이 없다는 점과, 백여 년 동안 영국 등 구주 열광과 각축하며 중립통상을 지켜내서 자유통상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장차 우리나라가 독립하자면 자유통상과 기독교, 자유민주공화제에 입각한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 그의 논문에서는 유럽 식민 열강, 특히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으로부터 중립통상(中立通商)을 지켜내려는 미국 독립 초창기 정치인들의 신념과 용기 있는 노력을 묘사하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이 박사는 우리나라 독립문제에 있어서도 중립통상을 내세운다면 미국도 이를 지지하고 도움을 줄 가능성이 크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는 미국의 중립통상 역사를 깊게 이해한다면 장차 독립을 위해서 미국의 도움을 얻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을 선택하고, 이 논문을 통해 미국을 좀 더 깊게 이해하게 된 소이(所以)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이 박사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초창기엔 현실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너무 이상론(理想論)에 치우친 감도 없지 않다. 이 박사의 비폭력 외교지상 노선이라든지, 1919년의 조선의 위임통치청원 같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상주의적 태도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박사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존재를 안 것은 1924년이었고, 결국 20년간 미국에 의해 기만을 당한 셈이었다. 이후 이 박사는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었고, 미국을 믿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을 적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미국이 앞으로 세계질서의 리더가 될 것이라는 점은 여전히 의심하지 않았다. 즉 미국을 철두철미 이용할 줄 아는 용미(用美)주의자로 변신했던 것이다. 이승만 박사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다 하겠다.
이승만은 1904년 일 ㆍ 러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퇴한 결과 갑자기 석방되어 밀명(密命)을 띠고 미국으로 갈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났다. 고종이 미국특사로 보낸 셈이다. 특사로서 임무를 수행한 후, 그는 귀국하지 않고 이 기회를 이용해서 미국에서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독립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 헌신할 뜻을 확실히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1905/1906년 학기부터 조지 워싱턴 대학교(학사), 하버드 대학교(석사) 과정을 마치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1910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을 선택한 데에는 이 박사로서는 건국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해한 미국은 백여 년 전(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해, 천부의 권리인 자유, 평등 그리고 정의를 표방하며, 유럽의 식민열강으로부터 중립통상을 지키면서 번영하고 있는 나라였다. 그가 무엇보다 주목한 것은 구주 식민열강과는 달리 미국은 영토 욕심이 없다는 점과, 백여 년 동안 영국 등 구주 열광과 각축하며 중립통상을 지켜내서 자유통상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장차 우리나라가 독립하자면 자유통상과 기독교, 자유민주공화제에 입각한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 그의 논문에서는 유럽 식민 열강, 특히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으로부터 중립통상(中立通商)을 지켜내려는 미국 독립 초창기 정치인들의 신념과 용기 있는 노력을 묘사하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이 박사는 우리나라 독립문제에 있어서도 중립통상을 내세운다면 미국도 이를 지지하고 도움을 줄 가능성이 크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는 미국의 중립통상 역사를 깊게 이해한다면 장차 독립을 위해서 미국의 도움을 얻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을 선택하고, 이 논문을 통해 미국을 좀 더 깊게 이해하게 된 소이(所以)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이 박사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초창기엔 현실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너무 이상론(理想論)에 치우친 감도 없지 않다. 이 박사의 비폭력 외교지상 노선이라든지, 1919년의 조선의 위임통치청원 같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상주의적 태도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박사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존재를 안 것은 1924년이었고, 결국 20년간 미국에 의해 기만을 당한 셈이었다. 이후 이 박사는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었고, 미국을 믿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을 적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미국이 앞으로 세계질서의 리더가 될 것이라는 점은 여전히 의심하지 않았다. 즉 미국을 철두철미 이용할 줄 아는 용미(用美)주의자로 변신했던 것이다. 이승만 박사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다 하겠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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