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등단한 이래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130여 권의 저서를 간행. 특히 1995년 호주에서 영문 시선집 <아침 이슬(Morning Dew) : 페이퍼 바크 출판사(Paper Bark Press)>이 출간되자마자 매진되었고 그 결과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작가들이 초청되는 시드니작가축제(Sydney Writers' Festival)에 1996년 주빈으로 초대되었다. 시드니작가축제에 참가한 고은 시인은 많은 청중 들 앞에서 한국문학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경기대학교 대학원 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 하버드옌칭스쿨 연구교수, 미국 버클리대학교 초빙교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의장, 세계 시 아카데미 한국대표 등을 역임했다.
눈발을 뚫고 왔다 추위에 떨며 왔다 촛불의 함성은 멈추지 않는다 100만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어둠의 세력은 포위됐다 불의와 거짓은 포위됐다 국민의 명령이다 범죄자를 구속하라
눈보라도 겨울바람도 우리들 분노와 슬픔으로 타오르는 마음속의 촛불은 끄지 못한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멈춰서지 않는다
나라를 구출하자 정의를 지켜내자 공정을 쟁취하자 희망을 살려내자
눈에 띄지도 않는 작은 나는 백만 촛불 중의 하나가 아니라 백만 촛불의 함성과 한몸이 된 크나큰 빛이 되어 나 여기 살아있다
이게 나라다 이게 민주다 이게 역사다 촛불아 모여라 될 때까지 모여라
빙등을 덥히며 박몽구
비보처럼 첫 결빙 소식 날아든 12월의 첫 토요일 북악은 얼음의 도가니에 벼린 바람을 풀었지만 광화문에서 숭례문까지 이무기가 꿈틀거리듯 거대하게 이어진 인간 띠를 얼어붙이지 못했다 뭇 이목들 피해 키를 겨루며 머쓱하게 올라간 빌딩들 사이에서는 연방 살을 에는 칼바람 쏟아졌지만 젊은 연인들이 켜든 촛불 하나 끄지 못했다 거짓의 교과서를 던지고 나온 친구들 쇠를 담금질하다 달려 나온 사람들 바늘로 청춘을 짓이기다 나온 재단사 그물코를 빠져나와 거리를 유유히 떠도는 또 다른 안종범을 찾아 나선 교도관들 비좁은 길도 넉넉하게 유모차를 밀고 가는 누이들…… 모두 함께 모여 겨울밤을 데웠다 빙등을 켠 종로통보다 수은주를 5도나 높여 살얼음쯤은 너끈히 녹이고도 남아 손에 손에 촛불을 켜든 사람들의 체온이 구리 이순신의 언 발을 떼어주었다 차가운 돌 옷을 걸친 세종 임금도 이 날만은 진눈깨비를 헤치고 나와 저를 낳아준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
대통령의 이발사가 살지 않는 효자동 골목마다 높은 차벽 담 너머 둘러쳐지고 푸른 기와집으로 가는 길 아무리 막아도 마침내 새벽은 열리고 마는가 차가운 철망으로 무장한 경찰버스를 그림판 삼아 붙인 종이 들국화며 진달래로 계절을 거슬러 따스한 체온이 오고 간다 투구로 젊음을 누른 친구들 찬바람을 삼키고 선 또 다른 젊음들에게 뜨거운 손난로를 던지고 일그러진 얼굴을 한 무기를 내려놓았다
이렇게 새벽은 함께 맞는 것이다 서로 증오의 벽을 허물며 오일팔 때도 차마 넘지 못한 벽 육이구 때 이한열이 끝내 다 가지 못한 길 이어서 북악의 얼음을 넘어서 간다 살을 에는 찬바람 이기고 겨울 속 따스한 나라를 일군 사람들 저를 버리고 온몸을 리듬에 맡겨 파도를 탄다 따뜻한 빙등으로 긴 밤을 건너 가로막는 바위를 넘어 깨끗한 해 들어 올린다
광장은 비어 있다 백무산
우리가 우리를 버리고 기꺼이 이곳에 모인 것은 시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모여 이토록 뜨거운 광장을 이룬 것은 데모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저 문란한 연회장은 우리의 나라가 아니고 저 지저분한 계모임은 결코 우리의 정부가 아닌데 우리가 저들에게 요구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이곳이 모인 이유는 저들이 국민을 탄핵했기 때문이다 저들 맘대로 도륙하고 처분한 우리가 맡긴 양 떼를 찾아오기 위해서다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은 진압을 하기 위해서다 국헌을 걸레로 만든 쥐들의 내란과 개들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이 광장에 모인 것은 우리 삶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다 부패한 나라에서는 누구든 정직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광장에 모인 것은 철거를 하기 위해서다 저들의 금고에 빼돌린 정부를 회수하기 위해서다 저들이 담장을 치고 착복한 국가를 압수하기 위해서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은 의회를 위해서다 지금 이곳이 바로 국민의 의회이기 때문이다 이 광장이 바로 이 나라 최고 권력 기구인 시민의회이기 때문이다 이 의회를 개돼지들의 떼거리로 취급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은 억류된 역사의 수문을 열기 위해서다 피로 이뤄낸 민주주의를 썩은 물에 익사시킨 불통과 독재의 댐을 폭파하기 위해서다
저들의 금고에 새긴 애국에 똥칠을 하기 위해서다 저들의 동상에 새겨진 권력의 문장을 들어내고 새로 쓰는 역사의 공동 집필자가 되기 위해서다
이제 대중은 양 떼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사자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광장이 더 이상 시위나 데모가 아닌 것은 촛불은 약자의 분노 행진이 아니라 주권자의 권리 행진이기 때문이다
광장에서는 그 누구든 어디서건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중심이기 때문이다 광장의 평등은 우리 삶의 뒤틀린 질서를 질책하는 뜨거운 심장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광장은 언제나 비어 있다 우리가 모여 빈틈없이 가득 채워진 이 순간에도 광장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뜨겁게 뜨겁게 비어 있는 것이다
바람을 삼키는 촛불이여! 이재무
생일상 축하 케이크, 연인들 분홍빛 연정이거나 청춘의 푸른 낭만을 위해 은은히 커튼을 드리웠던 주홍 불빛들 거리로 쏟아져 나와 울면서,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녹여내면서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우리는 바람 불면 꺼지는 촛불이 아니다 우리는 바람 불면 더욱 활활 번져 타오르는 들불이다 하나의 촛불은 바람을 두려워하지만 백만 개 천만 개 촛불은 바람을 삼켜버린다 하나의 촛불은 어둠을 숨차하지만 백만 개 천만 개 촛불은 어둠을 지워버린다 촛불과 촛불, 목소리와 목소리가 만나서 요동치는 강물이 되고 우뚝 솟은 산이 되는 것을 보아라 혼자서는 불안하게 흔들리며 수줍던 분홍들이 백만 이백만 천만의 불꽃 파도가 되어 일렁이고 굽이치며, 비참과 굴욕의 성(城)을, 불통과 불신과 적폐의 벽을 무너뜨린다 96%의 원칙과 상식이 1%의 반칙과 비정상을 벌하기 위해 일어섰다 쓰레기는 불로 태워야 한다 장엄한 불빛이여, 활화산이여, 촛불의 배후는 순수다 양심이다 정의다 우리는 개돼지가 아니다 재산을 강탈한 도둑을 잡기 위하여 백만 촛불이 타오른다 천만 촛불이 타오른다 타올라라, 촛불이여, 신새벽이 올 때까지!
천만 촛불 바다 (촛불혁명 기념 시집)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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