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의의지,세상을바꾸는조용한균열
-김병호(시인,협성대문예창작학과교수)
1.
사반세기전,신서정의물결이잠시일었지만,21세기가시작된지한참이지난지금‘서정’은시대를맞춰가지못하는낡은구호처럼퇴색해버린느낌이다.사람들은‘서정’이유효기간을넘겨버린낭만주의의잔재이거나,기껏근대적인주체의내연에기대어세상을자의적으로재단하려는동일시의폭력정도로이해한다.
이러한‘서정’이퇴색해버린시대에서정의운명을부여잡고있는시인이바로김기준시인이다.시인은현대시의전위에맞서고,견디며,우리시의서정을지켜내고자분투한다.그가지켜내고자하는서정시의가치는그의시「고백」처럼독백이라는발화의형식에있는것이아니라사물에대한서정적주체의태도,즉평가에있다.서정시는유의미한것,인간의이상과삶의가치에관한이야기라는걸김기준시인은누구보다잘알고있다.
시집을읽어본이들은무리없이동의하겠지만,김기준시인은‘서정’의가치를통해,자신의시적가치와이상을구축하고,자신만의소우주를형상화하려는자신만만한시인이다.그의시편들은서정의답습이아니라‘갱신’의자세를갖추고있으며,무엇보다‘감각’너머의세계에관한그리움의정서가깃들어있다.사물의변화와시간의흐름속에서현존을위협당하는모든것들과,시간의심연인과거속으로사라져버린것들에도달하려는시적의지야말로이그리움의정체일것이다.그리고시적의지가김기준시의힘이다.감각저편에있는그리움의대상은대부분비가시적이며,심지어언어로재현하거나포착할수없는부재의대상일수밖에없다.역설적으로김기준의서정은부재하는대상으로재현하고,재현할수없는것을비재현적인방식으로가시화하는언어에서비롯된다.이러한모습은공들인야심작연작시인「부여행」에서잘드러난다.
가을에여행한번갈수있으면좋겠네
붉게물든백마강에서백제여인을만나
쓸쓸하지않도록술한잔따르고
시를적어보여주려고하네
봄부터여름까지제몸을씻느라
바위틈에숨어지낸고란초
가을에반짝반짝빛나는영혼이되었네
첫사랑신라의사내는
해질무렵이면강가로나와
둥근홀씨주머니를붙인잎사귀로
수줍게사랑을고백했던그녀를몰랐네
오랜세월이흐르고
나는가을에부여로가려하네
눈물흘리던백제여인을
달빛이들때까지기다려보려하네
늙은소나무몇그루가서있는
그곳에서뜨겁게안아상처를녹이고
도깨비처럼무슨소원이든들어주는
그런여행한번할수있으면좋겠네
-「부여행4」전문
동경과그리움의정서를한층극적으로그려내고있는이작품은,세계를유동적형식으로이해하고있다.김기준시인특유의인식론과삶의유목성을행간에동시에담아내고있는것이다.시인이“붉게물든백마강에서백제여인을만나/쓸쓸하지않도록술한잔따르고/시를적어보여주려고하네”라고말할때,‘시’라는매개에주목해야한다.시인은‘시’를통해정서적이끌림을낭만주의적그리움으로환치한다.‘시’가기호적의미를획득하는순간,이러한정서적이끌림과‘감각’너머의세계에대한그리움은더욱부풀어오른다.
시인은이러한시적공간을‘부여’뿐만이아니라‘달의호수’(「고백」)나‘별의뒤편’(「오로라」)으로변주·확장한다.
“봄부터여름까지제몸을씻”고“가을에반짝반짝빛나는영혼이되”는‘고란초’는흐르는정물의유동성,세계의유동적형식을잘보여준다.이는“오랜세월이흐르고”“가을에부여로가려하”는나에게동일한감각으로감지된다.“첫사랑신라의사내”와“눈물흘리던백제여인”의시점이일치하지않는다.이둘은이시에서시차성의대상이된다.시인은“수줍게사랑을고백했던그녀를몰랐”던시차성을고스란히긍정하며,“여행한번갈/할수있으면좋겠네”라며현존의가시적세계,감각의차원에서머물고자한다,그러면서감각그너머의세계를겨냥한다.이층위에서그리움의정서가폭발한다.
그리고시인은이‘상상’의견고한동일시를헤집고‘시차’라는존재론적시간의개념을끌어들인다.“해질무렵”의강가에서“달빛이들때까지”의시차는상이한공간과시선의차이를화해시키려는동일성의논리를함축하고있다.현존과소멸이라는존재론적사고보다봄부터여름,가을의시간속에서삶의시간을이해하고,그순간‘여행’이라는유동성의구체적형식을통해비가시적인세계로시인의사유를끌어들이게된다.‘백제여인’은현존이아니라과거의한순간을마주하고있음을환기하기위한서곡에불과하며,이때의‘부여’는돌아갈수없는유토피아,근원적고향,그리움의근거가된다.
2.
서정시는대상에대한현재적의미를시인자신의관점에서취하는,주관적태도를견지한다.특히김기준시인의사랑노래들은그주관성을뛰어넘어서정시의가장보편적인주제인‘사랑’을다시한번보편화시킨다.시인은이를통해사랑이라는사건속에서,시인이어떻게자기와타자의존재를감각하는지살펴볼수있다.그래서독자가사랑의시편을읽는다는것은타인의깊은내면의장면속에서자신의생을들여다보는하나의모험이되기도한다.
너와나이제달의호수로가자
아무도찾아올수없는그곳에도착하면네귓불을타고흐르는뜨거운땀닦아줄게
미처가져가지못한,지구별에두고온영혼은은하수처럼흐르고흘러다음생에무지개타고올거야
그사이어쩌면달에도눈이내릴지몰라
그때두손꼭잡고달리던달의들판에깃발을세우고말할게함께와줘서고마워사랑해
-「고백」전문
“달의호수로가자”거나“부여로가자”(「부여행1」)는고백,혹은“별의뒤편으로달아난사랑”(「오로라」)의슬픔은,표면적으로낭만적의미의사랑으로보이기도한다.그러나김기준시인의사랑은,항상사랑을사랑하면서사랑의종말을사랑하고,그사랑들의무모함을다시사랑한다는궤적을갖는다.시인의사랑은자신만의직접적인경험에한정되지않고,그이상의의미로확대된다.또한사랑은단순한감정적의미에만국한되지않고오히려중층적의미망을형성하며,모든시적세계의것을포용하며순환시킨다.‘다음생’에관한기약이생의순환을의미하는동시에세계를구성하는법칙과제약을회피하는모습을보이는것이이런맥락이다.‘달의호수’는그자체로시적화자의존재의일부가되기도하지만,시적화자가인식하는세계즉사랑의은유로서,세계와관계를맺는다.이때시인은전략적으로“함께와줘서고마워사랑해”라는고백을통해,이작품을사랑에관한여정을넘어선,세계를이해하는한방식이자존재를탐구하는과정으로승화시킨다.
3.
이시집은크게두가지의축으로구축되어있다.하나는앞서살펴본삶의본원적근거로서의‘사랑’인데여기에는아버지와어머니로구현되는육친에관한‘그리움’도포함된다.또다른축은자기세대에관한감식안으로서의‘사회적상상력’이다.
이시집읽다보면역사적·사회적상상력이발현된다수의작품을발견할수있다.이는단순히언론인인김기준시인이가지고있는직업적소명에서비롯된것이아니라,한시대를살아가는깨어있는자로서의윤리에서비롯된것으로읽힌다.특히「채플린의편지를기다리는아버지」는이시집에서대단히독특한지위를갖는다.늦은나이에첫시집을내는김기준시인의시적위상을단박에드러내주는작품인동시에,그가수십년의습작기간을거쳐거둔시적성취가무엇인지를깨닫게해주기의미가있기때문이다.
과일도제몸을깎는칼질에아프다고사각사각소리를낸다
내머릿속에서늘들려오는소리,시계추처럼밤마다사각사각흔들린다
지팡이를옆에낀채플린의발동작은얼마나더걸어다녀야멈춰설까
고양이의애첩이었던빈접시에다시혀를대고핥기시작하는늙은신사의가을저녁,
열두번의괘종소리가울릴때까지사각사각과일을깎으며벽에걸린시계추를바라보는아버지의손놀림이떨리기시작한다
(중략)
그리움이란그런거야기다려도오지않는편지를뇌신경으로읽는거
마른장작불에타는영혼을보면주인몰래스스로사라지는고양이처럼
밤마다긴혀를내밀어상처를치유하다지쳐고향으로돌아가는거
채플린의편지를받아보지못한아버지의답장은이제같은내용의반복이다
집배원을기다리는동안늙은손등의주름을따라깊게팬강물도
닳고닳아각이없어진원형의기억도제자리로돌아오는
늦은저녁에토해내고마는배설물이다
칼질에익숙한,
과일들의신음처럼밤마다들려오는채플린의발걸음소리
아버지는여전히사각사각과일을깎으며그의편지를기다리고있다
-「채플린의편지를기다리는아버지」부분
채플린은사회주의자로서,자본주의를비판하고기꺼이매카시즘의희생양이되었던인물이다.역사와사회에대한인식변화는인간존재에관한이해의틀을바꾸는일이다.역사는모든것의최종적인의미가도달되는하나의목적지를지향하지않는다.정제된하나의물줄기가아니라목적없이흘러가는온갖물줄기의과정이다.아버지는목적없는흐름일때에만역사의소용돌이가시작된다고믿는눈치다.채플린의발걸음소리와사각사각과일깎는소리가겹치면서,초월적권력의작동없이도스스로내재성의공간을구축해가는새로운장의‘강물’을여전히기다리시는아버지의모습이양각화된다,
이시에서채플린의죽음이곤혹스러운단절이아니라하나의상태이며성질이며아버지는매일밤채플린의발걸음소리를들으며채플린이이루지못한내재성과아버지가버리지못한잠재성,혁명의사유를키워간다.시인은아버지를통해,모든것이제자리로돌아오는늦은저녁,타자와의경계를지우고그의자리가나의것이었다는,아픈신음과같은뼈아픈각성을보여준다.이각성을통해시인은모든것이흘러갈뿐이며,흘러가는모든것들은채플린의편지처럼운명적으로만날수없음을깨닫는다.
이리하여아버지와채플린은아슬하게영원히비껴가고,기다림을비로소제운명으로갖게된다.이때아버지의모습은김기준시인의또다른자아이다.이시는자본주의사회에대한참혹한패배를인정하는것이아니라우리가쌓아올린모든시간에대한애도이다.그리고시인은이러한사유의경지를우리에게선명하게보여준다.개인적으로강한인상으로남는작품이었다.
4.
글의서두에서언급한것처럼전통적의미에서서정시의경향은,시적화자의목소리를통해외적현실과내면적세계의조화를모색하려는동일성의태도를취한다.물론이러한태도자체가외적현실의중압감을일거에없애주는이데올로기적장치는아니지만,이동일성의원동력은‘사회’보다강력한‘자아’의권위에기반을두고있음에주목해야할것이다.그리고이런맥락에서김기준시인의서정시는낭만주의의영향과도무관하지않다.
그는최근우리시가낭만주의적인자아의부재에서비롯되는서정적동일성의와해,그것의결과로표현되는비유기적·비동일적,파편화의언어들이주류를형성하고있음을간파하고있는듯싶다.그래서그는자기시만의고유한서정을통해,서정을극복의대상으로취급하는있는최근의시적경향과기꺼이맞선다.
우리가김기준시인을기대하는것은,그의시가여타의시들처럼독자와의대화를얄궂게시도하는것이아니라자신만의개성적공감과감응으로유도하기때문이다.그의시는세계가숨기고있는모든가치로운존재와현상을경험하게해준다.이곳의세계와절연된새롭고엉뚱한세계를재구성하는것이아니라,현실에안주하려는불편함을투영하면서오히려이곳을새로운세계로구성하려고한다.그리고자기언어의감각적행로를충실하게따르면서도,나와타인이깃들여있는세계에관한예리한감각을놓치지않는다.세상을바꾸는서정,조용한균열과같은김기준의시심이더귀하게여겨지는까닭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