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동이트기직전,어둠을걷은지조의시인
이책은그간문학분야에집중되어왔던조지훈선생의일면을조명한글이다.조지훈선생은<승무僧舞>를비롯하여<고풍의상>,<봉황수>,<낙화>,<바위송>등수많은절창을쓴시인이면서도,한국학자이자논객으로활동한복합적지식인이었다.일제강점기에는《큰사전》편찬위원으로활동하며수많은문인·지식인들이친일로훼절을할때청년조지훈은오대산으로들어가청절한지조를지켜냈다.또자유당정권말기에는공명선거전국위원회중앙위원으로반독재투쟁의선두에섰을뿐아니라,이어지는4.19혁명에서는청년들의정신적지주가되었다.
조지훈선생은풍류문인과학자,논객으로호방하게살다가48세의짧은생애를접었다.민주와공화그리고정의대신‘법치’만이나부끼는다시암울한이시대,지성을갉아먹는지식인들이소갈데말갈데가리지않고,권력이부르면뒤도돌아보지않고달려가는교수·언론인이줄을서는이시대에,그리고추하게빛바래지는시인·문인들이넘치는시절에,조지훈선생과같은기개있는지식인을기대하면서짧지만깊고넓었던삶과사유의족적을찾을수있을것이다.
먼동이트기직전,어둠을걷은지조의시인
조지훈선생은특출한시인이고저명한대학교수였다.교과서에실려있던<승무僧舞>를비롯하여<고풍의상>,<봉황수>,<낙화>,<바위송>등한국시문학사에고딕체로기록되는다수의시를짓고,민족운동사와국학관련의글을썼다.일제강점기에는조선어학회의《큰사전》편찬위원으로들어가사전편찬사업을하다가조선어학회사건으로검거되었다.수많은문인·지식인들이친일로훼절을할때청년조지훈은오대산으로들어가청절한지조를지켜냈다.그래서<지조론>을쓸수있는지식인이되었다.
수없는절창을쓴그는시인만이아니었다.《한국민족운동사》,《한국문화사서설》,《한국학연구》등의다양한학문적업적과사상계편집위원,자유당정권말기에는민권수호국민총연맹중앙위원,공명선거전국위원회중앙위원으로반독재투쟁의선두에섰다.4.19혁명의정신적지주의한사람이었던조지훈선생은4월혁명이성공한뒤《고대신문》1면에독재와싸우다희생된제자들에게바치는헌시를썼다.
이제까지조지훈선생에관한많은연구논문과저술이주로문학분야에집중되고있는데,그는실상시인이면서학자이고논객으로활동한복합적인지식인이었다.한말의논객매천황현과일제강점기의논객단재신채호,그리고만해한용운의불타정신을잇는당대의일류논객이었고풍류지성인이었다.
박정희정권의굴욕적인한일회담을비판하여한때‘정치교수’로몰리기도했으나,그는결코정파의울타리에갇히지않았다.그래서독재정권을비판하면서<우국의서>를쓰고,기백을잃은청년들에게<큰일위해죽음을공부하라>고갈파하고,지식인들의나약성과훼절행위를엄중히비판하였다.‘큰일위해’의글에서는“내가죽음을공부하라는것은군중속에휩싸여서군중과함께여러사람에쌓여서죽는공부가아니라혼자서라도죽을공부를하라는말이다”고심오한충언을아끼지않았던것이다.
조지훈선생은풍류문인과학자,논객으로호방하게살다가48세의짧은생애를접었다.민주와공화그리고정의대신‘법치’만이나부끼는다시암울한이시대,지성을갉아먹는지식인들이소갈데말갈데가리지않고,권력이부르면뒤도돌아보지않고달려가는교수·언론인이줄을서는이시대에,그리고추하게빛바래지는시인·문인들이넘치는시절에,이책은조지훈선생과같은기개있는지식인을기대하면서짧지만깊고넓었던삶과사유의족적을찾을수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