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열흘간의 다크 투어리즘)

종교개혁,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열흘간의 다크 투어리즘)

$26.00
Description
종교개혁의 공간과 그곳의 역사에서 지혜를 구하는 다크 투어리즘
2017년이면 종교개혁이 500주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해 축제 차원에서 많은 볼거리를 제시하는 여행서가 여러 권 출간되었으나, 정작 종교개혁의 의미를 묻거나 그 의미를 성찰하고자 하는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500년이라는 간극이 그때의 암울함이나 치열함을 모두 거둬낸 느낌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축제’만 내세우는 지금의 현상이 얼마나 위험하고 부족한 생각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여타의 여행 안내서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첨예하게 대립하던 신앙의 장소를 찾아가 역사를 되짚어보고 진실을 물으며, 그 속에서 지혜를 구하는 다크 투어리즘의 여정을 담았다. 루터의 심문 장소인 보름스에서 시작하는 열흘 정도의 여행 계획에 영국을 넣지 못한 아쉬움도 있지만, 유럽 대륙의 개혁만으로도 종교개혁의 명암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저자

장수한

저자장수한은충남대학교에서역사학공부를시작해,서양사전공으로서강대학교박사과정을마쳤다.독일빌레펠트대학에서수학하는동안독일사회사에많은관심을기울였다.현재침례신학대학교교회사교수로,독일교회사와한국교회사를주로연구하고있다.저서로는『유럽커피문화기행』(2008),『그래도희망의역사』(2009),『(사회의역사로다시읽는)독일프로테스탄트교회의역사』(2016)등이있고,역서로는『산업과제국』(1984)등이있다.

목차

·열흘간의다크투어리즘1
보름스:‘시대정신’을심문하다
아이제나흐:독일어성서의산실
뮐하우젠과바트프랑켄하우젠:자유를향한열망
나움부르크:<슬픔의예수>로문화개혁의길을열다
라이프치히:토론과계몽그리고음악의도시
그리마의님브셴수녀원:중세여성들의슬픈흔적
루터의도시비텐베르크:이름만남은대학

·열흘간의다크투어리즘2
프라하:지도자없는혁명의도시
뉘른베르크:프로테스탄트로전향한최초의제국도시
아우크스부르크의푸거라이:거상이남긴최초의사회주택
<곁길산책>수도원가도:나치의도망을도운성직자들
취리히:개혁교회전통의시원이되다
바젤:에라스뮈스와유럽인문주의자들의고향

·열흘간의다크투어리즘3
제네바:칼뱅의이주민교회가주도한종교개혁
스트라스부르:도망자들의개혁도시
에슬링겐:마녀사냥의아픈기억을역사로남긴도시
<곁길산책>프랑크푸르트:재등장한반유대주의
뮌스터:새장안에갇힌왕
네덜란드의도르트교회회의:종교와정치의혼합
스웨덴:피로물든유럽최초의루터주의왕국

출판사 서평

시대의전선에선신앙,개혁의길은멀고도험했다

존위클리프와얀후스같은선구자들이사후와생전에화형을당할수밖에없었던시기를지나,“오로지믿음만으로”라는슬로건으로시대정신을표현한마르틴루터는역사상길이남을일대변화의포문을열며,역사상빼놓을수없는인물이되었다.
16세기에일어난종교개혁은기본적으로신앙개혁운동이다.그러나기독교사회였던유럽에서종교개혁은그시대의이해관계가서로부딪치는전선(戰線)이되었다.사람들의삶이교회와전적으로연결되어있었기때문에신앙의문제에는당대의정치,경제,사회,문화등모든부문에서일어나는갈등이집약되어,종교개혁이일어나는현장에서극단의대립으로표출되었다.파노라마박물관을세우게한피의참화농민전쟁이아니더라도,핍박과대립,죽음이드리운어두운양상은어디서나도사리고있었다.

첨예하게대립하던종교개혁의현장에서,그진실과한국교회의길을묻는다

가톨릭의탄압으로존위클리프,얀후스,마르틴루터,울리히츠빙글리,장칼뱅등개혁가들은개혁의길에서숱한위기에처했으며생명의위협에시달렸다.너무나도암울했던그시대에마르틴루터는당대교회와성직자가누리던일체의권위를부정하고기독교세계로가는새로운문을열었다.장칼뱅은신의전지전능함과‘예정’을내세워동시대를뒤덮고있던모든주술(呪術)을타파해버림으로써합리적인사회로가는변혁의길을시작했다.그러나루터는곧바로영방제후들의권력과타협하면서국가권력을강화하는역할을맡았고,칼뱅은자신의개혁에방해가되는이들을척결하기위해신학을활용했다.
개혁가들은여러가지점에서오류를범했고,자신들이받은탄압을다른개혁세력들에게혹은이견을말하는사람들에게그대로돌려주었다.루터나칼뱅같은주류종교개혁에맞서개혁을추진하던대안세력역시‘세상으로부터의분리’와‘천년왕국’이라는미래를선택함으로써인간과사회현실을실질적으로변화시키는데한계를드러내며좌초했다.기독교인문주의에자극을받은종교개혁은그인문주의적지향을잃어버리고개혁의길위에서길을잃고헤매는양상을드러냈다.이렇기에종교개혁은그긍정적인역할에도불구하고,동시에어두운그림자를드리웠다고할수있다.
이책은볼거리와여행코스등을소개하는일반적인여행서가아니다.저자의말대로종교개혁을이해하는과정이며,한국교회에관해이야기를나누고자하는이들을대화의장으로이끌어갈길잡이다.

-책속으로추가-

지금콘스탄츠의항구옆호텔이후스의처형을결정한공의회장소이고,주택들사이에서있는큰돌에새겨진“요하네스후스,1415년7월6일”이라는글자만이그곳에서그가처형되었다는사실을알려줄뿐이다.물론그는지금도콘스탄츠에서개혁의상징으로존경받고있지만,불의에맞섰던그의위대한정신을기억하는사람에게후스의흔적은너무나작고초라하다.우리는성공한개혁가에게는지나치게많은관심을기울이는반면,실패한개혁가들은방치한다는느낌을지울수없었다.물론프라하의분위기는사뭇다르다.하지만콘스탄츠는후스가화형을당한장소아닌가?아무잘못이없는사람을‘화형’에처하고도그곳을기억의뒤안길로밀어버린다면,그렇게역사의기억을지우려한다면앞으로힘을가진사람들이또무슨일을저지를지누가알겠는가!안타깝게도콘스탄츠에는그를기리는사람이많지않았다._141쪽프라하:지도자없는혁명의도시

한편황제와교황이보낸대사들은끊임없이압박을가해뉘른베르크시가다시가톨릭으로돌아올것을종용했다.특히농민들이목소리를높이면서종교를둘러싼싸움이위험한지경으로치닫고있었다.1524년6월2일포펜로이트에서온농민들이시청에서심문을받고있었다.농민들은성직자에게내온‘십일조’에대해불만을털어놓았다.그들은곡물을십일조로냈을뿐만아니라수확한모든과일에조차십일조를내야했다.이런상황이다보니아주소박하게살아가는사람들은,십일조를낸다고해서의로움을인정받는것은아니라고설교하는장크트로렌츠교회의설교자들에게로몰려들었다._173쪽뉘른베르크:프로테스탄트로전향한최초의제국도시

1516년부터야코프푸거는아우크스부르크의가난한수공업자들과일용노동자들을위해집을짓기로했다.그는아우크스부르크시들머리에있는자신의집부근에정원이딸린집부지를미리구입하고서1521년여름일종의헌장을발표했다.그것은기존의건축물이아니라새로운주거단지를푸거가의재원으로건설하겠다는계획이었다.이계획은그의시대를넘어사회사에서중요한의미를갖는시도였다.낡은집을철거하는작업이체계적으로이루어졌다.그대지위에가난한사람들을위한이상적인작은도시가건설되었다.요양원이나임시거처가아니라아주훌륭한주거용주택이었다.……사람들이후에설립자의이름을따서‘푸거라이’라고부른이‘작은도시’가보여준진정한지혜중하나는,이른바이‘은총의집’에들어온가족들이각기사회적존재로서개성을보호받고굴욕이아닌긍지에찬자의식을가질수있게했다는점이다.입주자들은당대에도그랬고후대에도아주적은금액을임대료로부담해야했다.건물을유지하는데충당하기에는턱없이모자란액수였지만,그것은입주자들이공짜로살지않는다는자긍심의표시였다._192쪽,아우크스부르크의푸거라이:거상이남긴최초의사회주택

종교개혁의여행길에서벗어난일탈이기는하지만,전혀관련이없는것은아니다.종교개혁시대에개혁가들을그토록엄격히이단으로처벌하고심지어화형에처한가톨릭교회는물론이고,교회의개혁을그토록열망하던프로테스탄트교회역시제2차세계대전후나치전력자들의해외망명을적극적으로도왔다는사실은아무래도선뜻이해되지않는다.수많은인명을살상한전쟁범죄자들역시예수그리스도가사랑하는대상이라고주장한다면,전쟁중에고통을당한사람들,정치적저항을택한사람들그리고유대인들에게교회는왜그토록무자비했을까?이극명한대조를어떻게설명해야할것인가?_198쪽,<곁길산책>수도원가도:나치의도망을도운성직자들

베른논쟁이후가톨릭을지지하던칸톤들의위기감이높아졌고,전쟁을준비하기시작했다.츠빙글리또한1530년대초부터스위스연방의종교개혁완성이라는목표를열정적으로추구하기시작했다.츠빙글리는가톨릭칸톤들을향해로마가톨릭의간섭을받지않는자유로운복음선포를시행할것과용병제에근거한연금제도를철폐할것을요구했지만,그의주장은받아들여지지않고있었다.그는자신의목표를위해전면적인무장공격을주장했다.개혁을받아들인칸톤들은만일전쟁이일어난다면자신들이반드시승리하리라고확신했다.
10월11일카펠인근에서개혁파와가톨릭사이에결정적인전투가벌어졌다.취리히개혁파는3500명에지나지않았으나가톨릭측병사는그두배에이르렀다.한시간도채지나지않아성직자25명을포함한취리히군500명이목숨을잃었다.전쟁의결과는츠빙글리의예상과달랐다.승리한가톨릭군의운터발덴출신사령관푸킹거는츠빙글리를칼로찔러죽이고부하들을시켜그사지를찢은뒤불태웠다.그가추앙받는성유골로남는것을막기위해서였다.루터는그의죽음에“칼을든자는칼로망한다”라는성서의글귀를인용했다._233쪽,취리히:개혁교회전통의시원이되다

당연히그는‘후마니타스’를문헌연구와연결시켰으며,인문학연구는종교와신앙심을이해하는데도움을줄수있다고보았다.에라스뮈스는‘후마니타스’라는개념으로정신교육,인격형성,내면의종교성등을하나로통일시켰다.‘그리스도인의후마니타스’라는말을통해그는사회부문에서의모범적인행동뿐만아니라개별인간의상대적인고유가치와그존엄성을새롭게강조했다.이는중세교회의인간이해와달랐을뿐아니라루터의‘죄’많은인간의본성이라는개념과도크게대조된다.에라스뮈스의영향은실로깊고넓었다.그는루터의개혁에용기를불어넣고개혁의도구를손에쥐어주었을뿐아니라츠빙글리의개혁사상에토대를마련해주었으며,칼뱅의인문주의에도영향을미쳤다.칼뱅이성서문자주의에묶이지않을수있었던것역시에라스뮈스에게서받은자극이낳은결과물이었다._247쪽,바젤:에라스뮈스와유럽인문주의자들의고향

스페인출신으로독자노선을걷던사상가세르베투스는출판업자,지질학자,천문학자,의사등다양한직업을거친당대의지식인이었다.그는칼뱅의『기독교강요』에비판적인주석을달아보냈을뿐아니라1553년에『기독교의재건』이라는책을출간해칼뱅의주요논지들을부정하는한편,원기독교로의회복이라는인문주의와재침례파의이상을지지했다.세르베투스는그해8월리옹의가톨릭재판정에회부되었고,재판이진행되는중에가까스로탈주에성공했다.그러나1553년10월칼뱅의개혁도시제네바인근에있는샹펠에서화형에처해졌다.주요죄목은삼위일체론과유아세례를반대했다는것이다.……세르베투스의심문과정에칼뱅은주요증인이었다.제네바에서그의증언은결정적으로영향력을발휘했다.칼뱅은세르베투스의화형에반대하지않았으며,오히려세르베투스에게사형선고가내려지도록유도했다고볼수있다.칼뱅이개혁을지도하는도시에서그것도종교적이유로칼뱅의적극적인개입없이화형을당했다는것은아무래도억지에가까운주장이다.칼뱅은그이듬해인1554년『미겔세르베투스의오류에대항하는정통신학의변호』를출간해이단을억누르고극단적인경우사형에처하는것이그리스도인공직자의의무라고선언함으로써,세르베투스의처형을적극적으로옹호했다._268쪽,제네바:칼뱅의이주민교회가주도한종교개혁

스트라스부르가갖는또하나의중요한의미는인쇄술의발전이다.15세기인쇄술의발전은지식기술의혁명이었다.서기1000년부터2000년사이에지식기술분야에서일어난가장중요한혁명이라고할이혁명은적어도크게세가지조건이충족되어야만성취될수있었다.
첫번째조건은지식의확산에대한수요다.대학과상업의발전이이런수요를크게증대시켰다.두번째조건은수없이많은글자를생산할재료다.다행히활자를주조하는데필요한납은이미충분히있었고,종이역시활판인쇄기의개발을전후해널리쓰이기시작했다.이재료들은활판인쇄술의발전과상호작용을하면서발전했다.그러나이두가지조건이충족되었다고해서곧혁명이일어나는것은아니다.혁신적인아이디어를가진사람이필요했다.구텐베르크가바로그런사람이었고,그래서후에‘천년의인물’이라는명성을얻었다._288~289쪽,스트라스부르:도망자들의개혁도시

종교개혁자체가마녀재판을더욱부추겼다는증거는없다.다만종교적갈등과종교전쟁시기에가톨릭이든프로테스탄트든마녀재판이라는극단의방법을각기자기분파신앙의정당성을확보하는수단으로채택한것으로보인다.결국마녀재판의종식은종교전쟁의여파가잦아들고새로운정신적기풍이마련되는18세기의계몽주의를기다려야만했다._306쪽,에슬링겐:마녀사냥의아픈기억을역사로남긴도시

루터에의해오히려강화된반유대인정서는유대인들이독일인들의경제적이익을가로채고있다는의구심때문에더욱증폭되었다.프랑크푸르트는그불꽃을보여준도시였다.이도시의장인들과상인들은네덜란드인들과유대인들이이주해온것이경제불황의원인이라고생각했다.도시민들의불만은1614년8월유대인들에대한대대적인테러로이어졌다.시민들이유대인들의집을약탈했고,그들을도시밖으로추방했다.그러나실제로유대인들의경제활동은도시경제에활력을불어넣고있었고그들은상업에서능력을입증했을뿐아니라,좀바르트가자본주의의기본적인준거라고본복식부기를채택해금융업에뛰어드는등자본주의적경제를선도했다.프랑크푸르트에는그들을대체할인적자원이아직까지없었다.1616년시의회는이반란의주동자를처형하고유대인들의안전을보장했다.유대인들은다시프랑크푸르트로돌아왔고반란의와중에파괴된유대인공동체도서서히복구되어유대인들은이전의경제적위상을회복했다._316~317쪽,<곁길산책>프랑크푸르트:재등장한반유대주의

재침례파가1529년슈파이어제국의회에서이단으로정죄된것도따지고보면정치와신앙의혼합을당연시하는가톨릭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