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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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종교개혁 500주년, 오늘 다시 루터를 읽는다
현대 서구 사상을 이해하려면 헬레니즘(그리스·로마 문화)과 헤브라이즘(기독교)을 공부하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현대 기독교를 알려면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 하겠다. 루터는 바로 종교개혁 운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 책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프로테스탄트의 상징과도 같은 마르틴 루터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물이다. ‘시대의 선비’로 당대에 이름 높았던 고(故) 김성식 고려대학교 교수가 1967년 종교개혁 450주년을 맞아 출간한 책을 복간했다. 반세기 전에 쓰인 글이지만 지금 기준으로도 무리 없이 읽히는 그의 명문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루터의 유년과 학창 시절부터 종교개혁의 폭풍을 거쳐 죽을 때까지 전 과정을 담았다. 루터의 신앙 체험과 깨달음, 당시 로마 교황청의 부패상, 루터가 종교개혁에 나서게 된 신학적·정치적 배경, 개혁 과정에서 겪은 생사를 넘나드는 투쟁, 루터주의와 루터교회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상세하고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다. 기독교 신자는 물론이고 역사에 관심 있는 학생이나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만한 책이다.
저자

김성식

저자 김성식은 1908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했다. 향리의 일신학교와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센다이시 도호쿠 학원과 규슈 대학 법문학부(서양사 전공)를 졸업했다. 1935년부터 평양숭실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면서 1938년 학교는 폐교되고 그와 동시에 해직되었다.
광복이 되자 남으로 내려왔고, 한국전쟁 중에는 해병대사령부 전사과에서 『한국해병대 전투사』를 편찬했다. 1946년 고려대학교에 사학과를 창설하며 서양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1973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고려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고려대학교 초대 교무처장, 한국사학회 이사, 국방부 한국전쟁사 편찬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정치교수라는 누명을 쓰고 1965년 말부터 1968년 초까지 해직 시절을 보냈다.
1965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8년에는 고려대학교 사학회에서 『환갑기념 논문집』을 증정받았다. 정년퇴직한 뒤에는 고려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서 명예교수를 지냈고, 1978~1979년 두 차례에 걸쳐 유럽과 미국의 고적을 답사했다. 1980년 숭실중·고등학교 학교법인 이사장에 취임했고, 1984년부터 별세하기 전까지 ≪동아일보≫ 객원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86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지은 책으로는 『대학사』(1950), 『독일학생운동사』(1957), 『역사와 현실』(1968), 『광복을 찾아서』(공저, 1969), 『역사의 언덕에서』(1973), 『안정의 논리』(1977), 『내가 본 서양』(1979), 『역사와 우상』(1980), 『쓴 소리 곧은 소리』(1986) 등 다수가 있다. 논문으로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전망」(1959), 「현대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적 과제」(1963), 「루터와 그의 업적」(1967),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1968) 등 다수가 있다.

목차

감사의 말
편집자의 말

책을 펴내며

1장|역사와 전통(루터 시대)
1. 정치와 국제 관계
2. 사회와 경제
3. 정신과 문화
4. 로마교회

2장|루터의 수업 (1483~1517)
1. 루터의 수학
2. 루터의 시련
3. 루터의 체험 : 탑의 체험

3장|세기의 대결 (1517~1519)
1. 95개조 논제
2. 음모와 현책
3. 세기의 대결 : 라이프치히 토론

4장|최후의 단계를 넘어 (1519~1521)
1. 사명감에 굴곡은 없다
2. 교서「주여! 일어나소서」를 불사르고
3. 최후의 단계를 넘어

5장|루터주의의 성립 (1521년 이후)
1. 루터의 밧모섬
2. 급진과 보수
3. 루터주의의 성립
4. 결론

책을 마치며

루터 연보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만약 루터의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래도 상상은 해볼 수 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삼국 통일이 신라가 아닌 고구려의 주도로 진행되었다면 어땠을까?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다면 세계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역사에 결코 만약은 없겠지만 상상만으로도 흥미로운 일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을 개혁하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는 일도 그만큼 흥미로운 주제다. 루터가 아니라도 그만큼 걸출한 인물이 언젠가는 등장했을까? 아니면 가톨릭이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개혁해 면죄부 판매를 거둬들이고 폭주하던 교황 권력을 제어하게 되었을까? 어쩌면 모든 개혁 시도가 좌절된 채 기독교는 서구의 주류 종교의 위치에서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면 이후 서구의 역사, 그리고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이쯤 해서 우리는 루터의 삶과 철학, 신앙을 한 번쯤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루터가 없었다면 종교개혁 역시 없었을지 모르며, 설령 있었다고 해도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형태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탄생을 이해할 때 예수의 삶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종교개혁을 이해할 때 루터의 삶은 그 근본에 해당한다.

루터의 출현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성립은 예수의 출현이나 기독교의 성립과 비슷하다. 예수 이전에도 많은 예언자와 제사장 등 종교인이 있었으나 시대에 뒤처지고 퇴화한 유대교를 개혁하거나 변혁하지 못했다. …… 루터가 나오기 전이나 루터가 활동하던 시기에도 많은 철학자와 교황, 대주교, 주교, 신부가 있었으나 그들은 고착화된 가톨릭교를 바꾸지 못했다. _12~13쪽

인류사에 다시 나오기 어려운 선각자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은 그의 전기를 읽는 일이다. 이 책은 루터의 유년과 학창 시절부터 시작해 교황청과 투쟁하며 종교개혁을 이루고 결국 루터주의를 성립시킨 뒤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전체 인생 역정을 다루었다. 1960~1980년대 군부독재 정권에 맞서며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이름 높았던 고(故) 김성식 고려대학교 교수의 책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복간했다. 당대의 대학자가 루터의 삶을 이야기하며 군데군데 자신의 해석과 평가를 곁들였으니 진정한 루터 평전이라 할 만하다. 교황청의 탄압에 맞서 기독교를 구한 수도사의 일대기를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킨 학자가 저술한 점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사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의도하지 않았다
1517년 10월 31일은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교회의 문에 그 유명한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를 써 붙인 날이다. 종교개혁은 그의 95개조 논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루터는 95개조가 적힌 문서 두루마리를 교회 문에 못질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행동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만약 알았다면 그런 변화를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루터는 당시까지 1000년 넘게 이어져온 가톨릭 세계 질서를 무너뜨렸다. 그러니 루터를 잘 모르는 이들은 그를 급진적인 혁명가나 선동가라 여기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정작 루터 자신은 깊은 신앙심의 소유자였고 상당 부분 보수적이기까지 한 가톨릭 수도사였다. 예컨대 95개조 논제가 발표되고 파문이 확산되는 중에도 교황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바라는 루터의 모습이 책 곳곳에서 목격된다.

루터에 대한 비판과 공격이 일어나자 루터는 이 모든 분규를 로마에 호소해 결말을 지으려고 했다. 더구나 앞으로 일대 논쟁을 벌이게 될 에크가 「오벨리스키(obelisci)」라는 글을 써 보내자 루터도 「아스테리스키(asterisci)」라는 글을 보냈으나 결국에는 교황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를 놓고 보아도 당시 로마 교황에 대한 루터의 복종심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_158쪽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루터를 지지하는 기사와 농민의 반란이 독일 곳곳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기존의 세속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움직임에 결코 동조하지 않았다. 훗날 자본주의 시대를 열게 되는 대금업 등 이자 수취 관행에 대해서도 루터는 중세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부정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보수적이었던 수도사 루터는 어쩌다 급진적인 개혁의 선봉에 서게 되었을까?

루터는 자본가의 고리대금으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는 교회는 그만큼 타락한 증거라고 했다. 이런 루터의 후진적인 태도에 대해 베버나 트뢸치 같은 학자는 루터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과 사업관에 밝지 못했던 데서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면서 이자를 금지하기보다 “(이자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문제로 본 칼뱅의 생각이 훨씬 근대적이고 자본주의 정신에 가깝다고 평했다. _229쪽

모든 것은 성서를 근거로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성서에 쓰인 것만 인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면죄부는 성서에 없는 것이며 교황청이 발행한 종이 문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면죄는 교황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이며, 죄의 사함은 면죄부 구매 금액이 아니라 개개인의 믿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의 95개조 논제에는 면죄부 판매를 향한 비판, 교황의 절대적인 사면 권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상세히 담겨 있다. 루터의 95개조 논제는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인데 이 책에서는 그중 핵심적인 30여 개 조문을 쉽게 풀어써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누가 죄벌을 사해줄 수 있는가? 누구나 신 앞에 공손히 머리 숙이고 뉘우치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교황은 하나님이 죄를 사했다는 것을 선언하거나 보증하는 것 외에 어떤 죄라도 사할 권한이 없다(6조). ……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어떤 형벌이라도 자진해서 받아야 하는 것인데, 면죄부 따위로 쉽게 죄의 사함이 된다면 사람들은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안이한 신앙을 가지게 된다(40조). _144~145쪽

사실 루터는 면죄부 자체에 반대했다기보다는 신학에 어두운 대중이 면죄부에 의존해 믿음이 약해지는 현상을 경계했다. 면죄부에는 아무런 권능이 없다. 면죄부로 연옥에 가지 않는다고 생각해 신앙이 약해진 자는 죽어서 틀림없이 연옥에 떨어질 텐데, 그때 가서는 어떻게 이들을 도울 것인가? 아무리 지엄한 교황청의 요구라고 해도 루터는 사제의 양심상 대중에게 거짓을 설교할 수는 없었다.

루터의 이런 입장은 그가 성서를 고수하는 원칙론적인 사고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은 성서 위에 교황이 있는 형국이었고, 면죄부 판매는 부패하고 사치스럽던 교황청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연보의 궤 안에서 돈 소리가 나면 영혼이 연옥에서 뛰쳐나온다”라고 했던 면죄부 판매 문구는 오늘날에도 너무나 유명하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독일 교회의 돈을 거두어가고, 마인츠 대주교가 거두는 돈도 결국 교황청으로 들어가는 현상을 비난한 것이다. 돈이 연보의 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는 탐욕과 이득이 늘어날 뿐이고, 돈 소리가 나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뛰쳐나온다는 말은 사람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했다(27~28조). _145~146쪽

성서 번역, 만인사제주의 그리고 교황권을 향한 도전
당시 성서는 가톨릭 사제들만 읽을 수 있었고, 그것의 최종적인 해석 권한은 오로지 교황에게 있었다. 성서가 당시 지식인들의 언어인 라틴어로만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루터가 아무리 성서에 근거해 설교한다고 해도 대중이 성서에 접근하지 못하는 한 종교개혁은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루터는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게 성서를 모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방대한 성서의 내용을 불과 11주 만에 번역해냈다.

무엇보다 성서를 당대의 독일어로 번역해 교역자는 물론이고 평신도도 누구나 쉽게 읽도록 한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앞날을 밝게 해주는 것이었다. _305쪽

루터는 16세기의 독일어로 성서를 완역해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성서를 읽게 되었고, 그에 따라 여러 이견도 생겨났다. 루터의 성서 번역은 훗날 많은 기독교 종파가 출현하는 배경이 되었다. _306쪽

성서의 번역과 함께 루터가 중시한 것은 이미 특권계급이 된 사제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가톨릭의 성직자 계급제도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령 평신도라도 종교 의식에서 사제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보았다. 루터의 이런 주장은 신자는 누구나 신 앞에서 사제가 된다는 이른바 만인사제주의가 바탕이 된 것이다. 그리고 만인사제주의는 필연적으로 사제 계급의 정점에 있는 교황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졌다. 루터는 교황만이 성서의 최종 해석권자라는 생각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교황청은 분노했고 루터와 가톨릭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며 종교개혁은 시대의 대세가 되었다.

두 번째 성벽은 교황이 최종의 오류 없는 성서 해석자라는 주장이다. 루터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교황이 어떻게 성령의 손과 발이 되겠느냐며 공격했다. 인간 교황이 오류에서 면제될 수 있는가? 오류가 없는 분은 오직 신뿐인데 성서의 어느 구절에 교황이 신과 동등하다고 했는가? 고어(古語)를 배우고 역사와 고고학을 통해 성서를 연구한 사람은 탐욕에 눈이 먼 교황보다 성서를 해석하는 데 한발 앞서 있다. _237쪽

종교개혁의 조력자들
종교개혁에서 루터의 기여를 빼놓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종교개혁이 오로지 루터만의 업적은 아니다. 이 책은 루터의 전기이지만 그의 주변 인물들 역시 자세히 언급된다. 루터의 정치적 후원자 프리드리히 선제후, 루터의 동역자 필리프 멜란히톤, 루터의 스승 요한 폰 슈타우피츠, 그 밖에 루터가 재직했던 비텐베르크 대학의 동료와 제자들이 그렇다. 책에서는 종교개혁의 각 국면마다 이들이 각각 어떤 역할을 맡았고 어떻게 루터를 도왔는지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종교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