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이불요의 지도자 : 성재 이시영 선생 평전

광이불요의 지도자 : 성재 이시영 선생 평전

$18.65
Description
빛나되 번쩍이지 않았던 지도자,
성재 이시영 선생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정부에서 요직을 맡은 유일한 인물로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성재 이시영 선생의 활동을 소상히 기록한 평전이 새로 나왔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냈고,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평전을 여러 권 집필한 김삼웅 전 ≪대한매일신보≫ 주필의 역작이다.
평전은 이시영 선생의 소년 시절부터 시작하여 대한제국 시기의 관직 생활,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6형제와 그 가족들이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온갖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한 이야기, 고종을 중국에 망명하도록 하여 독립투쟁을 하려고 계획했던 일, 임시정부의 법무총장과 재무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살림을 책임졌던 일, 해방 후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노선을 달리하면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한 일, 대한민국 정부의 부통령으로서 이승만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독선과 부패에 맞서 싸우다 결국 부통령직을 사임한 일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이시영 선생은 대한제국의 문명개화, 임시정부의 독립 투쟁, 대한민국 정부에서의 민주주의에 큰 기여를 하였는바, 각 시대마다 가장 필요한 일을 맡아서 한 것이다.
책에는 30여 장의 소중한 사진도 함께 실었다.
저자

김삼웅

저자:김삼웅

≪대한매일신보≫주필을거쳐성균관대학교에서정치문화론을가르쳤으며독립기념관장을지냈다.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위원,제주4·3희생자진상규명및명예회복위원회위원,백범학술원운영위원등을역임하고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위원(국회추천),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자문위원,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부위원장등을맡아바른역사찾기에부단히노력하고있다.저서와편서로는『친일정치100년사』,『한국민주사상의탐구』,『해방후양민학살사』,『금서』,『한국필화사』,『곡필로본해방50년』,『한국현대사바로잡기』,『겨레유산이야기』,『보는사람없어도달은거기있는가』,『왜곡과진실의역사』,『일제는조선을얼마나망쳤을까』,『위서』,『白凡金九全集』(12권,공편),『박은식,양기탁전집』(10권,공편),『단재신채호전집』(9권,공편),『을사늑약1905:그끝나지않은백년』,『박열평전』,『백범김구평전』,『단재신채호평전』,『만해한용운평전』,『심산김창숙평전』,『녹두전봉준평전』,『약산김원봉평전』,『안중근평전』,『장준하평전』등이있다.

목차

추천의글/종손(從孫)이종찬
첫머리에
서문:성재이시영은누구인가

제1장출생가문과성장기
제2장급변하는내외정세속에서
제3장신민회참여,망국겪으며
제4장6형제함께망명,삼원보에터잡아
제5장신흥무관학교창설하고운영
제6장베이징에서의활동
제7장대한민국임시정부참여
제8장임시정부떠났다가다시참여
제9장중국인의한국사왜곡에<감시만어>집필
제10장임시정부의이동시대
제11장일제패망과환국전후
제12장대한민국정부수립에참여
제13장민족사의불행과비극앞에서
제14장서거와국민장그리고추모사업

성재이시영선생연보

출판사 서평

노블레스오블리주의모범

우리나라최고명문가의하나로서삼한갑족이라는명성을얻었던이시영선생의6형제는대한제국이일제에의해강제병탄되자모든재산을처분하여40여명의일가족이만주로망명하였다.나라의은덕을가장많이받은자신들이망국의불행앞에서모든것을바쳐독립운동에헌신하기위한것이었다.이렇게홀연히떠난6형제중살아서고국땅을다시밟은사람은이시영선생뿐이다.나머지다섯형제는이역중국땅에서굶어죽고병들어죽고일제경찰에고문당해죽었다.
이시영의형인이회영선생은형제들과중국으로의망명계획을의논하면서다음과같이말했다.

세상사람들은우리가족에대하여말하기를대한공신의후예라하며,국은(國恩)과세덕(勢德)이당대의으뜸이라한다.그러므로우리형제는나라와더불어안락과근심을같이할위치에있다.지금한일합병의괴변으로인하여한반도의산하가왜적의것이되고말았다.우리형제가당당한호족의명문으로서차라리대의가있는곳에죽을지언정,왜적치하에서노예가되어생명을구차히도모한다면이는어찌짐승과다르겠는가?(……)만일뒷날에행운이있어왜적을부숴멸망시키고조국을다시찾으면,이것이대한민족된신분이요,또왜적과혈투하시던백사공白沙公(이항복)의후손된도리라고생각한다.여러형님아우님들은나의뜻을따라주기를바라노라.

이회영선생의이같은말에형제들은아무이의없이뜻을같이하여일가족전체가중국망명길에오른것이다.이시영선생은남대문을나서면서이렇게다짐했다고한다.

내가이문으로다시돌아올날이없다면자손이라도들어올날은있을것이다.내가이문을나선시간으로부터별별고초와역경을당하더라도원천우인(怨天尤人;하늘을원망하고사람을탓함)은아니하리라.

이다짐과같이이시영선생은만35년간모든어려움을이기고독립운동외길을걷다가조국이일제로부터해방된후76세의노구를이끌고귀국하였다.가히노블레스오블리주의모범이라할만하다.

신흥무관학교

이시영형제가당시돈으로황소1만3000마리값인40만원,지금의화폐가치로보면600억원가량의돈을가지고중국에망명하였기때문에적어도처음10년정도는경제적여유가있었을것으로짐작하는사람이많을것이다.그런데실상을보면망명후불과2,3년후에자금이다떨어져서그때부터해방될때까지경제적으로심한어려움을겪었다고한다.모든재산을아낌없이독립운동가양성에바쳤기때문이다.그러한어려움속에서도신흥무관학교는10여년동안3500명가량의졸업생을배출하였고,신흥무관학교의교관과졸업생들은후일항일독립투쟁과정에서더할수없이소중한역할을하였다.예컨대청산리대첩의주역인지청천,이범석등이신흥무관학교의교관출신이다.신흥무관학교출신들은1940년중국충칭에서임시정부의국군으로조직된항일무장부대광복군의창설에도핵심적역할을했다.지청천,김학규,김원봉,이범석,권준,신동열,오광선등이그들이다.광복군총사령지청천,참모장이범석,제1지대장김원봉,제3지대장김학규등은모두신흥무관학교간부들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이시영은대한민국임시정부의초대법무총장과의정원의원을역임한이래잠시임시정부를떠나있던기간을제외하면시종일관임시정부를지켰다.그러면서도주석이나의정원의장등수장직을사양하고,의원과국무위원을맡는데그쳤다.그야말로광이불요의자세를견지한것이다.이시영선생은임시헌장기초위원으로서“대한민국은민주공화제”라고명시한헌장,이로써대한민국의국호가탄생하게된헌장의제정에중요한역할을하였다.
이시영선생은임시정부의살림을책임진재무총장직에오랜기간있었음에도극심한가난상태를벗어나지못했다.항상공명정대하게일처리를했기때문이다.

대일선전포고

임시정부는1941년12월10일,주석김구와외무부장조소앙의명의로일본에선전포고를하였다.임시정부는일본이중일전쟁을일으켜중국을본격적으로침략한1937년부터전에없이활기를띠었다.이제본격적으로중국과힘을합쳐일본과싸울수있는여건이마련되었기때문이다.그리고임시정부인사들은이싸움에서일본이패망할것이라는확신을가지고있었다.이때문에독립운동진영의오랜분열을극복하고힘을합칠수있었다.같은시기에국내의많은인사들이친일로돌아선것과극명하게대비되는일이다.왜이런결과가빚어졌을까?물론중일전쟁이후일제가본격적으로침략전쟁을벌이면서압박과회유가극심해졌기때문이기도하지만,국내인사들이국제정세에어두워상황을오판한데도큰이유가있었다.중일전쟁초기일본이중국을휩쓸고,진주만공습이후에는미국과영국등을상대로도승승장구하는것을보고우리나라가가까운시일내에해방될가망성이없다고잘못판단한것도많은국내인사들이친일로돌아서는이유가되었다는것이다.어려운시기에상황판단을정확히하는것이얼마나중요한지를극명하게보여주는사례이다.

단독정부참여와민주주의를위한투쟁

이시영선생은해방후임시정부주석백범김구선생과노선을달리하여남한만의단독정부에참여하였다.통일정부수립이요원한상황에서우선남한만이라도민주정부를세우는것이현실적인방향이라고생각했기때문이다.그러나대한민국정부의초대부통령이된이시영선생은이승만의독주로인해제역할을하지못했다.그뿐아니라국민방위군사건,거창양민학살사건등이승만정부의부패와인권유린에항의하는뜻으로부통령직을사퇴하였다.그후비민주적인발췌개헌으로직선제의대통령선거가실시되자보수야당에서는대통령후보로나올인물이없었다.승산이전혀없는데다이승만대통령의보복이두려웠기때문이다.그리하여이시영이보수야당의대통령후보로출마하였으나예상대로낙선하였다.

모든한국인의사표

이시영선생은젊은시절부터스스로를돌보지않고고비고비마다꼭해야할일을한분이다.대한제국시절에는국권을빼앗기지않기위해치열하게노력하였고,일제에국권을빼앗긴다음에는그것을되찾기위한싸움에모든것을내던졌다.정부수립후에는민주주의를위한투쟁을멈추지않았으니그한평생을나라를위해헌신한셈이다.그런점에서이시영선생은모든한국인의사표(師表)가되실만한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