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르스나르에게 신화는 자유자재로 구사 가능한 일종의 모국어"
신화를 매개로 역사, 기억이 맞물려 순환한 유르스나르의 문학세계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Marguerite Yourcenar(1903~1987)는 프랑스의 유구한 문학 전통을 잇는 20세기 주요 작가로서, 프랑스 아카데미 프랑세즈L’Acadmie franc?aise 사상 최초의 여성 회원이기도 하다. 유르스나르에게 신화는 자유자재로 구사 가능한 일종의 모국어로서, 인류 기억의 샘이며 유르스나르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이끌어내는 기억의 실마리이자 수단이다. 그의 문학관은 역사, 신화, 기억이라는 세 가지 핵심 키워드가 순환하는 창조적 세계이다. 신화를 매개로, 다양한 시공간의 복수적複數的 의미의 역사가 인간의 원초적 기억을 환기시킨다. 이 세계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근원성에 닿아 있으며, 유르스나르가 평소 강조하는 ‘모든 것은 하나Tout est Un’라는 전일全一의 개념이 녹아 있다.
신화의 문학적 변용, 문학신화학의 지평을 열다
유르스나르의 문학신화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작가 한 사람이 이처럼 다채로운 신화 문학을 제시한 경우는 거의 없고, 신화의 단순한 차용이 아닌 문학적 전복과 변용, 로마네스크적 인물과 소설 공간의 신화화를 통해 반전과 창의성을 갖춘 유르스나르의 신화체계는 독창적이다. 인간의 정신과 행동에 잠재된 신화의 유기적 연결망을 은밀히 장치하여 인류 본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현대의 인문주의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회귀’의 신화학을 지향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인문주의로의 회귀를 지향하기에 유르스나르의 문학신화학은 다면성을 지닌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게 해주고, 보다 깊은 지성과 원초적 감성으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와 다른 타인과 공동체를 이해하도록 이끌어줄 수 있다.
유르스나르 문학신화학의 일곱 가지 특징
1. 미학적 신화학
유르스나르 문학세계는 여느 특정 신화의 통시적 변모과정에 기댄 신화학의 구축과 다르다. 신화 이야기들을 문학적으로 전복하거나 탈신화화하기도 하고, 로마네스크적 인물을 신화화하거나 소설 공간을 신화화하기도 하며, 반대로 신화적 인물들을 육화하여 현실의 세계로 끌어냄으로써, 유르스나르의 전全 작품들 안에서 여러 신화를 공시적으로 잇고 결합시켜 하나의 거대한 신화망網을 구축한다. 신화의 창의적인 재해석과 대부분의 작품들에 산재해 있는 신화적 요소들이 우연히 만나 이어지고, 그 신화적 연결망으로 인해 문학적 가치가 높아지는 상위 범주의 ‘미학적 신화학’을 형성한다.
2. 개인 신화학
일반적으로 신화학은 신화의 뿌리에서부터 오늘날까지의 변모과정을 찾아나가는 일련의 고찰이지만, 유르스나르에게 신화는 자기 정체성의 뿌리나 정서affectivit적 근원을 찾아나가는 ‘개인 신화학’의 성격을 띤다. 자신의 열정, 기억과 상처를 신화에 기대어 표현함으로써 미학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3. 사회학적 신화학
사회문화적 맥락 안에 신화가 내포할지도 모르는 진실을 이성을 통해 추출하려는 과학적 차원의 신화학과 달리, 유르스나르는 다양한 사회·문화·사상적 의미와 인문학적 개념들이 도출되는 논리적 장치가 마련되도록 작품마다 신화적 요소들을 심어놓는다. 유르스나르는 신화의 현재성에 관심이 크다. 신화가 동시대의 사회, 사상, 심리, 문화 현상과 인간의 제 문제와 진실을 밝혀주는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신화라는 보편적 언어를 활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신화 자체의 내적 기능에 천착하기보다는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인간 존엄 가치관의 위기와 같은 문제를 신화의 층위에서 공론화하기 위한 ‘사회학적 신화학’의 성격을 띤다.
4. 상호 텍스트성의 신화학
일반 작가들과 달리 유르스나르는 고대 신화로부터 고전 신화 그리고 현대 신화에 이르기까지 원형신화와 차별화되는 신화 이설들의 변용과 그 개별 가치를 익히 알고 밝힐 줄 아는 작가이다. 작품들뿐만 아니라 서문, 후기, 부록으로 붙은 자료들, 대담집을 통해서도, 신화 다시 쓰기에 대한 해설과 논평을 멈추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이설로 이루어진 신화학이라는 전체성 안에서 자신의 신화문학이 차지하는 좌표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유르스나르의 신화 작품들은 고유의 독창성을 지닌 하나의 기원이자 동시에 다른 텍스트들과의 영향관계에 있는 ‘상호텍스트성의 신화학’에 속한다.
5. 원심적 문학신화학
유르스나르의 신화 작품은 한두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장편소설, 단편소설, 시, 희곡, 에세이 등 거의 전全 장르에서 신화의 침윤성을 드러낸다. 또한 장르를 불문하고, 유사하거나 상반되는 주제의 신화가 서로 이어지고 한 짝이 되어 만나기도 한다. 『불꽃』, 『연극 2』, 『동양이야기들』의 경우가 종종 그렇다. 신화들이 서로 연결고리를 갖고서 여러 장르를 순환하므로 이른바 ‘원심적 문학신화학’이라고 하겠다.
6. 동서 통합의 신화학
그리스 신화와 사상에 정통한 유르스나르의 작품세계는 서구의 그리스·로마 신화와 성서 신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동양이야기들』에서 볼 수 있듯이, 오리엔탈 그리스, 발칸, 인도, 중국의 신화까지 넓게 확장되어 있다. 유르스나르는 지중해 문화권 중심의 신화학에서 벗어나 오리엔트 신화와의 균형을 모색하는 새로운 헬레니스트로서, ‘동·서 통합의 신화학’을 제시한다.
7. 인본 회귀의 인문주의 신화학
유르스나르가 신화를 다루는 특징적 태도는 선험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유르스나르가 취사선택한 신화적 인물들의 이야기는 인간 본연의 성스러움과 미덕을 회복하기 위한 가치 판단에서 비롯된다. 이는 신화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여느 신화학자와 달리 ‘판단’의 가치를 띠고 있음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유르스나르가 시도하는 신화의 문학적 변용은 유럽적 인간의 이해에만 국한되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간 본질에 대한 보편적 이해와 인문주의의 현대적 복원을 지향하기에, ‘인본 회귀의 신화학’이라고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유르스나르의 ‘문학신화학’은 보편적·초월적·해방적 신화문학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부각시키는 ‘인문주의적 신화학’을 지향한다.
작품으로 보는 유르스나르의 문학신화학과 역사적 변용
제1장_ 『불꽃』, 『연극 2』에 드러난 신화적 인물들의 탈신화화와 회귀
제1장은 신화의 직접 차용이 두드러진 유르스나르 산문시 『불꽃』과 희곡집 『연극 2』에 관한 연구를 담았다. 여기에는 클리타임네스트라, 파이드라, 아킬레우스, 파트로클로스, 엘렉트라, 알케스티스, 아리아드네와 같은 그리스 신화의 유명 인물들과 성서 신화에서 차용한 마리아 막달레나가 등장한다. 유르스나르는 장르의 형태와 문체의 차별화 그리고 인물 내면에 초점을 맞추는 의도적 문학 변용을 통해 이들을 탈신화화하였다. ‘불가능의 열정과 상처’, ‘불의의 복수와 정화’, ‘죽음의 극복과 자기실현’이라는 내적 감성과 내면 성찰의 주제를 중심으로, 신화적 인물들의 변용과 그 현대적 의미를 해석하였다. 하지만 유르스나르 개인 신화의 성격을 띠면서도 동시대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자화상으로 확장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내적 진실을 다루고, 인간의 원초적이고 무한한 존재 가치의 회복을 이끌어내며 보편적 신화세계 안으로 자연스럽게 회귀한다.
제2장_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흑의 단계』, 『은자』, 『안나, 소로르…』에서 볼 수 있는 로마네스크 인물들의 신화화와 영원성
제2장에서는 로마네스크 인물들이 각자 고유의 본질적 신화소mythme를 갖고서 작품의 주제를 비추거나 행위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음을 살펴본다. 연금술 신화를 정신적 차원의 연금술로 이해하는 유르스나르의 관점은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흑의 단계』, 『은자』의 역사적 또는 허구적 주인공들인 제농과 하드리아누스, 나타나엘의 일생에 이 연금술 신화의 상징적 단계들을 연결시켜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소설 『안나, 소로르…』의 주인공 안나와 미겔의 근친사랑은 한 몸을 이루는 자웅동체 신화와 닮아 있고, 고대 그리스 철학과 성서 신화가 환기하는 작품 배경은 이들이 파괴한 금기의 죄악을 성스럽고 몽환적으로 만들어준다. 원초적 시대의 감성과 자유에 닿아 있는 인간의 진실한 사랑과 인고의 노력이 종교적 금기나 사회적 금기를 넘어선다는 화해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아울러 역사소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안티노우스를 향한 열정은 제우스의 파이도필리아 신화를 연상시키고, 안티노우스의 죽음으로 인한 비극적 파이도필리아가 인간 황제의 헌신적 사랑으로 새로이 양성동체 신화로 전이되는 일련의 신화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제3장_ 『동양이야기들』에 내재된 서구 문예 정신의 진원지로서의 오리엔트 신화
제3장에서는 오리엔트 신화들을 모아 각색한 단편 신화집 『동양이야기들』을 집중적으로 다룬바, 이 책에서는 단편을 두 편씩 짝지어 ‘예술과 현실’, ‘사랑과 진실’, ‘위반과 경이’, ‘죽음과 구원’, ‘욕망 또는 죽음’을 주제로 작품 내용을 분석하고 유르스나르의 의도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바로 유럽의 끝자락에서 아시아로 향하는 두 개의 문門인 그리스와 발칸반도가 형성하는 문화적 혼종성에 관한 것이다. 유럽의 상상력에 자리한 신화의 힘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의 접합지점과 그 인접 지역으로 확장되어 나아가고 그로 인한 영향을 받았다는 작가의 생각을 입증하는 작품인 것이다. 오리엔트와 옥시덴트의 정치적·이념적·지리적 경계를 넘어서는 유르스나르의 관점은 새로운 헬레니즘을 제시해 준다. 이야기의 힘으로 동서양을 구분 짓는 허상의 경계들을 무너뜨리고, 문화적 차이를 넘어 인간의 본질을 관통하는 소통의 길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제4장_ 『몽상과 운명』에 나타난 꿈과 현실 사이에서 탄생하는 개인 신화
제4장은 꿈과 현실의 엉킴 속에서 만들어지는 유르스나르 개인의 몽상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