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교육에서 청나라의 미래를 찾다  - 중국근현대사학회 연구총서 8 (양장)

장지동, 교육에서 청나라의 미래를 찾다 - 중국근현대사학회 연구총서 8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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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진보와 보수의 경계’에서
국가의 장래를 고민한 지식인

그가 고민한 근대 중국의 길 속에서
교육의 힘을 진단한다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인 장지동(張之洞)은 근대 중국의 나아갈 길을 고민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청조를 옹호하면서 옛 문화를 존숭하고 새로운 것을 점진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의 근대 개혁을 추구하였다. 특히 중국이 위기를 타개하고 나아갈 길을 교육에서 찾아 근대 중국의 학제를 정비했는데, 그가 쓴 『권학편(勸學篇)』 (1898)은 그의 사상이나 실천뿐 아니라 중국의 근대 교육제도의 확대, 인재 양성 방향 등을 이해하는 중요 사료가 된다.
중국 근대 교육제도를 연구해 온 편역자 이병인은 이 책을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장지동과 『권학편』, 계묘학제의 학무강요(學務綱要) 등 그의 교육관 등의 사상을 정리하였다. 제2부는 『권학편』을 번역하고 역주를 달아 구성했으며, 제3부는 『주정학당장정(奏定學堂章程)』(1904년의 계묘학제) 가운데 교육 개혁의 핵심을 담은 학무강요를 번역하고 역주를 달았다. 이 세 부분을 통해 장지동의 구상, 실천, 그 후의 역사적 전개와 현재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저자

장지동

(張之洞,1837∼1909)
청나라말기의관료.직예성(直隷省)남피(南皮)출신으로,27세에진사과에합격하여한림원편수로임명되었다.산서순무,양광(광동과광서)총독,호광(호북과호남)총독등의직책을역임했다.총독재임시절에신식군대를육성하고,방적및제사공장,제철소등을만들었다.근대학교설립과학제제정,교육행정제도의설립에큰역할을하여중국근대교육제도의근간을마련했다.1907년대학사와군기대신에임명되어,현재교육부에해당하는학부의관리사무를맡았다.1909년사망했으며,시호는문양(文襄)이다.

목차

중국근현대사학회연구총서간행사
책을엮으며

제1부장지동과교육개혁_이병인
제1장장지동의구상과그유산
제2장『권학편』의국가중건구상과문화전환
제3장장지동과계묘학제

제2부『권학편(勸學篇)』_장지동
서문

권학편상,내편
제1장단합된마음/同心
제2장충성심교육/敎忠
제3장윤리확립/明綱
제4장정체성인식/知類
제5장판단의기준,경전/宗經
제6장국가권력확립/正權
제7장배움의순서/順序
제8장학문의핵심학습법/守約
제9장아편근절/去毒

권학편하,외편
제1장지혜증진/益智
제2장유학/游學
제3장학당설립/設學
제4장학제/學制
제5장번역진흥/廣譯
제6장신문열람/閱報
제7장제도개혁/變法
제8장과거제도개혁/變科擧
제9장농학,공학,상학/農工商學
제10장군사학/兵學
제11장광업학/鑛學
제12장철도/鐵路
제13장회통/會通
제14장군축론비판/非兵
제15장종교적관용/非攻敎

제3부계묘학제(癸卯學制)의학무강요(學務綱要)_장백희장지동영경

편역을마무리하며
참고자료1『권학편』에서인용한서적소개
참고자료2『권학편』에서언급한인물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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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위기를몰랐기에맞이한근대중국의위기,
장지동의진단

근대사회로변화하면서,중국은왜서양열강에뒤처지고,중국의학문은위기에대응하지못해새로운학문을받아들여야하는상황에까지이른것일까.장지동은중국이여러왕조를거치며하나로통합된이후주변에중국을능가할만한경쟁상대가없으니,문사치장만을중시하여실력이없어진때문이라고생각했다.중국은지식의개발이나개혁을하지않고옛법을그대로지키며간혹수정하고정돈해도위기없이안심하고유지할수있었으니학문이점차쇠퇴했다.그리고아는것이없으니할일이없으며,하찮고시시하게일을처리하여졸렬하고쓸모없는것을만들게되었다.중국이인재가넘쳐나던때는춘추전국시대와삼국시대같이경쟁이상존하던때였다.경쟁이인재를키우고지식을개발하는원천인데,대일통(大一統)을이룬이후주변에경쟁할만한국가가없던중국은안일하게대처하며지식을개발하지않았다고장지동은주장했다.

중국의위기를극복하는것은
교육받은인재의힘

그는군중의힘을신뢰하기보다는국가만이이해갈등을통제하고공적인이익을지킬수있다고생각했으며,군중의이익다툼과이기적활동을막을대안을국가에대한신뢰로연결시켰다.또한국가가국난을극복하는핵심은인재의유무라고파악했고,사대부가국가개혁의중심에설것을요구했다.사대부가사적이익을넘어국가의공익을추구하는개혁을담당할적임자였다.
장지동은중국학문이라는문화적가치를강조했고,이외에도신문,철도등을통해중국인의국민의식강화를추구했다.그가강조한신문열람은견문을넓히고기개를양성하며불명확한논설을없애식견이좁은선비,들판의농부모두가중국에관한소식을보며중국이있음을알게하는것이었다.

장지동의계묘학제,
중국근대교육체계를56개조문으로만나다

1904년,장지동은1902년의학제를수정하여새로운학제를만들었다.이를만들때영경,장백희두명의관학대신과상의했다고하나,실상은장지동혼자주도한것이었다.이것이속칭계묘학제로서,1904년1월13일발표하고청말까지사용했다.계묘학제는22개의장정으로구체화되어있었고,‘학무강요’도그중하나로서총56개의조문으로구성되었다.
계묘학제는사립학교에대한엄격한통제,여성교육에대한언급이없으며,초등에서대학까지의교육기간이너무긴등여러문제가있었다.그러나청말까지실제운영된학제이자학교체계와행정의분리,사범교육과실업교육의중시등중국교육제도의근간을만들기시작했다는점에서의미가있었다.이를살펴봄으로써장지동이주장한중국근대교육제도의구체적인실내용을파악할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