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길어 올리기 (이경재 산문집)

시간 길어 올리기 (이경재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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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오래 글을 훈련한 사람 특유의 정밀함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화법”
“이도 저도 싫증이 날 때쯤 나는 ‘시간 길어 올리기’를 시작했다. 큰 가오리연 줄처럼 두레박줄을 길고 길게 엮어 시간의 우물, 저 밑바닥까지 늘어뜨려 옛날을 길어 올렸다.
신났고, 아프지만 팔딱팔딱했고, 기쁜 나의, 슬픈 우리 젊은 날의 시간들이 두레박을 타고 올라왔다. 열정과 분노, 용기와 좌절, 욕망, 번뇌, 이런저런 것들이 내 젊은 날의 앞자리에서 심하게 뒤엉켰었지.
그러나 조금 더 곱씹어 보면, 열정은 분노와 한 몸이 되었고, 욕망과 좌절은 서로 얽혔다. 애환은 낭만과 두루뭉술됐고 모든 것들은 이리저리 섞여 버렸다. 어느 순간 그 얽힘과 설킴은 하나로 뭉뚱그려졌다.
두레박 안에는 결국 ‘그리움’이란 추상만 남아 있었다.”
저자

이경재

문학을사랑하는언론인출신전문경영인.1947년서울에서태어났으며고려대학교언론대학원에서석사학위를받았다.대한일보및동아일보에서기자생활을하다가1975년한화그룹에입사했다.한화그룹홍보실장,(주)한컴대표이사,(주)한화이글스대표이사를역임했으며현재학교법인북일학원이사장을맡고있다.
문청시절소설가를꿈꾸며닥치는대로책을읽었고여전히독서를게을리하지않는저자는,틈틈이인상적인에피소드와단상을적어왔다.그리고이번에그편린들을모아생애처음책을펴내게되었다.
기자시절훈련된세상을바라보는객관적시각,기업경영을통해체득한치밀함과통찰력,그리고문학적감수성이빚어낸그의글은마치미끈한금강송의나이테를들여다보는듯사색적이면서도따뜻한삶의윤기를자아낸다.

이경재
주변에이런사람들이제법있다.
자기일을열심히하면서도두루사유한다.책을가까이두고전시회와음악회를챙기며‘문화의힘’을기른다.개성있거나털털하거나영악한,이런저런사람들을두루만난다.타산他山을보며편견,극단,독선에빠지지않는연습을한다.숨어있던따뜻함을그예찾아낸다.냉철함과순한것에천착한다.그러다보면나이만큼의지혜가선물이되고넉넉한품새는덤이된다.저자는늘이언저리쯤에있기를바란다.
젊은시절부터버릇이된취재와메모에,글쓰기의꿈을버리지않게하는생래적본능에,길어올려진시간들이버무려져그만의감성적글이이책에서살아났다.유머나위트는연륜이주는여유에서나오는것이리라.

1947년서울에서태어났다.
한화그룹에오래몸담아왔다.
한화솔루션고문,학교법인북일학원이사장으로재직중이다.

목차

01호모사피엔스인간사람
02그곳,그설핏한기억들을위하여
03시간길어올리기
04물마시고,낯씻고,숨쉬며

출판사 서평

이경재산문집


“이도저도싫증이날때쯤나는‘시간길어올리기’를시작했다.큰가오리연줄처럼두레박줄을길고길게엮어시간의우물,저밑바닥까지늘어뜨려옛날을길어올렸다.
신났고,아프지만팔딱팔딱했고,기쁜나의,슬픈우리젊은날의시간들이두레박을타고올라왔다.열정과분노,용기와좌절,욕망,번뇌,이런저런것들이내젊은날의앞자리에서심하게뒤엉켰었지.
그러나조금더곱씹어보면,열정은분노와한몸이되었고,욕망과좌절은서로얽혔다.애환은낭만과두루뭉술됐고모든것들은이리저리섞여버렸다.어느순간그얽힘과설킴은하나로뭉뚱그려졌다.
두레박안에는결국‘그리움’이란추상만남아있었다.”
-본문중에서-


현장감이살아있는한호흡의문장

기자출신다운성실한취재와메모를바탕으로촘촘하게엮은문장은독자를그시간그장소로초대한다.그가추구하는‘사실’의힘은저자특유의서정과맞물리며더욱힘을발한다.시의운율과도같은리드미컬한문장과현장감이만나글맛을더한다.
“내가가본곳,들은것,맛본것,부딪치고느끼고,읽은것만으로된일인칭의글이얼기설기꿰어졌습니다.”
그저보고듣고겪은것을적었을뿐이라고,이를얼기설기꿰었을뿐이라고겸양하지만촘촘하게엮은문장에는허튼틈이보이지않는다.특히문화계의숨은이야기를보고寶庫를열듯열어보이는이런장면,

“조장관이‘사발’이라면안선생은‘종지’같다.
말소리는조근조근,얼굴은생글생글,발걸음은사뿐사뿐,
툭치면넘어갈듯.”(110쪽)

“그가떡하니모양새를갖추고북앞에앉으니
천생고수였다.〈흥보가〉한자락이쩌렁쩌렁,
북재비하석의손끝에서둥둥딱둥신명나게어우러졌다.
국창과주거니받거니추임새도걸쭉했다.
역시일고수이명창一鼓手二名唱이요!
열기가후끈달아올랐다.
연신땀을훔치며보는이들의어깨도들먹였다.”(65쪽)

이런글쓰기는눅진한문장에어떻게하면차짐과생동감을더하는지본능적으로아는자가일필휘지로쓱그은것이다.더함과보탬없이나눔과뺌만으로이루는서가書家의장인같은울림을준다.이것이아마도작가로서의삶을시작하게된원동력이자소양일것이다.

경쾌한유머와위트,그리고문화력

진중함속에는또경쾌한이야깃거리가있다.동독출신권투선수헨리마르케와의인연을회상하는「타임투세이굿바이」나반출이엄격이금지된캐비아를옛소련군장교로부터얻는과정을유머스럽게묘사한「캐비아연정」,누드족들이활보하는영국정원으로일행을이끌고‘신사유람(?)’했던일화를담은이야기등은글을읽은즐거움이란무엇인지,즐거운글을읽은재미란또무엇인지새삼일깨운다.
특히2006년도하아시안게임때음주가엄격히금지된이슬람국가에‘일용할알코올’을공수하는「먹다,마시다」편은마치첩보영화의한장면처럼스릴넘치고,그결말은유쾌하기그지없다.독자를그‘사건(?)’의공범으로만드는필력과위트가즐겁다.어린시절을추억하는이야기나노숙자를바라보는마음,젊은시절야학에서만난아이들을향한눈동자에는또그만큼의따뜻함이배어있기도하다.순수한소년의마음이아니면,그순수를유지하고있지않으면길어올릴수없는문장들이다.
문장의경쾌함뒤에는또자신이보고듣고만나고느낀숱한문화계사건과인물들이있다.문학·미술·음악·서예·투각등분야를가리지않는예술과문화에대한전방위적인관심,또그만큼의폭과깊이를지닌저자의밝은눈[明眼]은일반사람이미처보지못하는것들을좇는다.그가찾아낸우리문화사의여러장면에는직접체험한사람만이표출할수있는명백明白과명료明瞭함이녹아있다.

인생의내면을들여다보는촘촘한언어

“사람은세상의많은것들을빌리지않고홀로서기가쉽지않다.빌리지않고는살아갈수없는동물이다.어머니의자궁을빌려태어난다.그리고지혜도지식도다른이들이일구어놓은것을빌려자기의것을만들면서발전해가고있다.역사는큰텍스트가된다.”(189쪽)

이어령은자궁을뜻하는‘womb’과무덤을뜻하는‘tomb’의형태적유사성에주목하며인간은태어나는것이곧죽는것이라고설명했다.저자역시시간을우물의깊이로파악하며이안에서삶을길어올린다.이긷는행위는‘빌림[借]’이라는또다른관찰로이어진다.바깥의경치를안으로끌어들이는것,경치를빌리는‘차경’보다몇배더큰‘빌림’에기대는것은아마도사람일것이라는관조는울림이크다.저자의다음과같은말은이런관조의힘을잘보여준다.

“시간의우물에두레박을내렸습니다.뽐내고설레고거침없고벅차고수줍고휘날리던때의단물,후회되고가슴저리고부끄럽고아팠던센물,어느새섞였는지단물곤물이되었습니다.길어올린물은…,맹물이었습니다.”(저자의말중에서)

젊은패기로살았던시대,치열했던삶이연륜의깊은지혜로이어지면또하나의‘우물’이된다.때로는외딴곳에핀들꽃처럼,때로는거친사막에홀로선나무처럼굳건하게버틴뿌리에는인생의굽이굽이를처연하게헤쳐나온작가가촘촘히쌓아올린지혜의샘이흐른다.저자의글들은어느한순간에이루어진것이아닌,오랜세월쌓아올린인생장인으로서의결실이다.
그의시선은다시우리사회가직면한여러현상에대한관찰로이어지기도하고,더불어살아가고있는이웃에대한관심으로확장되기도한다.관계라는큰고리속에서발견하는생활의기쁨,사람과의만남에서얻는보람,작고낮은것들에서찾는크고높은희망들을이야기하는저자에게는깊은우물이있다.이우물에두레박을하나내려차분히길어올리는삶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