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앙정보 분석관의 삶 1 (편조백방, 투시백년의 기세로)

한 중앙정보 분석관의 삶 1 (편조백방, 투시백년의 기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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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전쟁을 억제하는 길은 전쟁을 준비할 때만이 가능하며,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본서는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최고의 북한 전문가,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 회고록이다. 국가 중앙정보기관에 근무했던 요원들 사이에는 묵시적 준칙 같은 것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근무시 인지한 기밀은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 중앙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KCIA)」에서 16년간 근무한 제1세대 정보분석관이였던 필자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두 가지 이유를 가지고 이 묵시적 준칙의 일부를 파기하기로 했다. 그 하나는 후대 집권세력들이 앞을 다투듯 주창한 「중앙정보부」와 그 근무자에 대한 비난과 매도에 답하기 위함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필자의 경험을 통해 직업적, 프로급 공작원과 정보분석관의 양성과 성장에 도움을 주고, 나아가 이들의 역할이 국가안보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리기 위함이다.
본서는 시기별로 2권으로 나눠져 있으며, 1권에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의 일들이 담겨있고, 2권에는 1980년대부터 2000년 이후까지 일들이 담겨있다. 끝으로 회고록을 마치며 후대 중앙정보 분석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적으며 마무리했다.
저자

강인덕

1.인적사항
성명:강인덕(康仁德)
출생:1932년평양

2.학력
1945.04-1950.09평양제1고급중학교졸업
1954.03-1958.02한국외국어대학교학사
1966.03-1968.02한국외국어대학교대학원정치학석사
1973.03-1977.02경희대학교대학원정치학박사
-논문제목,“통일전선연구:북한의대남전략과통일전선”

3.주요경력
1963.07-1965.01중앙정보부해외정보국중소과장
1965.01-1970.12동해외정보국북한과장
1971.01-1975.07동해외정보국장,북한국장겸남북대회사무국장,남북조절위원회위원
1975.07-1977.01동심리전국장
1977.01-1978.05동북한국장
1979.01-1998.03재단법인극동문제연구소이사장・소장
1998.03-1999.03통일부장관
1999.06-2013.03일본세이가쿠인(聖學院)대학초빙교수
2013.03-현재경남대학교극동문제연구소석좌교수

4.주요포상관계
1970.03.13홍조근정훈장(대한민국정부)
1976.06.10보국훈장천수장(대한민국정부)
1988.02.11국민훈장모란장(대한민국정부)
1992.05.165・16민족상[안보부문](5・16민족상재단)
2002.06.15청조근정훈장(대한민국정부)

5.주요저술
ㆍ2017.「朝鮮半島地政學クライシス」.日本經濟新聞出版社(編著)
ㆍ2016.「解剖北朝鮮リスク」.日本經濟新聞出版社(編著)
ㆍ2004.「남북회담:7.4에서6.15까지」.극동문제연구소.
ㆍ2004.「北朝鮮問題をどう解くか-東アジアの平和と民主主義のために」.聖學院大學出版會.(小田川興共編)
ㆍ2001.“和解と協力科程入った南北關係: 南北首腦會談の成果と今後の展望,”「轉換期の東アジア」.御茶の水書房
ㆍ2000.“金大中大統領の「太陽政策」と韓國の立場,”「朝鮮半島:南北統一と日本の選擇」.日本評論社.
ㆍ1992.「언어・정치・이데올로기」.을유문화사.
ㆍ1988.「개혁과개방:중국주요논문선집」.극동문제연구소.
ㆍ1988.「페레스트로이카:소련주요논문선집」.극동문제연구소.
ㆍ1987.「이념교육지도전서」.극동문제연구소.
ㆍ1985.「원전공산주의대계:상・하」.극동문제연구소.
ㆍ1984.「공산주의비판」.극동문제연구소.
ㆍ1983.「공산주의사전」.극동문제연구소
ㆍ1981.「알기쉬운공산주의」.극동문제연구소.
ㆍ1978.「공산주의와통일전선」.극동문제연구소.
ㆍ1974.「북한전서:상・중・하」.극동문제연구소.
ㆍ1972.「공산권총람」.극동문제연구소.
ㆍ1970.「국민승공사상대계」.신현실사.
ㆍ기타단행본및국내외강연,세미나발표,논문,칼럼,기고문등다수

목차

출판에즈음하여

제1부1950년대실향(失鄕)・고행속에평생갈길을찾다
8・15해방의기쁨:곧이어닥친이산(離散)의아픔
평양제1고급중학교시절그리고월남
학도의용대입대:정훈요원으로
동두천101예비사단에서의병영생활
「위문편지」로맺어진천생배필
한국외국어대학노어과입학
금기된「공산권연구」의행운을잡다
해병장교임관

제2부1960년대풋내기중앙정보분석관:뼈저리게느낀책임감
4・19혁명:군인이아니었다면나도그곳에있었을것
사회혼란기해병대전략분석관의고민
「올것이왔다」:5・16군사정변
「5・16혁명」과중앙정보부창설
중앙정보부해외정보국시사정보과보직
쿠바사태판단:처음겪은해외정보분석관의시련
중소과과장시절:실시간첩보분석을통한공산권연구의특전
한일회담반대소용돌이와「민족적민주주의론」비판
한일회담:조기타결을위한분석관들의노력
베트남파병:중앙정보부조사단의일원으로느낀것
「1・21사태」예측판단보고와청와대기습사건
미해군첩보함푸에블로호사건과한・미공조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
일본항공(JAL)요도(Yodo)호납치사건
김일성의대중군(大衆軍)사상과권력유지를위한북한군사병화(私兵化)

제3부1970년대전반고향땅을다시밟다
남북관계의획기적전기를조성한「8・15평화통일구상선언」준비참가
김일성이제시한「인민민주주의혁명」에대한대응
새로운대북전략의연구와남북적십자회담제의
남북고위급인사의비밀교환방문제기와실현
「7・4남북공동성명」의탄생(?)경위
남북대화와「10월유신」발표
남북조절위원회대표단원으로평양방문(1차방문)
평양체류첫날:모란봉초대소에서일어난일
김일성의초대식사:“합작합시다!”
청와대에서의귀환보고:“전략적변환는없습니다”
남북조절위원회북측대표단의서울방문:지켜지지않는‘대남비방방송중지’
제2차남북조절위원회회의참가:두번째평양방문
만경대방문에서생길일:6・25때행방불명된넷째형님소식을듣고

제4부1970년대후반다양한중앙정보분석관의역할경험
「김대중납치사건」과추락하는중앙정보부의위신
베트남의공산화와특수홍보활동전개
각종정보원(情報源)의발굴노력
북한의「8・18도끼만행사건」과그대응:미국의강력대응은없었다
북한핵정보의과소평가-나의오판
심리전국재건과「자유아카데미」창설:자유중국의정치사상교육실태시찰
건전한노사관계형성을위한정부산하기업의노동조합간부교육
김재규부장과의갈등:「자유아카데미」폐쇄
중앙정보부를떠나다:한경직목사님,“주님께서강집사에게피난처를주신거야…”
「재단법인극동문제연구소」창립,대만도피후귀국
「10・26사건」:평고동기동창정인형의순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