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삶, 그 속되고 아름다운 것을 모두 포용한
구스타프 말러의 삶과 예술 공간
구스타프 말러의 삶과 예술 공간
말러 음악의 음향적 원천이 된 이흘라바에서부터 음악 인생의 정점을 찍은 빈을 거쳐
마지막 예술혼을 사른 뉴욕에 이르기까지 말러의 삶과 예술 공간을 찾아가다.
만물을 품은 음악
“그는 만물 안에서 살았고, 만물은 그의 안에서 살았다.”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제자이자 동료로서 그의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기도 한 명지휘자 브루노 발터의 이 말처럼 말러는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것에서부터 가장 고귀한 것에 이르기까지 만물을 두루 포용한 음악 세계를 보여 주었다. 교향곡은 세계와 같아야 하고 모든 것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말러 자신의 말처럼 그가 만든 열 개의 교향곡은 분열되고 파편화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베토벤의 그것과는 또 다른 맛의 웅장한 서사와 깊은 여운을 선사한다.
1860년, 체코의 칼리슈테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말러는 유년 시절 대부분을 체코 동쪽의 모라비아 지역과 서쪽의 보헤미아 지역 사이에 위치한 이흘라바에서 보냈다.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흘라바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대가 1년 내내 주둔하고 있었기에 말러는 어린 시절부터 군사 문화를 일상적으로 접했다. 어린 말러는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군악대 소리를 비롯하여, 아버지가 운영하는 선술집에서 나는 취객들의 권주가와 남녀가 질펀하게 어울리는 소리, 동유랑 유랑 집시들의 노랫소리 등 세속의 다채로운 음향에 둘러싸여 자랐다. 이는 말러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되어 훗날 그의 교향곡에서 장송 행진곡, 스케르초 악장, 랜틀러, 왈츠로 용해되었다.
한편으로 어린 말러는 세속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곧잘 몽상에 잠기고는 했는데, 자연은 그리 화목하지 않은 집안 분위기와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내적 안식처가 되었다. 자연과 소통하는 이런 습관은 그의 평생에 걸쳐 이어졌다. 어릴 때는 이흘라바의 숲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성인이 되어 빈에서 활동할 때는 거의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교외 지역인 그린칭의 숲을 찾았으며, 여름휴가 때는 인적 드문 알프스의 대자연 속에 파묻혀 부지런히 곡을 써 내려갔다. 그의 위대한 걸작은 사실상 자연과 소통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그에게 자연이 선사한 선물과도 같다.
말러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는 ‘죽음’도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말러를 포함하여 열네 명의 형제자매들 중 절반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을 만큼 죽음은 늘 그의 가족 가까이에서 어른거렸다. 아래층 선술집에서 흥겨운 유행가 가락이 들려올 때, 말러의 가족이 거처한 2층 침실에서는 병에 걸린 아이의 숨이 꺼져 가고 있었을 것이다. 훗날 그의 음악에 세속적인 소리와 자연의 소리가 풍부하게 용해되어 있고, 희극적인 요소와 비극적인 요소가 공존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이런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는 평생 죽음이라는 주제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이에 생애 처음 작곡한 첫 번째 교향곡에 대해 “내 교향곡의 영웅은 무덤가에서 태어난다”라고 공언했으며, 말년에 작곡한 교향곡 9번에 대해서는 “죽음이 내게 들려준 것”이라 표현했다.
열다섯 살에 고향을 떠나 빈음악원에 들어갔지만 학업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말러는 중퇴 후 지휘자로 전향했다. 이후 라이바흐, 카셀, 프라하, 라이프치히에서 초년기를 보낸 그는 부다페스트와 함부르크에서 극장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안정 궤도에 올랐다. 특히 빈 유학 시절부터 깊이 매료된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알리는 데 적극적이었다. 치밀하고 정확한 그의 바그너 연주는 매번 엄청난 화제를 뿌리며 바야흐로 그는 유럽 최고의 샛별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1897년, 마침내 그는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음악의 도시 빈의 심장인 궁정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발탁되었고, 얼마 뒤에는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지휘자까지 겸임하게 됨으로써 음악 인생의 최고 정점을 찍었다. 지휘자로서 완고한 완벽주의자였던 말러는 혹독한 조련 끝에 적당주의에 젖어 있던 악단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비시즌 때는 알프스의 대자연 속으로 들어가 많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마지막 예술혼을 사른 뉴욕에 이르기까지 말러의 삶과 예술 공간을 찾아가다.
만물을 품은 음악
“그는 만물 안에서 살았고, 만물은 그의 안에서 살았다.”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제자이자 동료로서 그의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기도 한 명지휘자 브루노 발터의 이 말처럼 말러는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것에서부터 가장 고귀한 것에 이르기까지 만물을 두루 포용한 음악 세계를 보여 주었다. 교향곡은 세계와 같아야 하고 모든 것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말러 자신의 말처럼 그가 만든 열 개의 교향곡은 분열되고 파편화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베토벤의 그것과는 또 다른 맛의 웅장한 서사와 깊은 여운을 선사한다.
1860년, 체코의 칼리슈테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말러는 유년 시절 대부분을 체코 동쪽의 모라비아 지역과 서쪽의 보헤미아 지역 사이에 위치한 이흘라바에서 보냈다.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흘라바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대가 1년 내내 주둔하고 있었기에 말러는 어린 시절부터 군사 문화를 일상적으로 접했다. 어린 말러는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군악대 소리를 비롯하여, 아버지가 운영하는 선술집에서 나는 취객들의 권주가와 남녀가 질펀하게 어울리는 소리, 동유랑 유랑 집시들의 노랫소리 등 세속의 다채로운 음향에 둘러싸여 자랐다. 이는 말러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되어 훗날 그의 교향곡에서 장송 행진곡, 스케르초 악장, 랜틀러, 왈츠로 용해되었다.
한편으로 어린 말러는 세속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곧잘 몽상에 잠기고는 했는데, 자연은 그리 화목하지 않은 집안 분위기와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내적 안식처가 되었다. 자연과 소통하는 이런 습관은 그의 평생에 걸쳐 이어졌다. 어릴 때는 이흘라바의 숲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성인이 되어 빈에서 활동할 때는 거의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교외 지역인 그린칭의 숲을 찾았으며, 여름휴가 때는 인적 드문 알프스의 대자연 속에 파묻혀 부지런히 곡을 써 내려갔다. 그의 위대한 걸작은 사실상 자연과 소통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그에게 자연이 선사한 선물과도 같다.
말러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는 ‘죽음’도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말러를 포함하여 열네 명의 형제자매들 중 절반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을 만큼 죽음은 늘 그의 가족 가까이에서 어른거렸다. 아래층 선술집에서 흥겨운 유행가 가락이 들려올 때, 말러의 가족이 거처한 2층 침실에서는 병에 걸린 아이의 숨이 꺼져 가고 있었을 것이다. 훗날 그의 음악에 세속적인 소리와 자연의 소리가 풍부하게 용해되어 있고, 희극적인 요소와 비극적인 요소가 공존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이런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는 평생 죽음이라는 주제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이에 생애 처음 작곡한 첫 번째 교향곡에 대해 “내 교향곡의 영웅은 무덤가에서 태어난다”라고 공언했으며, 말년에 작곡한 교향곡 9번에 대해서는 “죽음이 내게 들려준 것”이라 표현했다.
열다섯 살에 고향을 떠나 빈음악원에 들어갔지만 학업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말러는 중퇴 후 지휘자로 전향했다. 이후 라이바흐, 카셀, 프라하, 라이프치히에서 초년기를 보낸 그는 부다페스트와 함부르크에서 극장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안정 궤도에 올랐다. 특히 빈 유학 시절부터 깊이 매료된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알리는 데 적극적이었다. 치밀하고 정확한 그의 바그너 연주는 매번 엄청난 화제를 뿌리며 바야흐로 그는 유럽 최고의 샛별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1897년, 마침내 그는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음악의 도시 빈의 심장인 궁정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발탁되었고, 얼마 뒤에는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지휘자까지 겸임하게 됨으로써 음악 인생의 최고 정점을 찍었다. 지휘자로서 완고한 완벽주의자였던 말러는 혹독한 조련 끝에 적당주의에 젖어 있던 악단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비시즌 때는 알프스의 대자연 속으로 들어가 많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말러 : 경계 위의 방랑자 - 클래식 클라우드 31
$2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