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 조선 청 공동감계와 국경회담의 연구

1880년대 조선 청 공동감계와 국경회담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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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1880년대 조선과 청 사이의 백두산 두만강을 둘러싼 제1·2차 공동감계·국경회담의 전말을 한중일의 문헌을 비교하며 객관적으로 접근 『1880년대 조선 청 공동감계와 국경회담의 연구』는 1880년대에 조선과 청 사이에 이루어진 두 차례의 공동감계(국경조사)와 국경회담에 대해 보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재구축하려는 목표에서 출발하였다. 기존 연구는 대부분이 관련된 사실에 대한 수많은 오해·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초적 사실의 재구축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역사해석의 기반을 제공할 수도 없고, 오늘날의 시점에서 그 문제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다는 것이 이 책을 쓰게 된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가난과 수탈에 찌든 조선빈민의 대규모 월간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시각만으로는 전체를 해석할 수 없으며, 양국 지방당국과 중앙정부의 이해관계와 입장까지도 포함하는 훨씬 넓고 복잡한 시야에서의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일차적인 결론이다. 이러한 새로운 접근과 분석에 의해서 이 시대 이후 본격화되는 조선인의 간도 이주나 이른바 ‘간도문제’에도 보다 정확한 이해의 기반이 되는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

김형종

저자김형종은서울대학교동양사학과를졸업하고동대학교대학원에서중국근대사를전공으로석박사를취득하였다.현재서울대학교인문대학동양사학과교수로재직중이다.저서로『아틀라스중국사』,『청말신정기의연구』가있고,역서로『신중국사』,『중국현대사상사론』,『진인각,최후의20년』,『1880년대조선-청국경회담관련자료선역』등이있다.

목차

머리말

제1장들어가는말

제2장1880년대조선-청공동감계와국경회담의배경
1.19세기후반조선북방주민의월경과이산
2.청의월간조선인귀환요청과조선의대응
1)‘경진개척’과청조의대규모월간민발견
2)청의월간조선민편입정책
3)조선의월간민쇄환요청
3.조선의국경문제제기와청의대응
1)조선지방당국의문제제기와어윤중(魚允中)
2)길림당국의대응과갈등의확산
3)양국정부차원교섭으로의전개

제3장제1차공동감계와국경회담
1.제1차공동감계의실행경과
2.제1차공동감계직후의국경회담
3.제1차공동감계국경회담이후양국당국의대응
1)길림당국의반응
2)이중하의보고와조선정부의대응

제4장제2차공동감계와국경회담
1.제2차공동감계의배경
1)중국측의반응과공동재감계제의
2)조선측의‘후퇴’와‘차지안치론’의제기
2.제2차공동감계국경회담의실행과경과
1)제2차공동감계의실행
2)제2차공동감계와국경회담의내용
3.공동감계국경회담이후양국정부의반응
1)이중하의결과보고와정부의대응
2)길림당국의보고와중국정부의대응

제5장제3차공동감계의무산과중국의동화정책추진
1.제3차공동감계의제기와무산
2.조선월간민장악을둘러싼경쟁의심화
1)조선지방관의월간민‘수탈’을둘러싼양국간의갈등
2)길림당국의편갑승과(編甲升科)추진과조선정부의대응
3)편갑승과(編甲升科)정책의성과와그의미

제6장나오는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발간사

출판사 서평

이책은1880년대조선-청의공동감계에만초점을맞추고있다.
1장에서는이책을쓰게된이유와그배경으로꼭알아두어야만하는백두산정계비의‘수수께끼’에대해서술하였다.
제2장에서는그배경을이루는19세기후반조선북방주민의월경과이산의문제(제1절)와청의월간조선인귀환요청과이에대한조선의대응(제2절)을다루고있다.특히1880년의‘경진개척(庚辰開拓)’의전말을언급함으로써이후두만강중류지역북안으로대규모의조선백성이월간(越墾)하는단서가되었다는점을지적하였다.그결과형성된대규모월간지(越墾地)를함경북도지방당국이실질적으로장악하여호적을편성하고각종세금과잡세및소작료를징수하는상황이출현하였고,이것이국경분쟁을낳은기본적인원인이된다는점을확인하였다.이러한대규모조선월간민의존재에대해길림당국이편입·동화정책을시도하게되면서,그들의쇄환(刷還)문제가논의되었다가,뒤이어조선함경도지방당국에의한국경문제의제기가이루어지고이에대한청의지방당국의맞대응으로양자사이의갈등이고조되어결국은중앙정부차원의교섭과공동감계로이어지는문제(제3절)를다루고있다.
제3장에서는1885년의제1차공동감계(乙酉勘界)와국경회담에대해다루고있는데,우선제1차공동감계가실행되는경과에대해서술한다음(제1절),뒤이어제1차공동감계직후에이루어진국경회담의내용을분석하고있다(제2절).그리고그다음에는제1차공동감계·국경회담을마친다음양측당국의대응이어떠한것이었는지를길림당국과조선정부의대응으로구분하여분석하고있다(제3절).이결과조선은‘토문강=분계강론’을더이상고집할수없게되었고,조선월간민(朝鮮越墾民)의안치(安置)문제에보다중점을두게되었다는점도확인이된다.
제4장에서는1887년의제2차공동감계[丁亥勘界]와국경회담이이루어지는과정과그내용에대한분석을하였다.조선측이기존의입장에서후퇴하여과거처럼두만강옛경계를지키겠다는태도로방향을선회하면서차지안치론(借地安置論)’으로당면문제를해결하겠다는입장으로나왔지만,중국측의거부로인해결국은제2차공동감계·국경회담에응하게되는배경을제1절에서다룬다.그다음은제2차공동감계의실행경과와국경회담의내용을분석하고있다(제2절).그리고제3절에서는제2차공동감계와국경회담이후에나타난양측당사자의결과보고와이에대한양국정부·지방당국의반응을살피고있다.이때에도마찬가지로길림당국의강경한반응은결국제2차공동감계와국경회담이결렬될수밖에없는가장중요한원인이되었던것으로보인다.
제5장에서는길림당국이조선월간민에대한적극적인편입정책을다시추진하는문제를다루고있다.제1절에서는제3차공동감계가다시길림당국의요구로제기되지만점차무산되는과정에대해분석하고있다.제2절에서는조선월간민의장악을둘러싼양국사이의경쟁의심화,그리고길림당국의편갑승과(編甲升科)추진에의한조선월간민의장악시도와그성과에대해서간단히다루었다.
이책에서는조선과청사이에있은공동감계를둘러싼갈등을대략청일전쟁직전까지의시기로한정하여다루고있는데,그렇다할지라도이책의성과는간도가생기게된배경과전말을한중외교문서를중심으로다룸으로서보다객관적으로이해할수있게되었다는점이다.

[책속으로추가]

청정부가지금까지이문제를사실상중국·조선사이의문제가아니라길림·조선사이의문제로한정하여다루어왔던것도사실이기때문에,어쩌면길림측에문제의최종적인해결을떠넘기는것이당연하였을지도모른다.하지만석을수를대도문강으로설정하면서다시관원의파견과감계를통해문제를해결한다는방법이도저히조선측을설득할수없다는것은이미제1·2차공동감계·국경회담에서길림측이분명하게확인한바이기도하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이렇게아무런기대도할수없는제3차공동감계를길림장군이최종대안으로제기한것은결국누구도책임지고이문제해결을위한‘결단’을내리려하지않았던데에서나온결과이다.제1·2차공동감계·국경회담에서청조가여전히‘천조상국’으로서조공국인‘속방’에대해‘자소지의(字小之義)’를지키고자하는외교적방침을고수하는한,그리고조선측이이러한중국의태도에기대어양보와시혜를계속기대하는한,이러한분쟁은결국에가서는청황제나길림장군의‘결단’이나‘양보’가아니면풀릴수없는난제가될수밖에없었다.앞서지적한대로일단‘토문강’이아닌‘두만강’(도문강)선으로국경이설정되는것은이미기정사실이었으므로,중국측으로서는굳이그러한결단과양보가필요하다고여기지않았던것도아마이러한‘유예’에일정한영향을미쳤을것이다.397-398쪽

주지하듯이조선백성의이지역에대한진출은이무렵은단지시작단계를거친것에지나지않았기때문이다.그리고이후청일전쟁이나의화단사건등국제적인격변을거치면서만주지역은그격변의소용돌이에휩쓸려가게되었다.길림지역의정세역시마찬가지여서이에따라조선백성의월경·이주나그에따른토지소유권,호적내지는국적의문제등은이후에도여전히길림당국이마주쳐야할수많은과제를낳게되었다.청일전쟁에서의패배에따른청의국제적위상추락,의화단사건을틈탄러시아의만주점령,나아가한국지배를노린일본의개입으로‘간도문제(間島問題)’가불거지면서이를둘러싼국경·영토문제는이제단순하게청과조선양국간의문제가아닌훨씬복잡한국제적문제로비화되기도한다.472쪽

제1·2차공동감계·국경회담역시바로그러한전사(前史)의중요한부분을이루고있었다.이후시기가되면청일전쟁이후조선-청관계의재편이이루어지면서제1·2차공동감계·국경회담을강력하게규정하였던‘사대-자소’질서와는전혀다른만국공법에의한근대적영토·국가관념의기초위에서새로운분쟁이다시재연되기때문이다.제1·2차공동감계·국경회담을통해양측이자신에게유리한논리와근거를끊임없이찾아서제시하였던것처럼,이후에도새로운상황과배경속에서계속해서새로운논리가모색되는과정을거치면서두만강북안의‘간도’를둘러싼국경분쟁은전혀새로운양상·국면을맞이하게되었다.5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