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의 자리 - 트리플 18 (양장)

누의 자리 - 트리플 18 (양장)

$10.36
저자

이주혜

번역가이자소설가.저자와독자사이에서,치우침없이공정한번역을하고자노력하고있다.서울대학교영어교육학과를졸업하고영어로된문학작품을아름다운우리말로옮기는데관심이많아아동작가로활동하면서,현재번역에이전시엔터스코리아에서출판기획및아동서및자녀교육서전문번역가로활동하고있다.역서로『왜요,엄마?』,『레이븐블랙』,『지금행복하라』,『거인나라의콩나무』,『고대이집...

목차

소설누의자리
소금의맛
골목의근태

에세이누군가향을피웠다,아니불부터붙였던가?

해설자리없는여자들―소영현

출판사 서평

“오늘그기다림은끝났다.
내가너를이자리에데려다놓을테니“

표제작이자첫번째소설인「누의자리」는너의죽음이후에서시작한다.내가너를처음만난곳은학원의신입강사환영식.“내자리는어딘가요?”하고묻던너에게내가건넨일말의호의는너에게는유일한‘환대’였다.그리고그것이신호였던듯너는나를좇기시작한다.오래전사라진단어,아무도알아주지않는개념인‘누’에“오직너와나,단두사람”이라는새로운의미를부여한다.소설은너의죽음이어떤이유에서인지밝히지않는다.다만네가생전자신의수의를만들기위해‘제비뜨개방’에오갔다는것으로네가스스로의죽음을알고있었다는것을보여준다.사실이소설에서네가왜죽었는지,혹은왜죽음을택했는지는그다지중요하지않다.단지너는죽었고,나는너의가족이택한“짐승의아가리같”은바다대신네가좋아하던도토리떨어지는소리가들리는곳에너의자리를마련하고자한다.“뼛가루한줌”대신네가남긴누의일기장과수의를태운재를말이다.

구멍은좁고길어야한다.제법깊이박힌원통속흙을모두파내고거기에질척거리는너의재를부었다.이제파낸흙을다시채우고흔적을지울차례다.수백년동안왕을기다렸던빈자리한귀퉁이가이제너의자리가될것이다.너는이곳에서왕을따돌리고느긋해진한여자와나란히도토리떨어지는소리를들으며휴식할것이다.나는사계절내내이곳을찾아와너와함께산책할것이다.그러면비로소이곳은누의자리로완성될것이다.
(「누의자리」,31~32쪽)

간절한부름에대한응답
너를읽고나를쓰는이야기

「누의자리」가사랑을잃은후애도의이야기라면「소금의맛」은끝내지켜낸사랑에대한이야기다.너와나는신의이끌림으로처음만났다.너의나라로여행을간나는그나라에서신으로취급된다는어린사슴을따라걷다우연히너를마주한다.신의안배로시작한사랑이어서일까.너와나의사랑이뜨거웠던때는오직신들의도시하코다테에서뿐이었다.하코다테에서너와나는연인이었다.하지만팬데믹으로하늘길이끊긴후너와나는만남도,사랑도멈춰버렸다.“우리의사랑이오직그도시에서만가능했다는사실이균열의시작”이었던것이다.그로부터시간이흐른어느날너는나에게메일한통을보낸다.온통너의말로쓰인메일에나는혼란스럽기만하다.번역기를통해알아낸메일의내용은둘이이야기를나누던소설의도입부일부.나는무얼의미하는지도모르는글을뜯어살피다기묘한번역릴레이를시작한다.

너의번역은무엇을향하고있을까?알길이없어나는절망했다.교실너머로벌써해가지는게보였다.하늘의뺨이붉어지고있었다.노을에대고너의이름을몇번불렀다.잠시후나는노트북에창을두개분할해서띄웠다.하나는영어원서전자책,또하나는한글프로그램이었다.나는그날교문이굳게닫히는것도모르고늦도록『소금의값』원서를내식으로번역했다.
(「소금의맛」,65쪽)

안식의공간,
그리고남겨진이의후회와사랑의자리

마지막소설「골목의근태」는「누의자리」의거울상같은소설이다.두소설은제비뜨개방이라는공통의공간을기준으로서로대칭된다.「누의자리」의너와「골목의근태」의나는‘엄마노릇’을강요받다허물뿐인죄목으로이혼(당)하며각가정에서퇴출당한다.이후둘은제비뜨개방에방문하게되는데,이때「누의자리」의너,희원이끝내죽음을맞이한다는것과달리「골목의근태」의나는제비뜨개방이라는장소를경유함으로써삶으로나아간다는점에서차이를보인다.

누구도내가아이를버린게아니라고말해주지않았다.누구도내가지은죄에비해너무나과도한벌을받았다고말해주지않았다.나를낳고키워준친정엄마마저도이혼직후친정에와누워있는내게혼잣말인듯중얼거렸다.그러게,어미가되어서는왜그렇게일욕심을부렸어.
(「골목의근태」,95~96쪽)

이주혜의세소설의나와너는모두여성이다.아이를잃고,가정을빼앗기고,강요받고,부당앞에서도아무말할수없는여자들.그럼에도사랑하고자하는여자들.이들여자들은기존의가부장제를무너뜨리거나부정하고자하지않는다.다만묵묵히살아갈뿐이다.『누의자리』는빼앗긴자리를되찾으려는투쟁의시도가아니다.너와나라는둘만의기록을적어내리던공책,서로다른언어가뒤섞인둘만의번역서,“왔어요?”하고앉아있던난로옆자리를내어주는호의같은것.『누의자리』는세상의잣대에서외면받은이들을향한이주혜의다정한부름이며따뜻한연대의이야기다.

■■■작가의말
말하려면우선들어야하고들으려면일단말을걸어야한다는당연한이치를깨닫고나는웃었던가.그랬다면아마부끄러운웃음이었을것이다.아직멀었다.부끄러우면웃을게아니라정색을했어야지.나는얼굴을고치고묘지를떠났다.여행은거기서끝이났지만어쩐지새로시작된것같기도했다.
_「누군가향을피웠다,아니불부터붙였던가?」중에서

■■■해설
이주혜의소설들은여성성에근거해여성에부여된자리들에대한고발이자자리없는여자들에대한구원의이야기이다.우리라는이름으로는자리가허락되지않으며죽음이후에도자리를얻지못한여자들에대한애도의이야기인것이다.너와나의자리,우리라는말속에언제나남아있는허위의영역을소거한채로너와나를위한자리를마련하고,그자리에이름을붙이고자하는시도가『누의자리』를통해수행된다.
_소영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