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스런 입맞춤(일반판) (정한아 시집)

어른스런 입맞춤(일반판) (정한아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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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영원한 찰나의 아름다움
한국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문학동네시인선」 일반판 제7권 『어른스런 입맞춤』. 미래파의 특징과 서정성을 함께 갖고 있는 포스트미래파 시인들의 모임인 동인 ‘작란’의 멤버 정한아의 첫 번째 시집이다. 저자는 이번 시집에서 만나서 가족을 이루고, 헤어져 가족이 파괴되는 가족의 기원과 생활을 펼치기도 하고, 대학시절 우리가 저마다 품고 있던 단어들, 순수, 순결, 청춘, 열정, 이상, 혁명,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진 자리에 서서 어떻게 생을 시작하고 무엇으로 그것을 부려나갈지 폐허에서 고민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것, 이전의 모든 것은 전혀 사랑이 아님을 선언하며 어떤 사랑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지 묻고, 이야기한다. 미래와 과거를 뭉개고 이곳과 저곳을 아우르며, 날짜들을 지우며, 찰나와 영원을 하나로 묶으며 자유롭게 변화하는 ‘메타세쿼이아’, ‘첫사랑은 피라미드로 가고’, ‘크루소 씨가 없는 세계’ 등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상사(相思)

기다리면서 열매는 달아간다

그늘에서 아가리를 벌린 그대의 목젖은 타들어가지

햇빛과 함께 밤과 함께 쏟아지는 스콜과 함께
붕붕거리는 벌 떼와 다른 열매들과
제 과육을 뚫고 나갈 수 없는 씨앗들과

육식의 심성을 지닌 초식동물, 그대
아가리의 경련과 함께
한 열매가 기다리며 닳아간다
저자

정한아

저자정한아는1975년경남울산에서태어나여기저기에서자랐다.성균관대철학과를졸업하고연세대대학원국어국문학과에서박사과정을수료했다.2006년『현대시』로등단했다.‘작란(作亂)’동인이다.

목차

시인의말

愛人
H씨와과자
어떤기도
타인의침대
무정한신
죽은예언자의거리
눈을가리운노래-주신제(酒神際)1999
거울속의잠
서랍
어른스런입맞춤
축안개성탄전야
이상한가투(街鬪)
첫사랑은피라미드로가고
이웃사랑의위생관념
회의적인육식동물의연애
작년의포플러가보내온행운의엽서
고구마연구실
시곗줄
일요일의방파제가가져다준것
그렇지만우리는언젠가모두천사였을거야
메타세쿼이아
새벽의전화
만년설(萬年雪)-아홉살에당신의손이할수있는것
상사(相思)
집에돌아와십년째두문불출인크루소씨의앵무새
집에돌아온크루소씨의십년만의외출
크루소씨네옆집반상회에갔더니
크루소씨네도둑고양이
크루소씨가없는세계
크루소씨의일기
크루소씨네섬이있다-금요일의잠복일지
크루소씨의일요일
무당벌레
어제의거울과오늘의쇼윈도사이
당신은이제좀지쳤어요
가위
떠도는별
모래의향방
인간의시간
1991년,동춘서커스단
AbsoluteK(1966.2.16.~2008.6.9)
하필,사랑
장마
SagittariusRising
자살한여배우-이상한와신상담(臥薪嘗膽)
독감유감
살아난백설공주의미래에대한불안
사물,그쓸쓸한이름을위하여
부루의뜨락
이즐거운여름-네눈속의나의눈을들여다보았을때
심신이원론의경험론적사례보고
그리스도의순환
어딘가수상쩍은우리들의신앙생활-존경심
쪽팔리는일
얼굴
당신은누구시길래
다른못,가시연
비애의대가
로,
험버트씨,
론울프씨의혹한
찌그러지는모과

해설|장석원(시인)
이형(異形)의음악,우리들의파티

출판사 서평

1.
여기,떡하나주면안잡아먹지하는호랑이에게,눈하나깜짝하지않고‘호랑이가떡으로만살수있는가,먹어서배부른것이사랑인가’(「회의적인육식동물의연애」)하고대답하는시인이있다.그녀에게‘사랑’은‘지옥’이며‘믿음은열어도나갈수없는바깥’(「이웃사랑의위생관념」)이다.허나이‘지옥’에는‘모든가련한것들’을애도하는‘때로한찰나가영원을잡아먹는그런사랑’(「어떤기도」)을하는그녀가있다.2006년『현대시』로등단한시인정한아다.그녀가데뷔6년만에첫시집『어른스런입맞춤』을들고왔다.첫시집의뜨거움이라하면,날것,죽기전에아가미를펄떡이는물고기의그것일텐데,정한아의첫은좀남다른데가있다.덜익었다거나여물었다는비유보다어쩌면오래익지않을지도모른다는말이더맞겠다.그녀의첫을열매맺기를거부하는시들이라일컫음은어떨까.중요한것은시간을거스르는거부가아닌,이미그것을넘어섰다는데있다.

2.
'거대한감옥'이거나'타인의침대'인이세계에서정한아가살아가는방법은'하필,사랑'이다.죄짓지않고사는이없지만그죄다음이하필사랑이라니.타인에게침대는휴식의공간이고시간이다.허나그것은곧나의불편한세계로귀결된다.시인은'춥고캄캄하고척척한곳'에서'못생긴심장의나지막한허밍'을들으며‘마주치자마자내골수에자기의촉수를담그는얼굴들과’‘차일수록자욱해지는지랄같은외로움을몰고’(「이상한가투(街鬪」)가며살아간다.삶은‘영원히붙박인폭우속캠프의밤’(「눈을가리운노래」)이며‘진흙투성이’의‘끝나지않는축제’(「눈을가리운노래」)다.

이곳에바닥도천장도없다는것을알게되었을때,있어야한다고믿지도않게되었을때,비로소우리는진공상태에서도살아남는법을배웠다고,아틀란티스인처럼물속에서도숨을쉴수있게되었다고,언제나그래왔다고,우주인이화성에가도출구따위는없다고,그러니까우리가

완전히체념했을때,썩은동아줄,잭의시퍼런콩나무,팔다리없는무지개너머에도바깥은없고발바닥은아등바등두팔은지푸라기처럼꺾인너의목을끌어안고어푸어푸(사랑해사랑해)((살려줘살려줘))
-「타인의침대」

어느날두사람이만나
한사람을낳고모두사라지는
말할수없이폭력적인생리

어느날두사람이만나
한사람을죽이고손을씻는
말할수없이공공연한심리

이거리의이정표는이제
아는것들만알려준다이미
와있는것들의끔찍한소용돌이
-「죽은예언자의거리」

3.
이부정의세계는도대체어디에서온것일까.정한아의작품속에등장하는‘앵무새’는그질문을들고온다.그녀에게‘앵무새’는고독의증거그자체다.‘앵무새’는자신의언어가없다.그것이그의정체성이다.정한아에게타자,타인은‘앵무새로하여금대신말하게하’는존재들이다.내게이름을지어준아버지도‘앵무새’와떠나버렸고세계는앵무새의정체성과다름없다.고독은거기에서시작된다.그녀가말하는것은‘앵무새’의목소리로다시한번들려오고그것은한존재의고독으로다시그녀자신에게돌아온다.고독은그녀로하여금만들어지고사라진다.휘발되는언어는앵무새로하여금하나의세계로다시들려오는것이다.이런의미에서앵무새는시인의‘거울’이자‘자화상’이다.

오늘은금요일,
햇볕이좋았어요
하지만바람이불어나갈수없었죠
붉은깃털이휘날리는황폐한사방벽사이에서
나는그냥,있었다가없었다가
머리칼같은어둠이내리자벽들이다가왔죠
당신의말들이밤마다벽에씌었다지워지기를여러날
앵무새를찾으러간적도있어요
-크루소씨가없는세계

연극이끝나자관객은침묵했다
어깨에앵무새한마리씩을동행하고
하얀눈자위하얀손바닥하얀이빨을드러내고
그들은빨간동그란입술로중얼거렸다
저건너의이야기야
너는여기에가득하고
너는앵무새로하여금대신말하게하고
너는사악하며
언제깨질지모르는화분이나거울을닮았다
-크루소씨의일요일

4.
왜‘하필,사랑’인가.정한아에게‘사랑’은‘재투성이심장으로탁구라도치면서위대한죄’(「그렇지만우리는언젠가모두천사였을거야」)를짓는일이며‘한번도본적없는당신의맨발’이다.그것은‘불꺼진빵집진열장에놓인어제구운식빵처럼가지런하고적막’하다.시인은고독하고외롭지만,그것은또부정과경계의대상이기도하다.그러나그녀는사랑하기를포기하지않는다.그것이정한아의‘첫’이다.

기다리면서열매는달아간다

그늘에서아가리를벌린그대의목젖은타들어가지
햇빛과함께밤과함께쏟아지는스콜과함께
붕붕거리는벌떼와다른열매들과
제과육을뚫고나갈수없는씨앗들과
육식의심성을지닌초식동물,그대
아가리의경련과함께
한열매가기다리며닳아간다

-「상사(相思)」

이전의것은전혀사랑이아냐
아니,모든사랑은언제나처음
하루와천년을헛갈리며천국과지옥사이달랑달랑매달린
재투성이심장은여러번굴렀지

우리심장은생명나무와잡종교배한슈퍼선악과
질문의수액은여지없이떨어져자꾸만바닥을녹여가령,
우리는몇시입니까
우리는어디입니까
우리는부끄럽습니까

외로워죽거나지겨워죽거나
지금에덴에는뱀과하느님뿐
그외나머지인우리는

입을맞추고눈꺼풀을핥고우주선처럼도킹하고어깨를깨물고
피를흘리고그피를얼굴에바르고입에서모래와독충을쏟고서로의심장을꺼내어
소매끝에대롱대롱달고

-「그렇지만우리는언젠가모두천사였을거야」부분

5.
서른일곱,첫시집의정한아는지금‘간신히노련하다’.어패가있을수있는이문장을자세히들여다보면‘간신히’라는아슬아슬함과‘노련함’이라는안정됨을함께가져가는궤이다.펄떡뛰는감각의몸뚱이를받쳐주는깊고넓은사유의침대,그것이바로정한아의힘이아닐까.
총예순두편의시가일정한부의나눔없이펼쳐져있는이시집속우리가특히주목했으면하는시한편의몇구절들을떠올려본다.“우리를웃게하는것이끝내는/우리를울게한다그것이/중독의정해진회로/우리는얼마나많은불행을견디어낼수있는가/우리는진화의극점에있다”
그러고나니이상하지,아무것도모른다는듯무표정속에침잠해있던그녀가정말이지,다알고있었다는듯가장마지막에매우차고도씁쓸한미소를던진다.제목말마따나이시를읽고나니우리사는거참‘쪽팔리는일’은아닌가,여러모로생각해보게된다.“우리는울다가웃는다/우리는얼마나많은불행을견디어낼수있는가/견딜수없을때견디지않는건/너무나도쪽팔리는일이니까/우리는필사적으로웃고있지만”
“우리는빌지않았지만빌어먹을삶”을살아가야만하는이삶,이슬픔과의입맞춤.이렇듯정한아의시됨은아마도‘어른’과‘어른스런’사이쯤에서태어나는것이아닐까.

●시인의말
구년만에만난로스는수염이하얘졌다.
“머리도자세히보면반백이야”하고말했을때,일년내내눈이라고는오지않던도시에쏟아진폭설은저녁부터내린비에조
금씩녹고있었다.
일요일저녁이었다.시내에는크리스마스불빛이쏟아졌다.나는마치거기서계속살았던것처럼길을묻지않았다.그는이제더
이상선생이아니었고,한국인애인과헤어진지칠개월이막지났고,그가여자를사랑하지않는다는것을알면서도구년째한집
에서살기를고집하고있는수전과부엌을나눠쓰고있었고,여전히외롭지않으려고일부러바빴다.바쁘려고그는드라마를쓰기
시작했다.복사와사랑에빠진게이청년의이야기다.
“사십년만에성당에갔어.”
그는신부에게당한적이있다.보이스카우트캠프에서.
“하지만이제내꿈은사제가되는거지.”
“이상해!하지만어울려!”
그가허위허위베네딕트수녀회의수도원을찾아가문을두드렸을때뉴욕출신의깐깐한수녀는그를맞아들이고는아래위를훑
어보았다.
“수녀님,술을마시는것은죄악입니까”
“죄악이지,암!”
“담배를태우는것은요”
“그것도죄악이지,암!”
“문신은요?”
“문신한자들은지옥불에훨훨타지,암!”
“……전,……전,죽어야겠군요.”
“알면됐어!”
우리는웃었다.
그의쓸쓸하고푸른눈깊숙이평안이고여있었다.빗줄기가거세어지고있었다.
“걱정마.내가우산을가지고왔거든.”
하지만가방속에는시집만들어있었다.나는우산대신시집을그에게주었다.『EnoughtoSayIt’sFar』.
“괜찮아.좀늙긴했지만,너처럼하루에한갑씩담배를태우진않으니까.”
우리는또웃었다.
그는애리조나에서미성년자포르노를보다가밴쿠버로도망와경찰에잡힌,텍사스출신의차이니즈재패니즈소년의친구이야
기를해주었다.
“장당십년이래.그는육십년후에출감한다.”
우리는자꾸만웃었다.
비가내리는데도,숙소로돌아오는길은여전히눈이쌓인채여서우리는우회로를찾아야만했다.
“기억해줘.내가널사랑한다는거.”
그는조금울고있었나.사람들은섬에서아직돌아오지않았고,나는방안에서그의말들을찬찬히되새기고있었다.신부가되
기로결심한중년의게이를위해나는몇년만에기도를했다.
이상처받은어린짐승들을보살펴주소서.
그가집으로가는길에울지않게하소서.
아니,그저울음을참지않게하소서.
2011년7월
정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