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한남자와한여자의이야기입니다.
말語을잃어가는한여자의침묵과
눈眼을잃어가는한남자의빛이만나는찰나의이야기
드디어오랜기다림끝에찾아낸것일까.전소해버린줄알았던언어의검부러기밑에서올라오는참된음절들을.작가는언어가몸을갖추기이전에존재하던것들―흔적,이미지,감촉,정념으로이루어진세계로우리를데려간다.신생의언어와사멸해가는언어가서로만나몸을비벼대는찰나,우리는아득한기원의세계로돌아가그곳에동결해둔인간의아픔과희열을발견한다.그리고문득깨닫게된다.자신의몸이기억하는참된욕망과조우하기위해서는0도근처에서차갑게끓어오르는글쓰기의언저리까지기어이내려가야한다는사실을.그곳에서우리는죽음과탄생이새로운몸을얻어환생하는,세속의기적을목격하게된다.이렇게아름답게,온전하게몰락하는방법을가르쳐준소설이우리에게있었던가._이소연(문학평론가)
다만한여자와한남자의기척이만나는이야기입니다.
여기,한여자의이야기
그것이다시왔어.
어떤원인도전조도없이,여자는말語을잃는다.그것이처음왔던것은열일곱살겨울.말을잃고살던그녀의입술을다시달싹이게한건낯선외국어였던한개의불어단어였다.시간은다시흘렀다.이혼을하고,아홉살난아이의양육권도빼앗기고,다시그렇게말을잃어버린후,일상의모든것들을다놓을수밖에없었던여자가선택한것은이미저물어죽은언어가된희랍어.그곳에서만난희랍어강사와여자는서로의앞에침묵을놓고더듬더듬대화한다.
그리고,여기,또한남자의이야기
시간이더흐르면……내가볼수있는건오직꿈에서뿐이겠지요.
가족들을모두독일에두고십수년만에혼자한국으로돌아와희랍어를가르치는남자.남자는점점빛을잃어가고있다.볼수없다던마흔이가까워오지만아마일이년쯤은더볼수있을지모른다.아카데미의수강생중말을하지도,웃지도않는여자를주의깊게지켜보지만여자의단단한침묵과마주하자두려움을느낀다.살아있는사람에게선본적없는지독한침묵.그리고점점소멸해가는남자의미약한빛.이어스름이완전한밤으로이어지는걸까.
이소설을읽는일은,어쩌면한장의사진을오래토록들여다보는것과같은일일지도모르겠다.
한장의사진|필립퍼키스는,『사진강의노트』제일첫장에서‘바라보기’에대해이야기한다.사진에서눈을떼지말것,먼저대상의표면에떨어진빛의실체를느낄것.“의미는없다.오로지사물만이존재할뿐”이라는W.C.윌리엄스의말을인용하며그는말한다.
사진이찍혀지는순간까지그것과함께머물러야한다.그러나삶전체를통틀어내가배운모든것들은이머무름과반대선상에있었다.있는그대로본다는것:빛,공간,거리사이의관계,공기,울림,리듬,질감,운동의형태,명암…사물그자체…이들이나중에무엇을의미하든아직은사회적이지도,정치적이지도,성적이지도않다.이름을주지도,상표를붙이지도,재보지도,좋아하지도,증오하지도,기억하지도,탐하지도마라.그저바라만보아라._필립퍼키스,『사진강의노트』
비슷한의미에서,윌리로니스는이렇게말하기도한다.
보통나는일어나는것은아무것도바꾸지않는다.그저바라보고,기다린다.실재가더생생한진실속에드러나도록.그것은시점의쾌락이다,때론고통이기도하다.일어나지않은것을,혹은아직일어나지않은,일어날일을바라는것이기때문에.
_윌리로니스,『그날들』
이렇게오롯이사물그자체(혹은존재하는그자체)가담겨진한장의사진을오래토록,가만히,응시하고있다보면,거기에선천천히어떤기미들이발견된다.마찬가지로이소설『희랍어시간』을들여다보는일은,어떤기미를발견하고흔적을더듬는일이다.그리고희미하게떠오르는그기미와흔적들은어두운암실,정착액속의사진이점점선명하게상을만들어내듯어느순간고대문자처럼오래고단단한이야기를만들어낸다.그리고그것은과거의시간과,그리고현재까지이어진현재진행형의시간까지를포함한다.
시간이란무엇인가요?지금내앞에있는당신을찍는다면그건바로이순간일어난일입니다.십년후에당신이그사진을볼때,순식간에지금이순간으로돌아옵니다.(……)사진은동결된순간이며기억입니다.하지만사진은늘현재의순간을담고있지요.바로사진의마법이지요._필립퍼키스,『필립퍼키스와의대화』
그어떤사진이라도,만약그것을위하여적절한맥락이창조된다면그러한‘현재’가될수도있다.일반적으로사진이좋으면좋을수록창조될수있는그맥락은보다완전한것이된다.
그러한맥락은시간속에서그사진을대신하게되는데―그것은불가능한것인그것자체의원래시간이아닌―서술되는시간속에서이다.서술된시간은그것이사회적기억과사회적행위의성격을띠게되면역사적시간이된다.짜맞추어진서술되는시간은그것이자극하고자하는기억의과정을존중해야할필요가있다.
_존버거,『본다는것의의미』
사진을현상하고인화하는암실에서가장중요한것,제대로된사진을얻기위해가장중요한것은다름아닌빛과어둠이다.암실에자연광이새어들어가게되면사진은하얗게바래어지고,암등의빛이과하게되면사진은까맣게타버린다.그리고또기다려야한다.
사진이완전히마른후에야,인화가제대로되었는지알수있다.
빛과어둠과시간이만들어낸예술.그것이사진이라면,『희랍어시간』은해서,그래서,한장의사진이며,그것은오로지빛과어둠으로만,명암으로만완성되는한장의흑백사진이다.“오직흑과백사이에존재하는명암속에서그진실을밝히는.”(G.I.구지프)
지구상에존재하는가장오래되고단단한문자인희랍어처럼,빛과어둠으로만완성되는흑백사진처럼,소설은일체의군더더기가없으며그결이곱고단단하다.목수이며사진작가인서영기는어느인터뷰에서말했다.“목수는몸의반응이중요하다.나무를만지고몸이반응하며정신적으로집중하게된다.사진은세계에대한내사고의반응이다.대상은달라도반응이반복되고집중되면서동일한지점에서둘은경계가없어진다.”(월간사진,2011.11)
한강의경우,그리고이소설『희랍어시간』의경우그것은언어일것이다.넘치거나모자람이없는감정과고르고또고른절제된단어들.언어로,문장그자체로세계를보고느끼고표현하는.단어하나하나,문장하나하나가이미한장의사진과,이한편의소설과그대로닮아있는.
이소설과함께,우리는이미오래전에존재하던것들,그기미와흔적들,영원과도같은어떤찰나들,그리고그모든것들이한자리에서만나는어떤한장면을목격하게될것이다.